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style

만렙 직장인의 블라인드 활용법

우리가 블라인드를 끊을 수 없는 이유.

BYBAZAAR2021.07.27
 
 
“아니 근데 그거 봤어?” ‘아니 근데’라는 단어가 지구상에서 사라지면 할 말이 없을지도 모를 대한민국 직장인의 점심 시간은 세간의 화젯거리를 한번씩 훑어야만 마무리된다. 방금 전까지 모니터 앞에서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던 일개미들은 어디 가고 호사가들만이 남는다. 세상에서 가장 쓸데없다는 연예인 걱정부터 남의 회사 근황, 이상한 상사 이야기, 포털 메인을 장식한 뉴스까지. 그 이야기들의 출처는 대부분 보고 듣고 경험한 것이지만 그 ‘보고 들은’ 것에는 직장인들의 대나무숲, 블라인드도 포함된다. 회사 메일을 인증해야만 가입할 수 있고 재직하고 있는 회사의 업종 종사자만 볼 수 있는 별도의 라운지가 있어 묘한 소속감을 불러일으키는 마성의 참새 방앗간. 특히 회사 몰래 이직 면접이라도 보고 있는 시기에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이직/커리어 토픽에 올라온 글을 읽으며 불안한 마음을 다스린다.
 
다 지나고서야 하는 얘기지만 2년 전쯤, 무척이나 가고 싶던 회사에 별 기대 없이 낸 서류전형이 통과해버려 1차 면접을 본 적이 있다. ‘붙어야 한다’는 집착 때문인지 전형 결과가 나오기까지 매일매일이 그렇게 초조하고 긴장돼 견디기 힘들더라. 그나마 회사에서 멘탈 부여잡고 멀쩡히 일할 수 있게 다잡아준 건 점심 메이트도 친한 친구도 아닌 블라인드였다. ‘면접 합격 신호’라는 제목의 글을 보며 안도하다가도 ‘면접 불합격 시그널’ 같은 글을 보면 떨어질 것 같아 금세 우울해졌다. 합격하지도 않은 회사의 복지나 연봉, 재직자들의 회사평을 찾아보며 ‘아, 얼마를 불러야 하냐’며 김칫국을 마시기도 했다. 결과는 보기 좋게 최종 면접에서 탈락. 밤낮으로 의지하던 블라인드도 시들해져 그렇게 다른 앱으로 갈아타나 했으나… 그동안 미처 눈에 보이지 않던 다양한 관심사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최근 발견한 맛집 후기부터 문과생이 코딩 배워 이직한 얘기, 직장생활 N년 차에 1억 모은 노하우까지. 블라인드에는 불평불만 하며 이직할 날만 고대하고 있는 투덜이 스머프만 있는 게 아니라 퇴근 후 일상을 즐기고 자기계발을 하는 건실한 직장인들이 더 많았다. 물론 돈 얘기도 많이 오갔다. “우리 업종에선 핫이슈인데 이거 미리 사놓으면 떡상할 것 같다”는 글을 보고 새로운 종목에 관심이 생겨 서치해보기도 하고 암호화폐에 뛰어든 동지들이 실시간으로 중계하는 글을 보며 밤을 지새우기도 했다. 광고 없는 찐후기를 찾고 싶을 때, 메일에 모르는 용어가 써 있는데 상대방에게 물어보기 쪽팔릴 때, 전화 당겨 받기 같은 게 갑자기 헷갈릴 때, 구하고 싶은 중고가 있을 때도 일단 블라인드에 검색해본다.(그러면 80%는 해결된다.)
 
