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승혜(b. 1959) 〈공중 무도회(Aerial Gala)〉, 2020, 합판에 폴리우레탄, 144x117.8x120cm. ⓒ 홍승혜, 화성시문화재단 제공
초등학교에 입학한 둘째가 한다는 말이, 학교의 모든 것이 사각형이라는 것이다. 교실도, 책상도, 칠판도, 교재용 TV 모니터도, 사물함도, 창문도, 운동장도, 심지어 코로나 시대가 도입한 투명 칸막이까지 죄다 사각형이더라는 얘기인데, 듣고 보니 그렇다. 이제는 유치원에서처럼 원형 테이블에 둘러앉을 일도 없고, 꽃, 나무, 항아리 모양 스티커가 붙어 있을 리도 만무하니, ‘비사각형’의 형태가 거의 사라지다시피 한 셈이다. 물론 네모진 낯선 환경에 다소 경직된 아이는 곧 사각형의 내각의 합이 360도임을 배우게 될 것이다. 사각형을 회전하면 원이 되는 식의 움직임과 변화의 상관관계를 터득할 무렵이면 사각형이 모든 것의 기본이라는 사실도 깨달을 것이다. 이런 생각이 든다. 그 기본에서 살면서, 기본을 다하며 산다는 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를 인지하는 과정이 곧 이 아이가 성장한다는 증거일 거라고. 마치 캔버스를 다루던 화가들이, 절대적인 진리인 사각형 자체를 인식한 지점에서 현대미술의 혁명적 순간이 발화했듯 말이다.
«사각형에 대한 경의»전은, 말하자면 사각형의 존재를 새삼 몸으로 발견하면서 삶의 다음 장을 시작한 여덟 살 아이 같은 마음으로 돌아가게끔 이끈다. 한국 미술계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해온 홍승혜와 문화계에서 주목받는 디자이너 문승지의 2인전 형식인 이번 전시는 각자의 언어로 재해석한 사각형의 존재를 제시한다. 특히 홍승혜는 자신의 예술 문법이자 도구인 픽셀을 활용한 작품들을 선보인다. 높이 9미터의 빈 공간에는 남녀 형상의 조각 〈공중 무도회〉가 춤추며 환대하고, 빈 벽에는 댄서들의 움직임을 포착한 평면작업 〈브레이크 댄스〉가 자리하는데, 회화와 조각을 초월하는 두 작품의 리듬과 비트가 고유의 질감과 양감을 발산하며 교류한다. 전시 제목은 요제프 알베르스(Josef Albers)의 유명한 동명의 연작 〈사각형에 대한 경의〉에서 비롯되었을 공산이 크다. 전위적인 바우하우스의 전설, 알베르스는 1950년부터 25년 동안 이 연작을 통해 색채의 상호작용을 연구했다. 하지만 2021년판 ‘사각형에 대한 경의’는 색이나 형태의 실험에서 더 나아가 ‘기본’으로 구성된 세상의 풍경과 예술가들의 바람까지 담는다.
홍승혜 작가는 지난 1997년 즈음부터 디지털 이미지를 구성하는 최소이자 기본 단위인 픽셀로 작업 해오고 있다. 프로들의 툴이 아니라 가장 대중적으로 쓰이는 그림판을 접하면서 작업을 고안한 것이다. 픽셀이 흥미로운 건 해상도에 문제없을 때는 통상 본색을 숨긴 채 매끄럽게 보이지만 해상도가 낮은 썩 좋지 않은 상황이 되면 삐죽삐죽한 네모 형태를 드러낸다는 사실이다. 두통이 엄습해야만 내 몸뚱이에 머리란 게 얹혀 있다는 걸 인지하게 되는 것처럼, 픽셀 자체는 디지털 세계의 기본값이며, 그러므로 이를 인식한다는 자체가 일종의 발견이었다. 홍승혜는 그렇게 제 존재를 드러낸 픽셀, 특히 톱니의 형태를 연속배열하고 자유자재로 구축하는 등 작업의 주효한 요소로 백분 활용한다. 디지털의 모든 것이 픽셀로 구성되듯, 그녀의 픽셀은 무엇이든 될 수 있다. 어디에도 머물지 않고, 어떤 장르에도 고착되지 않는다는 건 그 반대도 성립한다는 뜻이다. 추상과 구상, 회화와 조각, 미디어 아트와 판화, 예술과 디자인 중 양자택일해 확고부동한 배타적 영토를 구축하는 대신, 홍승혜의 작업은 자유롭게 부유함으로써 모든 것이기를 자처한다.
