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STYLE

여자, 야구장을 점령하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야구판 망해간다고들 했는데 걱정이 무색하게도 야구의 인기가 하늘을 찌른다. 그 중심에는 여자들이 있다.

프로필 by 손안나 2024.08.23
상대 선수가 안쓰러울 정도로 신들린 경기를 펼쳐내는 안세영 선수를 볼 때면 배드민턴 수업에 등록하고 싶다가도 일론 머스크가 액션영화 주인공으로 강력 추천한 김예지 선수의 무심한 저격 폼을 볼 때면 사격장으로 달려가고 싶다. 그 외에도 양궁, 수영, 탁구…. 평생 운동과는 담 쌓고 살았는데 뭔가를 강렬하게 배우고 싶은 마음은 오랜만이다. 다들 잘되면 내 탓, 안 되면 사회 탓을 하며 각자 갈길 가는 줄 알았는데 한 목소리로 팀 코리아를 응원하다 보면 모르는 사람과도 내적 친분이 생긴다. 올해 파리올림픽을 앞두고 센강은 구정물에다 올림픽 분위기도 안 난다며 심드렁했는데 막상 파티가 시작되니 새벽잠도 줄이며 중계를 챙겨 보느라 바쁘다. 만성피로에 시달리던 인간들이 시차도 극복하게 만드는 이 에너지는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원래 우리 안에 이런 열정이 있었던가?
돌이켜보면 주기적으로 돌아오는 하계올림픽이나 동계올림픽, 월드컵 시즌마다 미처 내 자신도 몰랐던 감정이 불쑥불쑥 고개를 내밀었던 것 같다. 분명 번아웃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광기와 승부욕이 피를 뜨겁게 만든다. 그런데 야구 팬들은 3백65일 그렇게 살고 있다. 이제 웬만한 일에는 별 감정 동요도 일으키지 않는 만렙 어른이 되었지만 야구장에만 가면, 야구 생각만 하면 심박수가 높아진다.(반대로 야구 덕분에(?) 화를 다스릴 줄 알게 된 사람들도 있다.)
폭염 경보가 울린 여름 한가운데, 서울에 살고 있는 직장인 민병미 씨가 황금 같은 7말8초 휴가에 대구로 향하는 이유도 오직 야구 때문이다. 삼성라이온즈파크로 가는 길, 한낮 기온이 36℃에 육박하는 대프리카의 불볕더위도 별 상관하지 않는다. 일본 유학 시절,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활약하던 이승엽 선수를 응원하며 낯선 땅에서 힘을 얻었던 것이 그가 야구에 빠지게 된 계기다. 지금은 ‘최!강!삼!성! 구자욱!’을 목이 터져라 외치는 그는 수년간 야구장을 찾으며 여성 관람객이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고 있는 것을 체감하고 있다. “야구장에 앉아 주위를 둘러보면 여성 관람객이 확연히 많아졌어요. 예전에는 남자친구 혹은 가족과 함께 온 이들이 많았다면 요즘엔 여자들끼리 오는 팀도 꽤 되더라고요.”
여성 관람객이 확연히 늘고 있다는 건 느낌적인 느낌이 아니다. 티켓링크의 ‘프로야구 입장권 구매자 연령, 성별 분포’ 자료에 따르면 20대 여성의 비율은 23.4%, 30대 여성은 14.3%에 달한다. 20대 남성은 14.8%, 30대 남성은 12.0%로 나타났다. 인터파크에 따르면 프로야구 입장권 구매자 중 20대 여성 점유율이 2019년 21.8%에서 2024년 42.1%로 늘었다. 요즘 KBO는 여성들이 점령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외신도 한국의 스포츠 경기 관람객 중 여성이 더 많은 비율을 차지하는 현상에 주목하고 있다. <뉴욕타임스(NYT)>는 한국 스포츠에서 여성 팬덤 비율이 높은 이유 중 하나로 경기장이 안전한 장소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꼽는다. K팝 문화도 영향을 미쳤다고 분석한다. 각자의 ‘최애’를 보러 가듯 좋아하는 선수의 경기를 따라다니며 응원하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것. 스트레스를 풀러 야구를 보러 왔다 LG 트윈스 임찬규 선수의 팬이 되어버린 박인영 씨도 이 같은 분석에 공감한다. “구단에서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도 인기 요인에 한몫한다고 생각해요. 선수들과 소통하는 채널이 많아지다 보니 젊은 세대들이 쉽게 접한 것 같고요. 시대에 흐름에 따라 선수들도 잘 꾸며서 그런지 실력 좋고 잘생긴 선수도 늘어났어요. 특히 야구는 시즌 중 일주일 내내 경기를 하니 자연스레 선수들을 접할 기회도 많잖아요.”
룰 따위는 몰라도 누구나 쉽고 신나게 즐길 수 있는 응원 문화도 우연히 야구장을 찾은 ‘야구알못’들을 하나둘 스며들게끔 한다. 한국의 프로야구를 접한 외국인들이 메이저리그를 노잼이라고 할 정도니 말이다. 누구나 따라 부르기 쉬운 응원가를 목이 터져라 외치며 하나 되는 그 일체감. 학창 시절 공놀이에서 소외된 경험이 있는 많은 여성들에겐 이 희열감 또한 처음 느껴보는 종류의 것이다. 팀 스포츠의 감동과 즐거움을 야구장에서 처음 알게 된 이들은 이제 야구장에 오기 전으로 인생을 되돌릴 수 없다. “망해간다고 하던 야구판이 부활한 데는 코로나의 영향도 있다고 봐요. 이렇게 많은 사람들과 웅장한 공간에 함께 모여서 신나고 재미있는 응원을 매일같이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스포츠임을 재확인하게 된 거죠.” 민병미 씨의 말이다.
이 같은 열기에 힘입어 야구장도 달라지고 있다. 여자 화장실을 확충하는 것을 시작으로 먹거리도 점점 다양해지고 있다. 포토존에 ‘인생네컷’까지 있으니 성수동에서 친구들과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야구장에서도 다 할 수 있다. 의외로 제약이 거의 없는 이곳에선 남에게 피해만 안 끼친다면 과제를 해도 되고 밀린 업무를 해도 된다. 꼭 여성 팬들만을 위한 건 아니지만 야구장의 귀여운 포인트와 즐길 거리도 점점 업그레이드되어가고 있다. 일단 줄을 서서 귀여운 굿즈를 득템하고 맛있는 음식을 종류별로 산 뒤 인증샷을 찍고 신나게 응원하기. 요즘 같은 고물가 시대에 이 정도면 온갖 엔터테인먼트를 풀 패키지로 즐기는 셈이다.
다시 찾아온 야구의 인기는 국내 최고 프로 스포츠가 더욱 잘되길 바라는 팬들의 응원도 담겨 있다. 일부 선수들의 사생활 문제, 각종 국제 대회에서의 부진한 성적 등 팬들을 힘 빠지게 하는 이슈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개선해나가길 원하는 마음 말이다. 무엇보다 무기력한 사람의 피를 다시 끓어 오르게 만드는 데는 야구가 특효약이다. 인생이 무료하게 느껴진다면, 메마른 감정을 되살리고 싶다면 야구장으로 향해보자. 어느 팀을 응원하든 당신의 인생은 다이내믹해질 것이다.

Credit

  • 글/ 김희성(프리랜스 에디터)
  • 사진/ 연합뉴스
  • 디자인/ 이예슬
  • 디지털 디자인/ GRAFIKS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