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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공예가 박지민이 믿는 한 가지

변함없이 변화하는 젊은 장인들을 만나다.

프로필 by 손안나 2024.10.11
유리공예가 박지민
하퍼스 바자 올해의 ‘젊은 공예인’으로 선정되었다.
박지민 학부 때는 디자인을 전공했다. 지금 와서 예전 작업들을 보니 목업이나 디자인을 실제로 구현할 때 아크릴 같은 투명 소재를 썼더라. 나도 모르게 투명한 재료에 끌렸던 것 같다. 재료를 탐구하고 싶은 마음으로 여러 경험을 하다가 유리에 정착하게 되었다. 첫 작업 이후로 석사 전공과 유학을 하면서 작가로 10년 넘게 활동했다. 올해 ‘젊은 공예인’이라는 타이틀을 얻게 된 건 일반적인 유리공예처럼 색 대신 재와 그을음을 사용하는 독창성 때문인 것 같다.
하퍼스 바자 인공적인 색 없이 재와 그을음으로 새로운 유리를 소성한다. 그을음과 재는 어쩌면 유리와는 정반대의 속성인데.
박지민 아무래도 유리의 제일 큰 특성은 투명함인데 내 작품들은 대부분 반투명이나 불투명이다. 박물관 같은 데 가면 보물들이 다 유리상자 안에 보호되어 있지 않나. 그래서 유리가 뭔가를 보호한다는 기능적인 측면에 좀 더 초점을 맞춰서 작업을 풀어나가고 있다.
하퍼스 바자 작은 나뭇잎과 종이 조각 등 작품 안에 재로 남겨질 것들은 어떻게 선택하는지.
박지민 크게 세 가지 정도로 나눌 수 있다. 우리 주변에서 흔하게 사라지는데 사라지는지 모르는 것들을 고르게 된다. 낙엽이나 떨어진 꽃잎, 신문지나 과월호 잡지, 영수증처럼 중요한 기능을 했다 어느새 사라져도 상관없는 것들. 아니면 여행 갔을 때 기억하고 싶은 장소나 일상 속에서 남겨두고 싶은 곳, 사라지는 장소에서 수집을 해오기도 한다.
하퍼스 바자 사라지는 장소에서 수집한 것들을 통해 사회적 이슈를 다루기도 한다.
박지민 정치적인 이슈를 내포할 만큼 거창한 이유에서는 아니다. 다큐멘터리처럼 기록을 해두고 싶은 마음에서 시작했다. 예를 들면 평창올림픽 때 3일 동안 열리는 경기 때문에 가리왕산을 벌목해 알파인 스키장을 만들었던 적이 있다. 당시 순식간에 벌목된 자연을 보존하고 싶어 나무 기둥이나 가지, 잎을 가져와 작업으로 남겨두었다.
하퍼스 바자 작업을 시작한 지 10년이 넘도록 사라짐에 천착해왔다. 그 이유는?
박지민 재는 ‘죽음으로 한줌의 재가 되었다’ ‘모두 불타 한줌의 재가 되었다’처럼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이미지를 안고 있다. 지금은 유리에 변형된 추상적인 이미지를 남기는 작업을 주로 하고 있지만 처음 시작할 때는 모양 그대로 재만 남게 하는 작업을 했었다. 단풍잎을 넣으면 단풍잎이 그대로 하얀색의 재가 되어 예쁘게 보호되는 것이 희망적이고 예쁜 느낌을 주었다. 사라졌는데 사라지지 않은 모순적인 상황이 흥미로웠다. 재와 그을음은 날아가거나 사라지기 쉬운데 흔적을 간직하는 작업이 여전히 재미있다.
하퍼스 바자 달항아리 형태의 작품이나 표면의 그을음이 마치 수묵화처럼 보이는 작품들도 있다.
박지민 내 작품을 보고 먹으로 칠하거나 유리 안에 동양화를 끼워 넣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의도한 건 아니었는데 먹의 농담과 그을음의 그러데이션이 상통하는 부분이 있다고 느꼈다. 서구적인 재료를 쓰는데 동양적인 느낌이 난다는 반응이 나로선 가장 반가웠다. 사람들의 반응을 좀 더 발전시켜서 전통적인 철화백자를 재해석한 것이 달항아리 형태의 작품이다. 백자의 그림으로 나타나던 소나무라든가 목련이나 매화를 태워서 새로운 패턴을 만들었다. 올해 처음 선보인 작품으로, 현재는 이 작업 위주로 전시를 하고 있다.
