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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만으로 여행하는 기분! 그 책, 그 장소

어떤 문장은 단지 읽는 행위만으로도 우리를 낯선 곳으로 데려다 놓는다. 여행은 책, 책은 여행. 언젠가 그곳에 간다면 다시 펼쳐볼 이야기들.

프로필 by 손안나 2024.06.29
“그쯤 되면 20세기 초에 이곳을 찾아와 악마의 땅이라며 저주를 퍼붓고 간 폴 클로델을 이해할 수 있겠다고 당신은 생각한다. 누구라도 유적들을 휘감고 탐욕스럽게 커버린 십층 건물 높이의 판야나무를 본다면 이곳을 떠도는 마성(魔性)을 감지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인간이 만든 모든 것을 무화시키는 작디작은 씨앗의 위력. 그것에 떨게 되고 자연스레 살아온 날들을 반추하게 될 것이다. 당신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당신 역시 당신의 삶에 날아들어온 작은 씨앗에 대해 생각한다. 아마도 당신 머리 어딘가에 떨어졌을, 그리하여 거대한 나무가 되어 당신의 뇌를 바수어버리며 자라난, 이제는 제거 불능인 존재에 대해서.” -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 中 ‘당신의 나무’, 김영하, 복복서가

앙코르와트 타 프롬 사원
‘청년’ 김영하는 1998년 캄보디아 여행 직후에 이 소설을 썼다. 무시무시한 크기의 나무와 불상, 찌는 듯한 무더위가 만들어낸 이야기. 나는 내 삶을 변화시키고 싶지만 그 단단한 일상의 껍질을 뚫지 못할 때 종종 여기로의 꿈을 꾼다. 타 프롬 사원에 앉아서 ‘당신의 나무’를 읽을 것이다.

“다만 지금도 확실히 기억하는 것은 처음으로 히가시마이즈루 역에 내렸을 때 느낀, 마음이 오그라드는 것 같은 심한 적요감입니다. 히가시마이즈루는 저에게 이상한 어둠과 쓸쓸함을 지닌 동네로 느껴졌습니다. 차가운 바닷바람이 떠도는 초라한 변경의 땅으로 보였습니다. 실제로 히가시마이즈루는 교토의 북쪽 끄트머리에 있는, 일본해에 면한 한산한 곳이었습니다. 겨울에는 눈, 여름에는 습기, 그 밖의 계절에는 어두침침한 두꺼운 구름뿐, 드문드문한 사람의 왕래, 먼지 섞인 바닷바람.”
“그 눈은 어딘지 모르게 슬퍼 보여 그녀가 가진 아름다움을 한층 돋보이게 해주었습니다. 그런 그녀를 보고 있으니 저는 문득 평소의 억누르기 힘든 적요감에 휩싸였습니다. 세오 유카코라는 소녀가 발산하는 신기한 어둠은 일본해에 면한 외진 항도의 모습과 동질의 것이었습니다.” - <금수>, 미야모토 테루, 바다출판사

교토 마이즈루 바닷가
<금수>는 10년 전 불의의 사고를 계기로 이혼한 남녀가 편지를 주고 받으며 과거에 대한 미화를 지우고 지리멸렬한 현실을 받아들이는 이야기이다. 그러므로 가장 오래된 기억, 주인공의 10대 시절을 회상하는 대목은 그만큼 환상에 가깝다. 이제 나에게 마이즈루는 김승옥 소설의 무진 같은 미지의 장소.

