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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 문학상의 숨은 조력자, 데보라 스미스는 누구인가?

행간 곳곳까지 읽는 데보라 스미스.

프로필 by 신윤서 2024.10.16
한강 작가의 책이 다른 언어로 번역되지 않았다면 작가는 과연 노벨상 수상 후보에 오를 수 있었을까? 수상을 차치하고서라도 작품이 더 많이, 널리 읽히는 일은 작가에게 매우 중요하다. 이때 번역은 작품이 언어의 장벽을 넘어 더욱 더 먼 곳으로 갈 수 있게 한다. 좋은 번역을 거친 작품은 날카로운 문제의식과 뛰어난 작품성을 더욱 빛내며 번역이 놓은 다리를 건너 더 많은 이들에게 가닿곤 한다.

번역서를 펴내는 일은…
“영어와 한국어 사이에는 아직 뚫리지 않은 회로가 무궁무진합니다. 어떻게 보면 번역이란 그 미지의 회로를 뚫는 작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번역의 탄생>, 이희재, 157p)

번역은 작가의 의도를 왜곡 없이 전하면서도 매끄럽게 읽히게 하는 고도의 기술이 필요한, 예술에 가깝다. 특히 한국어는 주어가 습관처럼 생략되고 애매모호한 표현이 많아 번역하기 어려운 언어로 익히 알려져 있다. 서구권과 문화와 사고방식이 달라 고유명사나 말맛을 살리기도 까다롭다. 여기에 번역 작업 자체를 어렵게 하는 현실적 문제도 있다. 특히 비영미, 비유럽권 작품은 글로벌 출판시장에서 주목을 받기 쉽지 않다. 독자 수요가 크지 않아 시장 구조가 철저히 영어로 된 작품 중심으로 돌아가기 때문. 따라서 특정 작가나 문화권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이를 적극 번역하겠다는 번역가, 에이전시, 출판사의 의지가 더욱 중요해진다. 한강은 1990년대부터 줄곧 작품 활동을 시작했으나, 그의 작품이 세계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시점은 번역가 데보라 스미스 Deborah Smith가 <채식주의자>를 작업에 돌입한 때다.

데보라 스미스는…
데보라 스미스와 한강

데보라 스미스와 한강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스미스는 한국어 번역을 틈새시장으로 발 빠르게 판단하고는 런던대학교에서 한국학 석박사 과정을 공부했다. 한국어를 배운 지 3년 남짓 된 2013년, 그는 우연히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만나고 완전히 매료돼 번역 작업에 돌입한다. 그 이후 스미스는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 <흰>, <희랍어 시간>과 배수아 작가의 소설 <에세이스트의 책상>, <서울의 낮은 언덕들>, 황정은 작가의 <백의 그림자> 등을 번역했다. 한국 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 문학에 대한 진심과 트렌디한 감각까지 겸비한 스미스는 이미 한국 문학 전문 번역가로서 인정받은 바 있다. 지난 2017년 한강이 <채식주의자>로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을 받았을 때 그는 공동수상자였다. (1987년생인 스미스는 당시 28세의 박사과정 학생이었다!)

오역 논란부터 수상 주역까지
그는 한강의 작품을 읽을 때마다 “텍스트에 직접 언급되지 않은 어떤 이미지들이 행간 곳곳에서 아주 강렬하게 떠올라 온몸을 사로잡는 느낌”이라고 묘사했다. (Asymptote Journal 기고문)이 느낌에 집중하고 전하려 하기 때문에 스미스의 번역 스타일은 원문에 충실한 방식과는 확실히 거리가 멀다. 해석의 다양성을 가능케 하는 번역을 고심한 흔적이 묻어난다. 그럼에도 한강이 쓰는 절제된 한국어가 과장되어 표현되는 것을 늘 경계하고, 한국적 문화적 특수성과 맥락을 읽어내 강조한다. 이런 번역 방식을 두고서는 몇 차례 오역 논란이 일기도 했다. 하지만 한강 작가는 스미스의 번역에 대해 “내 고유의 톤을 포착하고 있다”며 “실수들이 있던 것은 사실이나 소설을 전달하는 데에 결정적 장애물이 되지는 않았다”라고 설명했다.

변방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번역가
한강의 <희랍어 시간>, <채식주의자> 영문판

한강의 <희랍어 시간>, <채식주의자> 영문판

틸티드 악시스 프레스에서 펴낸 한국 작가의 책들

틸티드 악시스 프레스에서 펴낸 한국 작가의 책들

2015년 그는 아시아·아프리카 문학에 특화한 비영리 목적 출판사 ‘틸티드 악시스 프레스 Tilted Axis Press’를 꾸린다. 박사학위 2년 차였을 때 스미스는 경직된 출판 구조 탓에 소외되고 밀려나는 비영어권 문학이 전 세계로 뻗어 나갈 창구를 마련해야 한다는 필요를 크게 절감했다고. 실제로 한강의 <채식주의자>의 첫 20페이지를 번역해 영국 출판사 그란타 북스 Granta Books에 보낸 것도 그였다. 출간 후에는 직접 출판사와 평론가, 독자에게 이메일을 보내며 책을 열심히 홍보했다. 지금도 출판사는 다양성과 교차성을 이야기하는 작품이나 작가에 꾸준히 주목한다. 그 결과로 영어 판권을 소유한 박상영 작가의 <대도시의 사랑법>은 2022년 부커상 후보에 올랐다. 이 책을 번역한 안톤 허 Anton Hur는 노벨상 수상 발표 이후 자신의 X에 “스미스 선생님이 책 <대도시의 사랑법>을 출판해주셨고 번역은 부커상 더블린상 후보가 되었고 나는 전문 문학 번역가가 될 수 있었음”라는 트윗을 올려 감사를 전하기도 했다.

번역가 데보라 스미스의 말·말·말 3
1 "채식주의자의 제 번역은 완벽하지 않아요. 완벽함은 번역가가 실패할 것임을 알면서 노력해야 하는 건데요. 실수가 불가피하다는 게 좌절하고 낙담하는 걸 막지는 못하지만, 항상 배우고 있습니다." (2016년, 국내 기자간담회에서)

2 "출판사의 목표는 독창적인 언어, 스타일, 내용, 그리고 종종 저자의 성별이 교차하는,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은 글을 출판하는 일입니다. 문학이 인류학이 아닌 예술이라는 사실을 명확히 하는 방식으로 출판하려고 합니다. 문화가 동질화되지 않도록 해주는 번역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요.” (2016년, ‘Quites’지 인터뷰 중)

3 “한강의 작품을 접할 때면 저는 장르를 불문하고 그 작품 특유의 분위기와 어조와 결이 하나의 정제된 이미지로 다가오는 경험을 종종 하는데, 작가의 소설가이자 시인으로서의 이중생활 덕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생생한 인상은 번역가에게 매우 유용합니다.” (대산문화 번역 후기 기고문 ‘자극하고, 불편하게 만들고, 질문하고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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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 글/ 최강선우
  • 사진/ LATimes 펭귄랜덤하우스 그랜트북스 틸티드악시스프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