하퍼스 바자 같은 주제이지만 오랜 시간 동안 다양한 형태로 변모되어왔다. 오래도록 터득한 자신만의 작업 과정은?
박지민 투명한 유리와 유리 사이에 수집물을 넣고 700℃에서 1200℃ 사이에서 녹인다. 유리가 녹아 한 장이 되는 동안 수집물은 본연의 형태와 색을 잃고 새로운 이미지로 변형된다. 우연성을 기반으로 하는 작업이기 때문에 실험을 굉장히 오래 했다. 같은 유리라도 브랜드마다 맞춰야 하는 설정값이 다르다. 똑같은 재료이지만 녹이는 온도나 횟수, 시간의 아주 미묘한 차이에도 결과물이 전혀 다르게 나온다. 데이터가 축적돼 있어도 100% 컨트롤할 수는 없다. 이제 원하는 이미지를 70~80%는 나오게 할 수 있지만 20%에서 발생되는 새로움 또한 이 작업의 즐거움이다.
하퍼스 바자 아무래도 우리나라 유리공예 업계는 아직 성장 중일 텐데 젊은 작업자로서 어떻게 바라보고 있나?
박지민 유리공예를 하려면 용해로가 기본이고 블로잉을 할 경우 더 시설을 갖춰야 하기 때문에 간단한 체험형 공방과 상업적인 공장 사이 개인 작업자 신이 크게 형성되어 있진 않다. 이탈리아 베니스 같은 경우에는 전통적으로 유리 작업을 해온 장인들이 보편적으로 존재하고 집안마다 내려오는 비밀스러운 기법을 간직하고 있다. 해외처럼 세계적인 브랜드도 아직은 없지만 후학을 양성하며 작업을 지속하는 좋은 작업자가 있고 해외로 진출한 이들도 많다. 유리가 우리나라 현대 공예에 자리 잡은 시간에 비례하면 단기간에 발전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퍼스 바자 작업하는 하루하루를 어떻게 보내나?
박지민 작업 루틴이 뚜렷하면 좋겠지만 고온에서 하는 작업이라 날씨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여름에는 너무 더워지기 전에 새벽부터 시작해 대략 정오까지 일한다. 그리고 강화 작업 또한 변수가 많아 시간을 정해놓고 작업할 수가 없다. 시간 안에 기대 온도까지 끌어올리도록 해도 되지 않는 경우가 있고 중간에 다시 온도를 떨어뜨릴 때도 마찬가지다. 컴퓨터로 딱딱 떨어지는 디자인 작업을 하다가 유리 작업을 시작했을 때 성격을 많이 버렸다.(웃음) 시간이 지나 이젠 많이 받아들였다. 작업을 하지 않을 때는 수집물을 찾기 위해 서칭을 하거나 직접 발품을 팔며 보낸다.
하퍼스 바자 수렴을 지나 체념을 하면서도 작업을 꾸준히 하게 되는 원동력은?
박지민 유리는 진짜 어렵다. 뜻대로 되지 않는다. 이제 자신이 좀 붙었다 싶을 때 여지없이 예상을 빗나가는 결과를 보여준다. 끝까지 알 수 없을 것 같다는 느낌과 끝장을 보겠다는 느낌이 공존한다. 애증과 체념이 뒤섞여 이제는 유리를 평생 다루는 게 내 팔자로구나 받아들이게 되었다.(웃음) 아마 장인이란 건 이런 시간과 싸우고 즐기며 끝에 다다른 사람들이 아닐까?

Credit

  • 프리랜서 에디터/ 박의령
  • 사진/ 이우정
  • 헤어&메이크업/ 장하준
  • 스타일리스트/ 이명선
  • 세트 스타일리스트/ 김태양
  • 어시스턴트/ 정지윤
  • 디자인/ 이진미
  • 디지털 디자인/ GRAFIKS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