“벌써 이십 년도 더 지난 일이지만 내가 살던 무렵만 해도 밀라노 사람들은 런던의 안개 따위 밀라노에는 명함도 못 내민다며 자부심이 대단했고, 런던을 잘 아는 이탈리아 친구들도 그 사실을 인정했다. 해마다 다르지만 대체로 11월이 되면 눅진하고 정겨운 잿빛 안개가 찾아든다. 아침에 눈을 떠 바깥 차 소리가 어쩐지 먹먹하게 들려오면 아, 안개인가 싶다. 눈 오는 날의 고요한 분위기와도 다르다. 아침이 되면 안개에 젖은 매연이 자동차 몸체에 착 들러붙는다. 그런 날이 며칠씩 이어지다보니 겨울에는 아무리 세차를 해도 소용이 없다. 밀라노 차는 더러워서 어디를 가나 금세 알아본다며, 사람들은 그런 일로도 은근히 안개를 자랑한다.” - <밀라노, 안개의 풍경>, 스가 아쓰코, 문학동네

밀라노 리나테 마을
패전의 흔적이 가시지 않은 1960년대에 일본을 뒤로하고 유학길에 올라 밀라노에 거주했던 에세이스트 스가 아쓰코의 기록. 낯선 땅에서 새로운 사상을 받아들이며 끊임없이 사유한 청춘의 존재감. 수십 년이 지난 지금, 나의 기억 속에도 밀라노는 안개가 고요히 흐르고 있다.

“여행을 하다보면 거듭남의 행위와 관련된 매우 실제적인 경험을 하게 되지요. 당신은 완전히 새로운 상황에 처한 겁니다. 하루는 예전보다 느리게 지나가고, 길에서 만나는 낯선 사람들이 하는 말을 대부분 알아 듣지 못합니다. 어머니 배 속에서 갓 나온 아기처럼 말이죠. 갓난아기처럼 주위의 것들에 훨씬 더 많은 중요성을 부여하게 되지요. 그래야만 살아남을 수 있으니까요. 사람들과도 더욱 가까워지게 되지요.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 도움을 받을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신들이 베푸는 아주 작은 호의조차 몹시 기쁘게 받아들이죠. 마치 남은 생애 내내 그걸 기억하기라도 할 것처럼 말입니다. 또한 모든 것이 새롭기 때문에, 사물의 아름다운 면만 보게 되고 살아 있음을 더 행복하게 느끼게 됩니다.” - <순례자>, 파울로 코엘료, 문학동네

산티아고 순례길
1987년 파울로 코엘료는 영감을 찾아 산티아고 순례길에 올랐고, 2008년 나 역시 그를 따라 순례길에 나섰다. 특별한 영감을 찾고 싶었다. 그러나 막상 길 위에 서자 모든 것이 달라졌다. 어린아이처럼 모든 호의에 기쁨을 느끼며 하늘의 별을 보고 우주의 경이를 느꼈다. 삶이 곧 영감이었다.

“매일 집을 나서면서 나는 이스트사이드를 걸어야겠다고 되뇌는데, 그건 이스트사이드가 더 조용하고 깨끗하며 널찍해서 성큼성큼 걸어다니기 편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신을 차려보면 나는 늘 웨스트사이드의 북적거리고 불결하며 불안한 거리를 걷고 있다. 왜 이렇게 되는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웨스트사이드에서 보내는 오후는 대부분 어떤 주제를 품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저 모든 멋진 사람들 속에 갇혀 있는 저 모든 지성. 그건 내가 걷는 이유를 떠오르게 한다. 우리 모두가 걷는 이유를.” - <아무도 지켜보지 않지만 모두가 공연을 한다>, 비비언 고닉, 바다출판사

뉴욕 브로드웨이 거리
비평가 비비언 고닉이 쓴 일곱 편의 에세이는 모두 외로움에 대한 빼어난 통찰이 담겨 있다. 대도시에서 살아간다는 것, 그 군중 속의 고독을 경험한 적 있는 사람이라면 위로받을 수밖에 없다. 고닉의 표현을 빌리자면, 뉴욕의 ‘거리는 계속 움직이고, 우리는 그 움직임을 사랑’하니까.

Credit

  • 사진/ Getty Images
  • 디자인/ 이진미
  • 디지털 디자인/ GRAFIKS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