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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개의 영화 이야기

28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추출한 여섯 개의 여성 서사. <세기말의 사랑> 임선애 감독 인터뷰

프로필 by 손안나 2023.11.10
햇빛 속으로 걸어가는 여자들,<세기말의 사랑> 임선애
<세기말의 사랑>은 1999년 12월, 새천년을 앞두고 사랑 때문에 모든 것을 잃은 영미(이유영)가 짝사랑 상대의 아내 유진(임선우)을 만나 불편한 동거를 하며 잃었던 삶을 회복해가는 이야기다. 영미는 추한 외모와 폐쇄적인 성격 때문에, 유진은 희귀 근육병으로 몸을 가누지 못하는 장애인이라서 이 사회에서 실격 당한 여성들이다. 초반부 한 여자의 지고지순한 짝사랑 이야기로 보이던 영화는 흑백의 장막이 걷히고 마리아 스바르보바풍의 색채가 더해지면서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간다. <세기말의 사랑>은 감독의 데뷔작 <69세>(2020)가 그렇듯 주류 사회에서 배제된 인물이 어떻게 용기를 회복하고 자신의 존엄을 지켜가는지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늘 속에서 살던 여성들은 햇빛 속으로 걸어가고자 한다.

 
정반대의 매력을 가진 이유영과 임선우의 얼굴이 한 화면에 담길 때의 묘한 긴장감이 흥미로웠습니다. 캐스팅이 절묘했어요.
예쁜 장애인, 못생긴 비장애인이라면 흔히 생각하기로 예쁜 장애인을 전형적인 미인으로, 못생긴 비장애인을 개성 있는 외모로 캐스팅하게 마련이죠. 그런데 비호감이라는 것도 결국 주관적 해석이잖아요. 없던 인물을 새롭게 만들어간다는 생각으로 접근했습니다. 무엇보다 두 배우를 섭외하면서 다른 감독은 그리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는 욕망이 있었어요. 그 전에 이유영 씨를 만난 적은 없지만 여성스러운 이미지에 연기를 잘하는 배우로만 알고 있었죠. 이 배우를 변신시키고 싶었습니다. 임선우 씨는 독립영화를 통해 도도해 보이는데 푼수 같기도 하고 이상한 팜파탈 같다고 느꼈어요. 이번 역할에 잘 맞는다고 생각했죠. 두 사람이 참 다르게 예뻐요. 예쁘다는 게 꼭 외모만 얘기하는 건 아니고요.
“사회에서 실격 당한 두 여성이 불편한 동거를 하게 된 이야기”라는 시놉라인만 보고서 이렇게 사랑스러운 영화일 줄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영미는 비호감 외모와 폐쇄적인 성격 때문에, 유진은 장애인이라 사회에서 배제된 여성들입니다. 이렇게만 얘기하면 장애인에 대한 인권영화로 들릴지 모르지만 그 또한 선입견이라고 생각해요. 주인공이 그런 두 사람인, 사랑이야기를 그리고 싶었어요. 원래 한예종 졸업작품으로 썼던 이야기이고 저의 20대와 세기말의 기억이 투영되어 있어요. 더는 그 시대에 연연하지 않았으면 좋겠고 힘들지만 통과해내고 싶다는 바람으로 이야기를 마무리 짓게 됐어요.
지구종말론, 밀레니엄 버그 등으로 세상이 혼란했던 시기를 시대적 배경으로 설정한 이유가 궁금합니다.
처음엔 2012년 당시를 현재로 두고 썼던 이야기예요. 나중에 다시 꺼내 보니 지금과는 아구가 맞지 않는 부분들이 꽤 있더라고요. 그럴 바에는 차라리 더 과거로 가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평생 억눌려 살던 영미가 어떻게 하면 나아갈 수 있을까, 내일 당장 죽는다면, 세상이 끝날 것 같은 순간이 오면 용기를 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니 그 다음부터는 시나리오가 잘 써지더군요. 실제로 세기말은 저에게도 혼란스러운 시기였습니다. 밀레니엄 버그를 걱정하며 플로피 디스크로 자료를 다 백업해놨던 기억이 납니다. 내 인생이 이렇게 쉽게 끝난다고? 말도 안 돼. 내가 이렇게 쉽게 죽는 팔자라고?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좀 불안해서 라면이나 참치 같은 비상식량도 사다 놓았죠.