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출간한 산문집 이우정의 〈좋아서,〉는 왜 교보문고에서 살 수 없는 건가? 인스타그램을 통해 이 같은 현실에 대한 속상함을 토로하며 “내 책이 팔리고 안 팔리고는 사실, 나는 관심 없다. 이런 말을 믿을지 모르지만, 글을 쓰는 건 내가 사랑하는 일일 뿐이다. (중략) 열심히 책을 만드는 출판사는… (중략) 그래서 화가 난다. 교보가 책의 귀함을 조금이라도 안다면, 대형 출판사가 아니라 좋은 출판사를 우대해야 하는 것 아닌가? 우대가 특권이라면, 최소한 동등한 대우를 해야 하는 것 아닌가”라고 말하기도 했는데.
권력의 불균형이 심하다. 책을 사고 파는 데 있어서 적어도 오프라인에서만큼은 교보문고가 절대권력을 갖는다. 〈좋아서,〉 같은 책은 아마 한 권씩 가져다 놓을 거다. 누군가 사가는 순간 바로 재고가 사라지고, 따로 요청하지 않는 한 더 이상 가져다 놓지 않는다. 최소한 서점 매대에 책이 올려져라도 있어야 하는 건데 이조차 불가능하다. 멀티플렉스 영화관도 형식적으로나마 예술영화관에서 독립영화를 상영하는 등 일종의 제스처를 취하지 않나. 책의 경우엔 그런 보호 장치가 전무하다. 요즘은 조그마한 출판사들도 경쟁적으로 매대를 산다고 하더라.
추리고 또 추리고 남은 것들을 놓고 보니 하나하나 내가 다 좋아했던 글들이다. 수류산방 박상일 방장도 나와 의견이 거의 일치했고. ‘기존의 상업적인 글과 다르게 쓴 사람이 정말 좋아서 쓴 글 같다’라고 해서 이 책의 제목이 〈좋아서,〉가 됐다. 이 책에 실린 글은 모두 매체에 실린 글이고 어찌 보면 굉장히 상업적인 글이지만 무엇보다도 내가 좋아서 쓴 글들이다.
잡지의 시대였기 때문일까. 이 책에 실린 자유분방한 크리틱과 인터뷰가 매체에서 탄생했다는 사실에 새삼 놀랐다. 이를테면 김어준을 인터뷰하려다가 섭외에 실패한 이야기(‘서울에서 김어준 찾기’)가 크리틱이 된다거나 배우 이정재와의 다소 멋쩍고 무미건조한 대화(‘이정재라는 남자’)는 그 자체로 흥미로운 인터뷰다.
보통은 데스크에서 한 번 거르게 마련이었는데 나는 운이 좋았다. 지분의 50%는 같이 일했던 안성현 편집장이나 이충걸 편집장이 “그래 네가 쓰고 싶은 대로 써봐라”고 해줬기 때문에 가능했다. 사실 이정재 인터뷰의 주인공은 나다. 그래서 넣었다. 나라는 에디터도, 이렇게 인터뷰한 사람이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난 내가 만나는 인터뷰이가 너무 소중해서 최대한 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려고 노력하는 편인데 이정재 씨를 만나고 느낀 건 아, 이 사람의 가치관이나 기준은 내가 본인을 존중하는 것에 있지 않다는 거였다. 그러니까 그 사람은 이미 스스로를 존중하고 있기 때문에 딱히 내가 그 사람을 존중한다고 해서 그 사람의 언어가 특별하진 않겠구나, 다르게 접근해야겠다 싶었다. 오히려 이 사람의 툭툭 뱉는 말을 그대로 적어주는 게, 있는 그대로의 그 사람을 정확하게 바라보는 게 이 사람을 존중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했다.
이 책의 백미라고도 할 수 있는 2009년 최승자 시인과의 인터뷰 ‘승자의 노래’는 어떻게 성사됐나?
