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STYLE

별나고 아름다운 조용의 세계, Mr. 플랑크톤

조용 작가가 보여주는 세계는 유별나다. 그래서 아름답다. 전작 <사이코지만 괜찮아>에 이어 선보인 두 번째 드라마 <Mr.플랑크톤>은 재기발랄한 설정과 매력적인 캐릭터와 함께 촘촘하고 탄탄하게 쌓은 서사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울고 웃기를 반복한다.

프로필 by 최강선우 2024.11.21
사진/ 넷플릭스 제공

사진/ 넷플릭스 제공

이 드라마, 심상치 않다. 뻔한 삼각 로맨스인 줄로만 알았는데, 허무맹랑한 SF 장르를 연상시키는 제목으로만 예단해선 안 된다. 크고 작은 결핍에 공명하고, 서로에게 보여준 다양한 사랑의 원형에 골몰하게 한다. 매번 나오는 대사가 가슴을 마구 후려친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Mr. 플랑크톤> 이야기다.
사진/ 넷플릭스 제공

사진/ 넷플릭스 제공

사진/ 넷플릭스 제공

사진/ 넷플릭스 제공

우연과 상상 가득한 이야기에는 ‘정자가 실수로 바뀌는 바람에 부모에게 버림받은 해조(우도환), 종갓집 며느리가 되기 위해 임신했다는 거짓말을 하지만 조기 완경 진단을 받은 재미(이유미), 사랑 앞에선 무모해도 종갓집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한 어흥(오정세)’이 등장한다. 해조는 지금 당장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폭탄이 머릿속에 가득한 상태라는 진단과 함께 시한부 판정을 받는다. 죽기 전 친부를 찾으러 떠나려는데 우연히 전 애인 재미와 재회한다. 생에 마지막 여행에 재미를 끌어들인다. 워낙 설정이 특이해서 호기심에 원작을 검색했다. 그런데 이게 웬걸. 각본에 익숙한 이름이 있었다. 조용 작가였다. 2020년 방영한 드라마 <사이코지만 괜찮아>의 긴 여운으로 그의 이름을 곧바로 다시 떠올릴 수 있었다. 전작에서 느꼈던 삶과 사랑과 죽음에 대한 따뜻한 시선, 심오한 통찰은 이번 작품에도 깃들어 있다.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다는 원초적인 감정을 건드리며 눈물을 쏟게 만들거나 입체적이고 빈틈 많은 인물이 관계를 통해 성장한다는 서사도 여전했다.
사진/ 넷플릭스 제공

사진/ 넷플릭스 제공

사진/ 넷플릭스 제공

사진/ 넷플릭스 제공

‘정처 없이 떠도는 것’, ‘방랑자’라는 뜻의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플랑크톤처럼, 드라마는 결함과 결핍을 안고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다. 작가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독특하다 못해 이해할 수 없는 면모를 가지는데, 보통 유년 시절 겪은 결핍에서 비롯한다. <사이코지만 괜찮아>의 문영(서예지)이 엄마로부터 학대를 당해 냉혈한 사이코패스가 된 것처럼, 해조와 재미 또한 ‘집’으로 대변되는 가족에 대한 결핍이 있다. 성인이 되어서도 결핍은 불행이 되어 둘을 지겹게 쫓아다닌다.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해 ‘결코 좋은 엄마가 될 수 없을 것’이라 자조하는 재미나 냉소적이며 회피적인 해조의 성향에서도 느껴진다. 그러나 전작과 비교해 발전한 부분은, 어떤 것의 부재나 버려지고 남겨짐만이 아닌, 부족할 것 없어 보이는 과잉 역시 결핍이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는 점이다. 사회가 말하는 혹은 다수의 관념 속 결핍에 대한 이미지를 해체하고 선입견을 부수는 설정은 누군가에는 위로가 된다. 흥은 해조와 달리 무서운 극성 엄마 호자(김해숙)와 뼈대 있는 가문으로부터 정서적 자립을 못 한 인물이다. 버티는 것 하나는 잘하지만 정작 움직여야 할 때는 눈치를 보고 포기하고 만다. 하지만 재미에 대한 사랑으로 그는 40년 인생 처음 스스로 움직이기를 ‘선택’하면서 진정한 독립의 과정을 경험한다. 그곳에서 만난 사랑의 라이벌 해조에게 흥은 자유와 방랑할 용기를 배우고 얻는다. 해조는 흥을 통해 우직하고 무던한 사랑, 물러나지 않는 희생의 자세를 연습한다. 재미는 두 사람에게 다른 방식으로 사랑받으며 온 마음을 내던질 힘이 자신에게도 있음을 알아간다. 이쯤 되면 로맨스 물이 아닌, 결핍을 딛고 서로 다른 세계로 나아가는 성장기에 가깝다.
사진/ 넷플릭스 제공

사진/ 넷플릭스 제공

작품이 더욱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이유는 주변에 존재하는 마음에도 눈길을 주고 아낌없이 무게를 실어서다. 이성애적 관계가 채우지 못하는 구멍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듯하다. 봉숙(이엘)이 방황하던 어린 해조를 거둔 것처럼, 호자가 눈물을 흘릴 때 말없이 선글라스를 벗어주는 존(알렉스 랜디)처럼, 까리(김민석)가 해조에게 보인 의리처럼 말이다. 다양한 사랑의 원형들은 마음의 빈자리를 헤집고 훅 들어온다. 결핍이라고 느껴진 수많은 상처는 서서히 메워진다. 상처는 거짓말처럼 말끔히 지워지고, 다른 상처에 포개지고, 아물었다가 상처 나기를 반복한다. 날줄과 씨줄로 엮인 관계 속에서 우리는 얽히고설키며, 선을 넘고 물러나기도 한다. 모든 과정에서 살아야 할 이유를 발견하기도 한다. 이 뒤엉킴을 오래도록 기억하고, 그래서 살고 싶어진다.
사진/ 넷플릭스 제공

사진/ 넷플릭스 제공

해조가 떠난 뒤, 재미는 엄마가 되지 않고서도 진정한 사랑을 주고받는 즐거움을, 흥은 떠돌아다니는 즐거움을 이어갈 것이다. 남은 자들은 떠난 자를 그리워하며 삶의 이유와 가치를 어떻게든 찾아내 살아갈 것이다. 그러니 새드 엔딩이라고 단정 짓거나 슬퍼할 필요는 없다. 이렇듯 삶과 죽음은 연속적이다. 그리고 작가가 작품을 통해 전하려던 것처럼, 실로 태어나지 말아야 했을 생은 존재하지 않는다. 누구에게나 들려주고 싶은 이 보편타당한 진실을 동화 같은 이야기로 꾸며내는 힘은 조용 작가만의 독특한 세계를 구축한다. 또 어떤 이야기로 삶의 반짝거림을 이야기할지, 다음이 벌써 기다려진다.
사진/ 넷플릭스 제공

사진/ 넷플릭스 제공

사진/ 넷플릭스 제공

사진/ 넷플릭스 제공

관련기사

Credit

  • 사진/ 넷플릭스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