어느 날부턴가는 블라인드가 이직 플랫폼 ‘블라인드 하이어(Blind Hire)’를 론칭한다고 했다. 명함 앱으로 출발한 ‘리멤버(Remember)’는 경력직 이직을 위한 ‘리멤버 커리어’와 ‘리멤버 커뮤니티’를 선보였다. 리멤버 커리어는 한국인의 성향에 맞게 링크드인보다 폐쇄적으로 만들어 마음이 편안하다. 리멤버 커리어에 이력서를 등록해두니 헤드헌터에게 면접 제안이 간간이 왔다. 리멤버 커뮤니티는 블라인드보다 정제된 분위기다. ‘모두의 재테크’ ‘은퇴 라이프’ ‘사원 라이프’ ‘팀장 라이프’ 등으로 분류된 카테고리는 직장인 누구나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주제라 보다 보면 한 시간 넘는 출근길도 금방이다. 가끔 신입들의 속마음을 알고 싶을 때 사원 라이프 게시판에 일부러 들어가본다. 어느덧 중간 관리자가 된 연차라 사원 라이프보다 팀장 라이프가 더 공감된다는 게 조금 슬프긴 하지만 말이다. 유망한 스타트업 이직 정보를 보려고 다운받은 ‘원티드(Wanted)’는 커리어 성장을 위한 온라인 교육 콘텐츠 맛집으로도 유명하다. 온라인 클래스가 넘쳐나는 시대이지만 당장 실무에 써먹을 수 있는 강의를 고르기는 어렵다. 그럴 땐 원티드에 접속하면 된다. 특히 업계에서 회자되는 ‘일잘러’들이 진행하는 커리어 토크를 보다 보면 그날 강연 주제를 통해 얻는 인사이트뿐 아니라 내가 진정 일을 잘하고 있는지 스스로의 존재감을 체크하는 좋은 자극마저 된다. 아직 원티드에서 연락이 오지 않은 걸 보니 멀었다고 생각하면서 일을 열심히 하게 되는 의외의 효과(?)도 있다.
 
스크린타임을 분석해보면 유튜브, 인스타그램에 이어 최소 3, 4, 5위에는 랭크될 것이 분명한 직장인들의 ‘에타’가 없었더라면 나의 직장생활은 더 어렵고 지난했을지도 모른다. 살다 살다 팬데믹을 만나 난생 처음 화상 면접을 봐야 했을 때, 익명의 누군가가 “반드시 조명을 사라”고 알려주지 않았다면 얼마나 오랜 시간을 노트북 화질과 씨름했을까. 일을 하며 한번쯤 궁금했지만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아 물어보지 못한 것들은 지금까지도 대충 아는 척하며 지내지 않았을까. 기획안을 쓰기 위해 아이디어가 필요할 때도, 남들에겐 털어놓기 어려운 고민이 있을 때도 수많은 직장인의 기쁨과 슬픔이 만든 대나무숲은 든든한 조력자가 되어주었다. 무엇보다 힘이 됐던 건 세상에 이렇게나 다양한 회사가 있고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을 때다. 하는 일은 달라도 사는 건 똑같다는 인생의 진리를 실감하게 해준 곳도 바로 이 앱들이다.
 
사실 최종 면접에 떨어졌던 그날 나는 블라인드에 영원히 들어가지 않겠다 마음먹으며 앱을 지워버렸다. 퇴근 후 홀로 어두운 방구석에 누워 있으니 갑자기 슬픔이 밀려와 지구에 남은 최후의 인류가 된 것 같았고 그 기분을 도저히 참을 수 없어 반나절 만에 다시 깔았다. 검색창에 ‘면접 탈락’을 입력했다. 그곳에는 면접에서 광탈한 사람들을 위한 수많은 위로가 있었다. 누군가는 인생이 휘어진 터널 같아 지금은 끝이 안 보이지만 조금씩 가다보면 빛이 보일 거라고 했다. 또 다른 사람은 수차례 면접 탈락 끝에 가고 싶었던 회사에 입사한 경험담을 전하며 광탈은 결국 더 좋은 곳에 가기 위한 한 과정이라고 다독여줬다. 또 누군가는 살짝 매콤한 로제떡볶이를 시켜 〈내 이름은 김삼순〉 같은 옛날 드라마를 보면 기분이 좋아질 거라고 했다. 인스타그램이나 유튜브에서는 볼 수 없는, 직장인의 짬바가 있어야만 나올 수 있는 진짜 위로였다.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 로제떡볶이에 와인을 마시며 삼순이 대신 〈터미네이터〉를 봤다. 꽤 효험이 있었다. 다시 세상과 연결된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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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 에디터/ 손안나
  • 글/ 김희성(<질풍노도의 30대입니다만>의 저자>
  • 사진/ 이현석
  • 어시스턴트/ 백세리
  • 제품 협찬/ 갤럭시 Z 플립
  • 웹디자이너/ 한다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