당시에 최승자 선생님의 사돈의 팔촌이냐는 소문까지 있었다. 이충걸 편집장은 말도 안 되는 섭외 리스트를 가져다 주곤 했는데 나도 그런 챌린지가 싫지 않았다. 최승자 선생님 인터뷰도 그랬다. 선생님과 같이 사는 큰아버지의 연락처를 구해서 어렵사리 선생님과 통화가 됐다. “언젠가 경주에 오면 한번 보죠” 하시길래 “당연히 가야죠” 하고 그 다음 주에 바로 경주로 내려갔다. 그간 인터뷰를 요청하는 기자는 많았지만 그 단계까지 간 건 내가 처음이었던 것 같다. 약속 장소에서 2시간 정도 기다렸다. 안 오시겠거니 했는데 저쪽 끝에서 선생님이 저벅저벅 걸어오셨다. 기억을 못하고 계시다가 인터뷰를 하기로 했던 것도 같은데 정확히 몇 시인지는 모르겠고 적당히 일어나고 밥 먹고 그냥 한번 가볼까 하고 나오셨다고 한다. 시인으로 데뷔하기 전이긴 했지만, 열심히 시를 썼을 때다. 그러다 보니 선생님께서도 대화하면서 나에게 공감을 많이 해주셨다. 건강이 안 좋으셨기 때문에 긴 시간 인터뷰 자체만으로도 힘들어하셨고 많이 죄송했다. 그렇지만 자료로서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길게 남아있는 선생님의 인터뷰가 없다. 2021년 ‘난다’에서 나온 선생님의 산문집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에는 그 인터뷰 당시 찍었던 사진을 커버로 사용했다. 5분 남짓 짧은 시간 찍었는데도 그런 사진이 남았다. 역시 나는 행운아다.
이 책의 원제는 ‘피처 에디터’였다. 관련 업계 종사자나 매체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 아닌 이상 피처 에디터라는 직업은 아트 디렉터만큼 대중에게 낯선 직업군이다. 누군가 당신에게 피처 에디터가 뭐하는 사람인지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하겠나?
기획하고 글 쓰는 사람. 하지만 이 정도의 설명으로는 커버가 안 된다. 내가 존경하는 스승이 해줬던 말을 인용하자면 피처 에디터는 ‘문화의 조정자’가 아닐까. 대한민국 문화 안에서 길을 안내해주는 사람은 결국 피처 에디터밖에 없다는 스승의 말에 동의한다. 이건 절대 신문 기자가 할 수 없는 영역이다. 내가 존경하는 피처 에디터들은 옷을 잘 입고 못 입고를 떠나서 패션에도 관심이 많았다. 그러니까 결국 피처 에디터는 에디터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컬렉션을 유의 깊게 보면서 그것이 어떤 맥락에서 탄생했는지 이해하는 사람. 아방가르드의 역사가 건축이나 문학, 예술 안에서 나왔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 비록 내가 거기에 점을 찍는 존재는 아닐지언정 언어로서 그것을 의미화하는 사람이라는 자부심이 있었다. 말하자면 난 이 직업을 사랑했다. 상업적 글쓰기와 예술을 구분해본 적 없다. 요즘은 브랜드 커뮤니케이션 일을 하는데 브랜드에서 원하는 ‘카피’ 역시 결코 상업적인 카피가 아니다. 다들 조금 더 문학적으로 아름다울 수 있기를 바란다. 나는 기사를 쓸 때도 시처럼 쓰고자 했고 지금도 그렇게 시를 쓰고 있다.
‘상업적 글쓰기’와 ‘시’가 결코 다르지 않다는 의견에 동의하면서도 그렇게 꼬리표를 붙이는 것은, 개인적으로 해석하자면 일종의 면피로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쓴 글이 마음에 안 들었던 적이 한 번도 없다. 왜냐하면 일단 내 기준에 충족돼야 원고를 넘겼다. 어쨌든 둘 중에 한 가지 재주는 있었다. 마음에 드는 글을 쓰는 재주가 있었거나 혹은 내 글을 마음에 들어 하는 재주가 있었거나. 행복을 느끼는 것도 재능이라고 하지 않나. 이 업계는 참 아이러니한 게 혼자 빛나는 별은 가끔 있다. 그리고 대부분은 “그런 선배가 있었지” 정도로 끝이 난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고 ‘상업적 글쓰기’로 자신을 낮추기에는 피처 에디터들이 매달 쓰는 분량은 장편 소설가의 그것보다 더 많다. 그렇게나 많이 쓰는 사람들이 자기 직업에 대한 자의식과 작가적인 마인드가 없다는 게 안타깝고 일종의 책임감도 느낀다. 나라도 그런 의식을 자꾸 일깨워줘야겠다는 생각도 들고.
3월부터는 마음먹고 앉아서 드라마를 쓰려고 한다. 구상한 스토리도 있다. 이별을 겪고 인생을 회의하다가 우울증에 걸린 한 남자가 나오는데 실은 내 이야기다. 그 남자가 어떻게 이 바쁜 도시 안에서 자기 감정을 회복해나가는지 풀고자 한다. 러닝 크루나 요가 모임, 마피아 게임 동호회도 등장한다. 동시대적으로 그런 소셜라이징 모임이 중요한 사회 현상 중 하나라고 여겨지고 있고 실제로 내가 이를 통해서 우울증을 극복했기 때문에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병원에서 의사가 “요즘엔 우울증이 워낙 흔하기도 하고 그렇게까지 크게 걱정하실 일은 아니에요”라고 하는데 일단 당사자는 너무 괴롭다. 약을 먹으라고 하는데 먹으면 계속 잠만 오고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여전히 우울증을 음지화하는 경향이 있지만 나 같은 경우엔 진단을 받고 바로 SNS에 우울증이라고 썼다. 사람들과 말하면서 그걸 극복해나가는 과정을 기록하는 게 의미가 있겠다고 생각한 것 같다. 처음엔 책으로 쓰려고 했는데 아빠가 병으로 쓰러진 이후로 매일 집에서 드라마를 보시기 때문에 이럴 거면 아들의 얘기를 보시면 좋겠다는 소망이 생겼다.