사각의 모니터에서 탄생한 홍승혜의 픽셀 작업이 다른 디지털 기반의 아트와 차별화되는 점은 모니터 안에만 갇혀 있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모든 작업은 실제 공간, 우리가 사는 현실에서 다채롭게 구현된다. 예컨대 국제갤러리 카페에서 판매하는 수제 초콜릿에도 새겨져 있고, 유명 버거 매장의 공간 디자인으로도 펼쳐지며, 서랍이나 조명 같은 오브제로 태어나고, 예술전문출판사 샤이데거 & 스피스(Scheidegger & Spiess)의 책 속에 자리하거나, 여느 회화나 조각처럼 전시장에 위치하기도 한다. 이들은 사각형의 형태가 비틀어지고 어긋나 전혀 다른 형태로 거듭나거나, 벽화의 한 부분이 입체로 자라나거나, 액자 속의 그래픽 요소가 설치작품으로 변신하면서 생긴 결과물이다. 본래 홍승혜는 전통 회화를 전공한 화가다. 캔버스의 정해진 규격, 구현 가능한 작업의 한정성에 대한 깊은 갈증이 먼저였는지, 실제 공간에 대한 지대한 관심이 앞섰는지를 따져 묻는 게 과연 의미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어쨌든 그녀에게는 어떠한 위계도 없었다. 픽셀은 가장 효율적인 붓이자 물감 혹은 벽돌이었고, 디지털 공간은 어떤 캔버스보다 드넓었다.
초창기 창문, 계단, 건물 같은 추상적 도형으로 발현되던 작업은 나날이 진화했다. 픽셀을 움직이고 쌓아 올리며 취한 홍승혜식 진화의 핵심은, “그리드를 생명체로 간주하고 이를 배양시키는”(황인, 신라갤러리 개인전 도록 서문, ‘홍승혜의 공간 배양법’ 中) 것이고, 변화 자체에 머무는 게 아니라 이를 통해 확보하는 생명력이다. 스스로 자신의 작업을 ‘유기적 기하학(organic Geometry)’라 명명함으로써, 추상주의 미니멀리스트들과 차별화한 근거도 여기에 있다. 전통적 기하학이 견고하고 엄격한 부동의 질서라면, ‘유기적 기하학’은 유연하고 생동감 넘치는 움직임의 논리다. ‘유기적’이라는 건 곧 ‘생물적’이라는 의미인데, 생명체처럼 모든 부분이 밀접하고 조화롭게 관계 맺고 있을 뿐 아니라 서로 떼어낼 수 없다는 점이 더 중요하다. 부분을 전체에서 분리하는 순간 생명을 다하지 못하듯, 홍승혜의 ‘유기적 기하학’은 일종의 개념을 넘어, 수십 년 세월을 관통하는 모든 작업들을 살아 있게끔 하는 거대한 뿌리, 엄연한 하나의 작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게다가 애초에 기하학이 토지를 측량하기 위해 고안된 학문이라는 점을 기억한다면, ‘유기적 기하학’에 근간한 홍승혜의 작업이 공간과 건축, 땅과 세상을 향하고 있다는 건 매우 일리 있다.
