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 홍승혜의 태도는 작품이 된다 || 하퍼스 바자 코리아 (Harper's BAZAAR Korea)
Art&Culture

예술가 홍승혜의 태도는 작품이 된다

과거를 돌아보고, 과정을 중시하며, 모순을 인정하고, 연료가 되어 살고 싶다는 미술가

BAZAAR BY BAZAAR 2023.03.09
홍승혜는 우리가 종종 잊곤 하는 당연한 사실, 미술을 둘러싼 모든 현상이 작가로부터 발현한다는 걸 일깨우는 예술가다. 지난 2월 초에 열린 작가의 개인전은 그야말로 미술축제 분위기였다. 기자간담회는 인산인해였고, 오프닝은 그가 관계 맺어온 국내외 미술계 인사들로 북적이며 밤늦도록 계속되었다. 한 해에 많게는 열 개 이상의 크고 작은 전시에 참여해온 작가는 각각의 시공간에 현재적 상태를 증언하는 단서들을 각인해두었다. 9년 만에 국제갤러리에서 열린 이번 전시는 그렇게 파편처럼 흩어져 있던 작업세계를 총체적으로 보여준다. 더구나 1980년대부터 줄곧 한국 미술사를 써온 홍승혜가 미술시장의 상황이나 흐름과는 독립적으로 미술가로서 어떤 태도로, 어떤 마음으로 이 길을 걸어왔는지를 서술하는 대신 함축하는 전시, 무언가를 증명하는 게 아니라 공유하는 전시다. 인파 사이에서 나는 작가를 향한 숱한 축하의 말들이 종종 감사의 말로 번안되어 들리는 희한한 경험을 했다. ‘우리에게는 홍승혜라는 미술가가 있다’는 사실에 안도한 건 비단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몇 날 며칠 홍승혜가 작품 설치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작가의 임무란 컴퓨터 안에서, 다른 협업자들과 함께 탄생시킨 작업들에 제자리를 찾아주는 일이 아닐까 했다. 평면으로, 입체로, 영상으로 구현된 알록달록한 도형들이 어깨를 나란히 하는데, 본래 그 공간에서 키워내고 자라난 양 자연스럽다. “‘퍼포먼스처럼 전시한다’고 표현한 적 있어요. 완성된 작업을 늘어놓는 게 아니라 공간과 대화하고 관객과의 관계를 설정하기 위해 긴밀하게 커뮤니케이션 해요. 현장에서 공간을 배양한다는 말이 맞는 거죠.” 홍승혜는 작품을 디스플레이할 때 가장 행복하다고 했다. “작업이 공간을 만나 어떤 화학작용이 일어나는지 바라보는 게 작업하는 재미거든요.” 이런 과정에 즐거움을 부여하는 건 바로 예측불가능성이다. 작가만의 특권이기도 한 일종의 기대감은 작업에 생동감을 부여하고, 서로에게 묻어나는 풍경을 그려낸다. 
 
3관 전시장에 선 홍승혜 작가.

3관 전시장에 선 홍승혜 작가.