1년 전 〈바자〉와의 인터뷰에서 “나 혼자 사는 집에 모처럼 엄마가 오셨다. 청소를 해주셨는데 소파 아래에서 긴 머리카락이 나왔다. ‘우성아, 이거 네 머리카락이 아닌가 보다’라고 하셨다. 조금 있다가 엄마가 또 다른 방을 청소하다가 ‘이 머리카락도 네 머리카락이 아닌가 보다’ 하셨다”고 밝힌 일화가 1월 출간한 두 번째 시집 〈내가 이유인 것 같아서〉의 ‘아직 자란다’라는 시가 됐다. 당신을 통해 일상이 시가 되는 과정을 목도한 셈이다.
학교 다닐 때 교수님이 그랬다. “너희, 시가 너무 좋다면 아침에 일어나서 모든 사물들과 대화를 나눠라. 이불과도 나누고 베개와도 나누고 모든 사물들과 대화를 나눠라.” 그래서 그렇게 했다. 매일 아침 모든 사물들과 대화를 나누고 학교에 가서 후배들에게 말했다. “나 오늘 컵하고 대화를 나눴다. 컵아, 오늘도 나에게 물을 줘서 고마워. 네가 없었다면 나는 손바닥에 물을 고여 마셨을 텐데.” 어떤 날은 변기와 대화를 나눴다. 그때의 진지한 대화는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기억이다. 시를 쓰는 작가가 되려면 항상 사물과 대화를 나눠야겠다고 생각한 건 그때부터다. 머리카락을 보고 시를 써 내려간 건 나에게 있어서 아주 일상적인 일이다. 사실 내가 데뷔할 때만 해도 신춘문예에는 동국대, 서울예대, 고대 출신이 대부분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지방대 출신으로서 뭐라도 붙들고 싶은 간절한 노력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슬픔의 거리를 지나는 바람을 납득시키기 위해’라는 시의 세 번째 구절(종이 위에 누워 냇가와 별을 떠올린다 나는 선이거나 선을 그은 사람 / 의미 없음에 대해 말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 마음의 형태 가운데로 박수 치며 증명하는,이라고 적을 테지만)이야말로 지금까지 이야기했던 쓰는 사람으로서의 당신을 가장 선명하게 드러낸다.
이번 시집은 어딘가에 무언가를 적거나 지우면서 나라는 존재를 등장시킨다. 예술은 결국 자기 발견이다. 그 과정에서 나라는 사람을 한 걸음 물러서서 보자면 적거나 기록하거나 기억하는 것이 중요한 사람인 것이다. 방금 말한 문장은 그런 정서에서 나왔다. 내가 굉장히 좋아했던 고 황병승 시인의 ‘트랙과 들판의 별’의 오마주이기도 하다. 그 시의 ‘트랙’이 나에겐 ‘종이’였고 ‘들판의 별’이 내겐 ‘문자’였다. 작가로서 존재증명이라면 어떤 식으로든 나의 언어를 써서 남겨두는 것이라 생각한다. 시집은 3권이면 족하다. 빠르면 내년이라도 한 권 더 낼 수 있겠지만 시집을 계속 내는 것이 과연 시인인가? 시집을 내는 게 시인이 아니라 시인으로 사는 게 시인이다. 그리고 시인으로 사는 것은 시인의 삶을 사는 게 아니라 나의 삶을 사는 것일 테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고민하다 보면 그 답은 결국 동시대성을 드러내는 창작 활동인 것이다. 그것은 시일 수도 드라마일 수도 인터뷰일 수도 칼럼일 수도 있다. 피처 에디터로 살고 시인으로도 산 나만이 할 수 있는 일. 모르겠다. 이렇게 살다가 70살이 되어서야 4번째 시집을 내게 될지도. 공감하겠지만 피처 에디터로 살면서 제일 많이 들었던 말이 “에디터 그만두면 뭐해?”다. 글 쓰고 기획했던 사람이 궁극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한정적인 게 사실이다. 그래서 더 보여주고 싶다. 이런 사람도 있다는 걸. 나 혼자만 잘 먹고 잘 사는 저 하늘의 빛나는 별이 되고 싶진 않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