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역사유적지구 내에 위치한 경주 핑크뮬리 군락지. 오렌지색 메리골드가 개화하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리라. 잔인한 6월의 중턱에서 나는 꽤 지쳐 있었다. 리베카 솔닛은 〈걷기의 인문학〉에서 이렇게 말했다. “생산지향적 문화에서는 대개 생각하는 일을 아무 일도 안 하는 것으로 간주하는데, 아무 일도 안 하기란 쉽지 않다. 아무 일도 안 하는 제일 좋은 방법은 무슨 일을 하는 척하는 것이고, 아무 일도 안 하는 것에 가장 가까운 일은 걷는 것이다.” 아무 일도 안 하는 것에 가장 가까운 일을 해보기로 했다. 말하자면 나는 걷기 위해 떠났다. 행선지를 경주로 정한 이유는 간단했다. 내가 알기로 대한민국에서 가장 안전하게 밤길을 걸을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경주의 밤은 낮보다 아름답다.
멀리 인왕동 고분군, 계림, 선도산이 차례로 포개진 풍경이 보인다.
황리단길 한옥 카페에서 커피를 한잔 마시고 선선한 바람을 맞으러 밖으로 나왔다. 저녁 7시쯤 뉘엿뉘엿 해가 지기 시작하더니 8시쯤 어둠이 내리고 일제히 조명이 켜졌다. 대릉원과 첨성대, 계림, 월정교, 동궁과 월지가 반경 2km에 모여 있는 경주역사유적지구의 풍경이다. 경박하거나 부산스러운 야경이 아니다. 초현실주의 한 스푼이 가미된 평행 세계의 경주는 여전히 고아하고 경건하다. 유적과 꽃과 나무를 감상하며 첨성대에서 월성 쪽으로 걷다가 비밀의 숲을 만났다. 경주 김씨의 시조인 김알지가 탄생했다고 알려진 계림이다. 물푸레나무, 홰나무, 휘추리나무, 느티나무, 단풍나무가 울창하게 서 있다. 천년의 고도 경주에서 아니 그보다 더 이전부터 존재해왔던 전설의 숲속 이름 모를 고목 앞에서 잠시 숨을 골랐다. 태초부터 거기에 있었을 것만 같은 존재가 가만히 나를 내려다봤다. 나는 오래된 나무를 마주하고 묘한 해방감을 느꼈다. 마치 누군가에게 내 이야기를 마구 쏟아낸 듯한 후련함. 그것은 한낮이었다면 결코 들키지 않았을 속마음이었다.
경주역사유적지구 경상북도 경주시 황남동 관람 시간 09:00~22:00 문의 054-779-60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