“그간 많은 평론가 분들이 제 작품에 대해 좋은 의견을 주셨지만, 특히 베리 슈왑스키의 통찰력 있는 표현, ‘유기적 예측불허함(Organic Unpredictability)’이 정말 인상적이었어요. 제 작업이 공간을 지배하지도, 공간에 지배받지도 않는다는 그분의 문장도 멋있고요. 그게 제 인생관이기도 하거든요. 음악에도 주종이 없는 악곡의 형식인 푸가(fugue)가 있잖아요. 멜로디와 반주로 분리되는 게 아니라 독립된 여러 성부가 팽팽히 대결하며 대화를 나누는 푸가와 비슷한 거죠. 독자적이면서도 균형 있게, 그게 세상에서 더불어 사는 방법 아니겠어요?(웃음)”
홍승혜는 1997년부터 컴퓨터의 그림판, 포토샵 등의 프로그램을 운용하며 세상을 관통하는 시각적 원리를 구축해왔다. 그에 의해 ‘발견’된 모니터 속 기본 단위인 픽셀은 가장 효율적인 붓이자 재료였다. 픽셀을 조합하고, 분해하고, 쌓아 올린 이미지들은, 어느새 실재 공간으로 나와 평면, 입체, 가구, 영상, 건축 등 조형적 변화를 거듭했다. “전통 회화를 전공했지만 네모 안만 들여다보는 삶이 힘들었어요. 그래서 캔버스를 버리는 대신 오브제로 삼았어요. 그것이 놓이는 장소와 맺는 관계들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거죠.” 도형을 통해 공간의 수리적 성질을 연구하는 견고한 ‘기하학’ 앞에 자리한 ‘유기적’이라는 이율배반적인 단어는 픽셀의 향연에 서사를 제공한다. 결코 작품 안에만 머물 수 없었던 작가의 성정과 방법론, 그리고 삶의 태도까지 함께 녹아있는 유기적 기하학은 홍승혜를 뜻하는 고유명사가 되었다.
«복선伏線을 넘어서 II(Over the Layers II)»는 홍승혜 작업의 모체 격인 유기적 기하학이 진화해 이룬 장이다. 이례적인 사실은 전시 제목이 과거에서 왔다는 점이다. 홍승혜는 2004년 국제갤러리에서 «복선伏線을 넘어서»라는 개인전을 열었는데, 전시에 연속성을 부여하는 건 한 갤러리와 오랜 우정을 유지한 작가만이 가능한 시도다. 어쨌든 그 흔한(판매 가능한) 오브제도 몇 개 없이 도형을 엄청나게 키운 벽화로 공간을 변주한 한편 회화를 건축에 접목해 당시 회자되었던 이전 전시에서 ‘복선’이란, 평면을 벗어나 시공간의 레이어를 담고자 한 열망 혹은 자유로울 수 없는 상업미술의 영역을 뜻했을 거라 짐작한다. 그리고 홍승혜는 수많은 복선 혹은 레이어를 켜켜이 쌓으며 지금에 이르렀다. 시간의 레이어, 형태의 레이어, 색의 레이어…. 19년 사이 작가가 달라진 만큼, 그 이상으로 복선의 의미가 변한 건 당연지사다. 우선 작가는 줄곧 규칙처럼 상정해 쌓아온 레이어, 그 켜가 만들어낸 세상 너머인 ‘오버 더 레이어즈’를 꿈꾸게 된다.
어떤 선택을 하느냐가 곧 그 사람의 본질을 드러낸다. 작가의 선택으로 직조된 이번 전시는 홍승혜의 오늘에 대한 보고서인 동시에 본질의 반영이다. 나는 홍승혜가 인간으로서도, 미술가로서도 독자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새삼 알게 됐다. 그의 작업과 행보에는 우리가 은연 중에 예술가라는 이들에게 기대하는 바, 혹은 일상을 지배하는 고정관념을 번번이 비껴가는 비전형성이 굳건한 심지처럼 자리한다. 예컨대 홍승혜는 스스로 과거지향주의적인 사람이라 고백하는데, 그것이 전혀 퇴행적이지 않다. “시간은 중요한 레퍼런스지만, 놀랍게도 미래에 대해 별로 생각하지 않아요. 그래서 딱히 계획적이지도 않죠. 중학교 때 일기장에 미래 50년보다 과거 5년을 택하겠다고 써둘 정도였어요. 회상이 제 평생의 버릇인 거죠.” 2014년 개인전의 제목이기도 한 ‘회상’은 홍승혜의 주된 방법론 중 하나다. 과거 자신의 작업을 끊임없이 복기하고, 참조하고, 다음 작업의 재료로 삼아 새로운 레이어를 쌓아가는 방식을 통해 그는 작가로서 지속적으로 살아있다.
“2009년부터인가, 사각형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있었어요. 물론 제가 만든 그리드 안에서 행복한 감옥살이를 했지만요.(웃음) 누구나 같은 환경에 10여 년 이상 있다 보면 ‘너머’를 꿈꾸게 되죠. 그래서 사각형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꾸준히 연구해온 한편 그 안에서 할 수 있는 시도들도 부지런히 했어요. 눈에 보이는 픽셀 형태의 그것뿐 아니라 물체와 물체와의 거리, 관계, 위치도 ‘보이지 않는 기하학’이라 해석한 것도 그런 의도고요. 그러다 보니 세상의 모든 사물을 다 활용할 수 있겠다 싶어 레디메이드(readymade)의 배치 자체를 기하학으로 상정하기도 했죠. 