(웃음) 디자인을 전공하고 진로에 대해 고민하다가 과감하게 휴학을 하고 영화 일을 해보자고 마음먹은 시기이기도 해요. 그렇게 2000년도부터 영화 일을 시작했고 새로운 삶으로의 진입이었죠. 그러니까 세기말은 단순한 과거 아니라 인물에게 동기를 줄 수 있는 시대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이든 간에 살면서 한번은 자기 인생에서 큰 용기를 낼 수 있고 비록 그게 실패하더라도 거기서 얻어지는 것이 분명히 있다고 믿습니다. 저는 그런 사람들의 스스로 온전한 ‘상태’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몽글몽글한 사랑 이야기 그 자체보다는요.
자전적 이야기라고 짐작한 것이, 가까운 사람 중에 장애인이 있지 않고는 알 수 없는 디테일이 담겨있더라고요. 유진을 바라보는 시선 역시 단순한 측은함이나 애틋함을 넘어서 부대끼며 같이 사는 사람이 느낄 법한 입체적인 감정의 총합으로 보였습니다.
저에게도 유진처럼 몸이 불편한 친척이 있어요. 한번은 유영 씨가 묻더라고요. “주변에 유진 같은 인물이 있었다면 유진을 주인공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갈 수도 있었을 텐데 왜 영미가 주인공이 된 거죠?”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지만 감히 당사자성을 갖는다고 말할 순 없는 것이죠. “영화를 만드는 감독일 수록 자기 작품 속 대상을 오히려 객관화해서 바라보는 시선이 필요한 것 같다. 그래서 때로는 그 대상의 곁에 있는 사람을 주인공으로 삼는 게 훨씬 편하고 이야기가 풍성해질 수 있다”고 대답했어요. 영미가 접니다. 영미가 유진의 삶에 끼어들면서 각성이 일어나요. 그 변화가 사람들에게 일종의 정념처럼 뿌려지죠.
영미가 일감을 떼오는 봉제공장 사장님이 휠체어를 타고 지나가는 장면이 이상하게 인상 깊었어요. 반짝반짝 빛나는 휠과 스스륵 굴러가는 바퀴의 움직임이 시쳇말로 폼이 난달까요? 지금까지 영화에서 휠체어를 그런 시선으로 보여준 적은 없던 것 같아요.
영미가 그 휠체어를 슬쩍 쳐다보잖아요. 휠체어가 이렇게 화려할 수 있고 아름다울 수 있구나, 무의식적으로 그런 생각을 했을 겁니다. 초반부 휠체어 장면은 의문을 가지는 분도 있겠지만 나중에 연결되는 이미지가 있어서 일부러 그렇게 배치했습니다. 영미를 바퀴가 갖고 있는 원형의 이미지 안에 넣고 싶었거든요. 영화 속에는 휠체어, 대관람차, 동그란 인주, 떡국 그릇, 카페의 원형 테이블 같은 동그라미들이 다수 등장합니다. 원형의 이미지는 영미와 유진의 관계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누워있는 사람이라고 아래에서 올려다보고 서있는 사람이라고 위에서 내려다보는 앵글은 피했어요. 오히려 영미를 찍을 때 하이 앵글로 가고 유진은 아이 레벨이나 로 앵글로 갔죠. 두 인물을 담는 데 있어서 이것을 기조로 삼았습니다. 평등할 것.
사랑 이야기이지만 <69세>가 그랬듯 <세기말의 사랑>도 존엄을 지키려는 여성의 이야기로도 해석할 수 있죠.
이야기는 확연히 다르지만 제가 천착하는 주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 사회에 소외되어 있는 인물들에게 관심이 많은 것 같고 결국은 누군가의 도움으로 그 사람이 바뀌는 것이 아니고 본인 스스로 목적 의식을 갖고 온전히 자신의 삶을 이끌어가기 위해 한 발 더 나아가는 이야기를 좋아하는 것 같아요. <69세> 때도 그렇고 이번 <세기말의 사랑>도 그늘에 있는 인물들을 자꾸 양지로 끌어내고 싶은 마음인것 같아요. 그리고 그들이 제대로 햇빛을 쬐면 좋겠어요. 공교롭게도 <69세>가 그랬듯 <세기말의 사랑>도 마지막 장면이 햇빛 아래에 있네요. 영화를 통해 햇빛 아래 그들과 우리의 삶이 별반 다르지 않다는 걸 계속 보여주고 싶습니다. 
 
<69세>가 그랬듯 <세기말의 사랑>도 마지막 장면이 햇빛 아래에 있네요. 영화를 통해 햇빛 아래 그들과 우리의 삶이 별반 다르지 않다는 걸 계속 보여주고 싶습니다. 
 

Credit

  • 에디터/ 손안나
  • 사진/ 이우정(인물),ⓒ 부산국제영화제(영화 스틸)
  • 디지털 디자인/ GRAFIKS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