전시장에서 천천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던 건 작품보다 여백이 더 풍성했기 때문이다. 특히 픽토그램 작업인 〈공중 무도회〉와 〈브레이크 댄스〉는 미술계의 공고하고도 가끔 편협한 경계를 넘나들며, 이 공간을 환상적으로 만든다. 이때의 ‘환상’이란 기상천외한 상상력의 시선이라기보다는 실재하는 현실에 숨겨져 있던 부분을 들여다보도록 하는 동력에 가깝다. 이를테면 천장에 매달린 〈공중 무도회〉는 선으로만 구성되어 있는데, 일반 조각과는 달리 반쯤 묻힌 부조를 평면성을 유지한 채 쏙 뽑아 올린 듯한 입체감이라, 시선의 위치나 높이에 따라 다른 작품처럼 보인다. 흰 벽이 배경일 땐 회화이고, 작품의 비어 있는 면 사이로 겹쳐 보이는 건물의 철제 골조와 착시를 일으키며, 아래에서 올려다볼 땐 진공인 동시에 열린 입방체의 형태가 되는 식이다. 절대적 형태의 상대성과 상대적 형태의 절대성이 갈등, 충돌하며 공간 전반에 조화로운 기운을 만들어내는 건 미술작품에 공히 부여된 임무겠지만, 홍승혜의 작업은 이에 특화되어 있다.
만국공통 이미지나 다름없는 픽토그램 작업의 진가는 화장실 옆 벽에 달린 입체 표지판에서 더욱 드러났다. 작품인지조차 헷갈리는 표지판은 눈높이가 아니라 매우 높게 걸려 있기 때문에 유심히 보기 위해서는 목을 한껏 젖혀야 한다. 올려다보고 있자니 내부에 위치한 다양한 광원에 힘입어 여러 겹의 그림자가 벽을 장식한다는 사실도 알게 되고, 그림자가 일종의 무아레를 형성해 표지판이 어른어른 움직이는 착각마저 든다. 여성 아니면 남성의 이분법적 정보를 전달하고 행동을 통제하는 표지판은, 그러나 이 공간에서만큼은 마치 그녀/그의 다양한 배경과 내밀한 후일담을 품고 그 이상의 이야기를 전하는 것 같다. “그림을 옆에서 보게 하는 그것은 모더니즘 회화의 정면적 시선을 비틀고 따라서 조각의 경계를 흐린다”(윤난지, ‘홍승혜의 움직이는 그리드’ 中)는 의도 외에도, 다른 방식으로 보지 않았더라면 포착할 수 없었을 살가운 정보들이 ‘유기적 기하학’에 감성을 싣는 것이다. 현대미술이 도외시해온 시적 감수성을 다름 아닌 픽토그램과 표지판을 통해서도 펼쳐 보이는 ‘센티멘탈 모더니스트’의 솜씨다.
자신의 예술이 공간 혹은 세계의 일부로 녹아들었으면 하는 바람은 〈써치라이트〉에서 고요히 드러난다. 동그란 빛이, 개러지밴드라는 앱으로 작곡한 음악 혹은 소리에 맞춰 움직이는 공감각적 작품이다. 다른 작업들이 동작을 내재하는 반면 움직이고, 공간적일 뿐 아니라 시간적이며, 조형적 질서를 음악적 질서로 환원했다는 점에서 〈써치라이트〉는 ‘유기적 기하학’의 진화 버전이다. 유영하는 불빛은 점이 선, 면 혹은 이상으로 확장 가능한 기하학의 시작인 동시에 우주의 에너지가 응축된 결정체임을 상징하는데, 그 움직임이 실로 겸허해서 보는 이의 시선과 마음을 부드럽게 이끈다. 가만한 불빛은 벽과 바닥을 비추다가, 다른 주인공인 문승지의 작품을 살포시 다독이다가, 내게도 스포트라이트를 준다. ‘써치라이트’가 말 그대로 무언가를 탐색하는 조명이라면, 홍승혜는 무엇을 찾고 싶었을까. 그간 ‘작가들의 작가’로 후배 작가들을 물심양면 지지해온 그녀는 상대 작가와의 공존의 방식 그리고 여기 관객과의 교류의 순간을 찾아 제시함으로써 모든 존재와 관계, 즉 예술과 삶 사이의 이상향에 경의를 표하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문득 홍승혜라는 작가가 자신의 예술뿐 아니라 내 삶의 어느 순간을 살피고 있다는 생각에 미치자, 그녀가 오래 차용해온 프랑스 작가 로베르 필리우의 역설이 또렷이 떠올랐다. 움직여야 ‘함께’ 존재할 수 있고, 존재하기 위해서는 ‘함께’ 움직여야 한다는 작가의 격려, ‘유기적 기하학’에 담긴 진심이 전시장을 떠나는 나를 배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