하지만 이번만큼은 새로운 게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최근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열린 «백남준 효과»전에 홍승혜의 작업이 자리했다. 백남준 작품과 1990년대에 활동한 미술가들의 작품을 병치한 전시에서 그는 기하학 이미지를 사용한 콜라주 부조 〈종이 풍경〉(1994)과 이를 현재의 시공간으로 확장한 신작 〈2D to 3D〉(2022)를 선보였다. 이 작업은 과거로 통하는 문이자 이번 전시작의 단초가 된다. 기계의 힘을 몰랐던 90년대 당시 손수 카드보드를 꽃무늬, 창문, 부채꼴, 구름 등의 형상으로 자르고 쌓아 콜라주 했던 기억을 상기한 것이다. “그래, 이런 작품도 있었지 했어요. 그간 익힌 컴퓨터 프로세스와 아날로그한 과거 이미지에 대한 로망이 이번에 만난 셈이죠. 다양한 형상을 구현할 수 있는 현재적인 방법이 바로 일러스트레이터였어요. 이젠 픽셀이 깨질 염려 없이 오각형부터 팔각형까지, 별도 그릴 수 있게 됐어요.(웃음)” 요즘 시대에 왜 새롭지도 않은 프로그램이냐 하겠지만, 작가에게는 원하는 걸 구현하는 유용한 ‘마술봉’이다.
“1관의 평면 작업 제목들은 새로 배운 일러스트레이터가 제공하는 툴 이름을 딴 거예요. 폴리곤, 웨이브, 라인 세그먼트, 아크 로우어, 매직 원드 등등. 그간 자제해온 표현과 재료, 단어들도 쏟아냈어요. 유리에 인쇄한 방식도, 별자리를 조명 작업에 대입한 것도, 말하는 미키마우스가 등장하는 것도, 영화 〈오즈의 마법사〉의 주제가 ‘Over the Rainbow’에서 영감받아 무지개색을 개념적으로 도입한 것도, 모두 달라진 점이에요. 더 자유로워지고, 솔직해진 거죠. 그 와중에도 위치, 크기, 비율 등에 관한 조형적 문법과 관심, 미술가로서 나만 할 수 있는 시도들은 변함없이 지속되고 있어요.”
기자간담회장에서 어느 기자가 질문을 던졌다. 작가의 연습 과정을 우리가 왜 전시장에서 봐야 하냐는 투였다. 당황하는 기색도 없이 홍승혜는 명료하게 답했다. “완성의 강박 없이, 사심 없이, 가장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라고. 홍승혜는 미술의 오리지널리티에 대한 남다른 철학을 가졌다. 탁월한 창조의 주체와 완결된 창조물인 작업으로만 규정되던 예술의 개념에 균열을 낸다. 기계의 효율성과 활약을 찬양하며, 미술이 스스로를 차별화하기 위해 만들어낸 덕목이나 가치를 뛰어넘는다. 퍼포먼스 제목을 ‘연습(exercise)’이라 짓고, 방법론을 개인전 제목으로 삼아 과정을 가감없이 드러내고, 개러지밴드(GarageBand)라는 간편한 소프트웨어로 손수 음악을 만드는 것도 비슷한 이유다. 그에게는 과정이 곧 결과다.
“세드릭 프라이스라는 건축가가 있어요. 퐁피두센터를 지은 렌초 피아노와 리처드 로저스에게 큰 영감을 주었지만, 실제 본인은 건축을 많이 하지 않았어요. 잡지를 운영하며 결정화되지 않은 생각을 한 사람이라 오히려 도면이 더 많죠. 건축을 한다 해도, 확정된 결과물이 아니라 사용자가 창의적으로 변형하면서 완성하는 ‘펀 팰리스’ 같은 걸 만들었어요. 제 작품도 관객이 완성했으면 하고, 그래서 지난 해에는 제 픽토그램 조각을 관객이 인형을 갖고 놀듯 마음대로 조합할 수 있도록 전시한 적도 있어요. 어쨌든 프라이스는 ‘나는 재료가 아니라 연료로서 남고 싶다’고 했는데, 저도 마찬가지예요. 작품 자체의 오리지널리티보다는 태도의 오리지널리티를 추구하죠. 그게 방식으로 남고, 그 방식이 전파되고, 사람들이 그 방식을 활용했으면 해요.”
생각해보면, ‘유기적 기하학’이라는 개념의 태생적인 모순은 그 모순을 인정하는 작가의 태도를 통해 거듭났다. 더 나아가 기꺼이 또 다른 모순을 만들어냈고, 정반합의 진화에 도전하는 용기를 발휘했다. 작가는 “내가 완벽하지 않다는 걸 인정하면 두려울 게 없다, 나는 자기성찰과 자기만족에 모두 능하다”며 웃지만, 이는 예술에 매진하면서도 스스로를 익숙하지 않은 상태로 두려는 노력, ‘아마추어 정신’에서 기인한다. ‘아마추어’의 어원은 ‘아모르(amor)’, 사랑이다. 아마추어이기를 자처함으로써 홍승혜는 자신의 작업을 진정 즐기고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복선伏線을 넘어서 II(Over the Layers II)» 설치 전경. (위부터) 1관 안쪽 공간에는 평면 작업을 가구 혹은 조각으로 입체화한 작품이, 1관 바깥쪽 공간에는 일러스트레이터로 구현한 평면 작업 및 마티스를 향한 오마주 작업이 자리한다.

«복선伏線을 넘어서 II(Over the Layers II)» 설치 전경. (위부터) 1관 안쪽 공간에는 평면 작업을 가구 혹은 조각으로 입체화한 작품이, 1관 바깥쪽 공간에는 일러스트레이터로 구현한 평면 작업 및 마티스를 향한 오마주 작업이 자리한다.

홍승혜는 세 개의 전시 공간을 유기적으로 연결함으로써 과정의 즐거움을 현실화한다. 1관의 작은 방에서는 일러스트레이터를 ‘연습’하며 얻은 평면 작업이 주를 이룬다. 그 뒤쪽 공간에서는 그 평면 작업들이 조각 혹은 가구의 형태로 입체화되었는데, 디자인과 예술의 중간쯤에 위치한 이들은 좌대를 마다하고 바닥에 놓였다. 한편 독립된 3관에는 평면과 입체를 넘나드는 조형요소들이 환경 혹은 무대 자체로 변모한 작업이 펼쳐진다. 낮에는 성별을 뛰어넘는 다섯 쌍의 무용수들이 흐드러지는 무지개색 꽃잎을 배경으로 춤추고, 밤에는 서치라이트가 존재감을 드러내며 주연의 바통을 이어받는다. 그동안 자신의 서치라이트 작업으로 줄곧 다른 작가들의 작업을 비추던 그가 비로소 자신의 작업을 조명한다. 인공(작품)과 자연(관객)이 자연스레 합치하는 이 회색 박스는 환희와 즐거움, 존중 등을 끌어안는 프레임이 된다.
“초기 작업 노트에 제가 ‘이야기의 서식처’라고 썼더군요. 내러티브가 발생할 수 있는 프레임에 관심이 많았어요. ‘모더니즘은 프레임이다’라는 글을 기고한 적도 있죠. 프레임이라는 건 뭔가를 담거나 받쳐주잖아요. 제 취미가 어디를 가든 테이블 다리를 들여다보는 거예요. 프레임이 어떻게 생겼나, 어떻게 받치고 있나 늘 관찰하죠. 상자, 서랍 등을 만드는 걸 봐도 뭔가를 담는 걸 좋아하는 거 같아요. 고등학교 때 행복론을 주제로 한 글에서, 나로 인해 누군가가 행복해지는 게 나의 행복이라 썼던 기억이 나네요.(웃음)”
나는 지난 2007년 이중섭 미술상을 수상한 홍승혜의 개인전 «온 앤 오프(On & Off)»를 특히 좋아한다. 수상자가 이듬해 다음 시상식에 맞춰 개인전을 여는 시스템인데, 홍승혜는 두 개의 조각만 둔 채 시상식장 자체를 작품화하는 데 주력했다. 바닥에 격자를 그렸고, 의자를 가지런히 배치했고, 벽화를 그렸고, 빨간색 휴지통을 만들었다. 홍승혜는 수상자에게만 주어진 이 귀한 기회를 다른 수상자를 ‘받쳐주는’ 데 썼고, 구태의연한 시상식장의 풍경을 바꾸어놓았다. 당시 작가는 기획서에 “구속이 있어야 해방이 있다”는 문장을 썼다. 작품의 중심을 작품 밖에 둠으로써 역설적으로 작업의 가치를 더욱 활성화시킨 셈이다. 미술과 일상 안팎을 넘나드는 이 작업은 그렇게도 믿고 싶은 진실, 어쩌면 예술이 우리의 일상을 바꿀 수 있을 거라는 바람을 가장 시각적으로 구현한 작품으로 여전히 내게 남아있다.
이번 전시를 통해 홍승혜는 처음으로 마티스라는 존재를 소환한다. 몇몇 평면 작업은 물론 전시장 벽면 자체를 그를 향한 오마주로 바친다. 대학 시절 홍승혜는 ‘색채의 자율성’을 강조한 마티스의 천진한 작품들을 만나며 새로운 세계를 꿈꾸게 되었다. 그리고 말년의 마티스가 휠체어에 탄 채 몰두한 ‘컷아웃’ 기법을, 이번 전시장 벽을 파랗게, 노랗게 칠하고 벽면 모서리를 자르는 작업으로 되살렸다. 〈하늘 자르기(Le Ciel Découpé/Hommage à Matisse)〉라는 제목은 비평가 루이 아라공이 쓴 마티스 평전의 챕터 제목 ‘잘라낸 하늘’에서 착안한 것. 작가는 하늘을 잘라 물질화했다는 이 기막힌 표현을, 개념을, 감동을 수십 년 내내 간직하고 있었다. “사각형 작업만 하다가 모서리를 탁 잘라내니 어찌나 쾌감이 들던지…. 해방감이 느껴졌어요.(웃음) 내게 마티스는 영적 고통을 기쁨과 환희의 색채로 치환한 예술가이자 영원한 마스터예요.”
다음 날, 홍승혜는 수년 전 마티스의 생애 최고의 작업에 대해 쓴 글을 보내주었다. “로자리오 성당은 내게 온전하고 위대한 하나의 예술작품인 동시에 ‘편안한 의자’처럼 몸과 마음을 쉴 수 있는 ‘단 하나의 미술관’이다. 존재하지 않는 곳. 유토피아는 그곳에 존재하고 있었다.” 인터뷰 말미, 우리는 예술과 종교, 삶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공간, 누구든 기댈 수 있는 예술로서의 예배당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도, 작가도 함께 꿈꾼 이런 공간이 정말 생긴다면, 이곳을 채울 홍승혜의 기하학은 장식미술 이상일 것이다. 어떤 미술가로 기억되기보다 그저 태도로서 남고 싶다고 하는 작가가 믿은 궁극의 예술이 담겨있을 테니까. “미술은 시름을 잊게 만들어요. 내가 받은 이 혜택을 오롯이 돌려주고 싶어요. 미술이 어떤 힘이 되어 나머지 삶을 살아가게 하길 바라요. 잠시마나 고단함을 잊도록 하는, 그 너머의 ‘오버 더 레인보’죠.” 홍승혜와의 인터뷰로 나는 무지개 너머 파랑새를 목격했다. 두려움 없이 자신을 인정하고, 예술의 신성화를 경계하며, 작품과 삶을 일치하는 데 평생을 쓰며 마침내 해방된 미술가가 구현한 예술의 자장 안에서, 예술을 짝사랑한 갸륵한 우리 모두를 위해 기도할 순간을, 그렇게 꿈꾸게 되었다.
 

Keyword

Credit

    글/ 윤혜정(국제갤러리 이사, <나의 사적인 예술가들>, <인생,예술> 저자)
    에디터/ 손안나
    사진/ 이우정(인물),국제갤러리(전경)
    디지털 디자인/ GRAFIKSANG
팝업 닫기

로그인

가입한 '개인 이메일 아이디' 혹은 가입 시 사용한
'카카오톡, 네이버 아이디'로 로그인이 가능합니다

'개인 이메일'로 로그인하기

OR

SNS 계정으로 허스트중앙 사이트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회원이 아니신가요? SIGN U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