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가 황석희, 세상을 번역하다 || 하퍼스 바자 코리아 (Harper's BAZAAR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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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가 황석희, 세상을 번역하다

콘텐츠가 넘쳐흘러 세계와 주고받는 지금. 번역 크레디트에 가장 자주 이름을 올리는 번역가 황석희를 만났다.

BAZAAR BY BAZAAR 2022.08.09
 
셔츠, 팬츠는 Lcbx. 이너 티셔츠는 Paul Harnden. 슈즈는 Mars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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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칸 셰프〉 〈캐롤〉 〈셰이프 오브 워터〉를 봤다. 작지만 작다고만은 할 수 없는 이 영화들에 황석희가 있었다. 〈데드풀〉 〈스파이더맨: 홈커밍〉 〈킹스맨〉 〈데드풀 2〉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 〈엑스맨: 다크 피닉스〉 〈스파이더맨: 파 프롬 홈〉도 봤다. 이 크고 신나는 영화들에도 황석희가 있었다. 드라마 〈NCIS〉 시리즈와 〈왕좌의 게임〉 시리즈도 챙겨 봤다면? 황석희는 거기에도 있었다.
황석희는 2005년부터 번역가로 살았다. 문서와 케이블TV에서 시작해 아등바등 커리어 산을 기어올랐고, 운까지 잘 따라줘 극장 영화 번역가로 커리어 덮어쓰기를 성공했다. 그리고 지금, 그는 영화 번역가 사이에서 최고 중 하나다. 어느새 2022년, 그리고 2023년이다. 팬데믹을 살아가고, K-컬처가 글로벌 트렌드가 되고, 기술이 사람보다도 빨리 발달했다. 번역가로서 정점에 선 황석희는 어느새 강 너머 비옥한 곳의 또 다른 정상도 내려다보이는 더 높은 조망을 갖게 됐다. 애플TV+의 〈파친코〉에 한국어 대사 각색으로 참여했다. 비슷한 일이 이어지고 있다. 또 다른 커리어를 시작하게 될지도 모른다.
어떤 방식으로든 본질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세상이 거기에 있고 그는 번역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의 번역으로 어느 세상에 대해 더 잘 이해하게 된다.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를 잘 전달하는 사명과 특출한 능력을 타고나기도 한다.
 
번역은 피라미드 구조의 산업이다. 현재 꼭대기다. 처음엔 너부데데한 바닥에서 시작했을 거다.
정글이었다. 8년 걸렸다. 처음엔 잠도 못 자고 고되게 일하는데 페이가 너무 짰다. 6개월만 버텨보고 지금과 똑같으면 그만두겠다고 결심했다. 6개월이 지나고 나니 클라이언트도 바뀌고 좀 덜 착취당하는 일을 하고 있더라. 또 한 번 6개월을 더 해봤더니 또 조금 나아지고. 그렇게 2~3년 지나니까 한결 나았다. 그래서 그대로 꾸역꾸역 해보다 보니 지금이 되었다.
어느새 영화만 5백 편 넘게 번역했다. 일손이 빠른가?
케이블TV를 해봐서 빠르다. 케이블TV에서 영화는 이틀에 한 편을 해야 생계 유지가 가능하다. 극장 영화 번역은 작업 시간이 보통 2주 정도 주어진다. 케이블TV와 극장 영화는 단가의 격차도 크지만 작업 시간 차이도 크기 때문에 극장 영화 작업은 그만큼 공을 들일 수 있고, 공을 들이게 된다. 스스로의 기준에도 만족할 수 있는 완성도를 내기 위해 필요한 최소 작업 시간은 일주일인 것 같다.
어떻게 시작하게 된 일인지?
영어교육학을 전공했는데, 임용고시로부터 도망쳤다. 엉덩이 붙이고 앉아서 고시 공부를 할 성격도 아니고, 교생 실습에서 결정적으로 학을 뗐다. 여중으로 나갔는데 실습 기간 동안 살이 5kg 빠졌다. 번역은 처음엔 매뉴얼, 법률, 서신, 토플 답안지 등등 온갖 재미없는 것들부터였다. 너무 재미없어서 좀 나은 걸 찾다 보니 영상 번역이라는 것이 있어 해보게 됐다.
글 자체를 잘 다루는 것 같다. 신문 연재 중인 글만 봐도 그렇다.
개인적으로 잘 쓴 글에 대한 기준이 정말 높다. 주변에 글밥 먹는 사람들이 너무 많기도 하고. 그래서 내 글은 창피할 따름이다. 신문은 페이가 좋은 편이고 고정 소득이 되니까 쓰고 있지만 어디 내놓기 창피한 수준이다. 사실 에세이 책을 계약해 쓰고 있는데 몇 글자 쓰다 자괴감에 접고, 또 턱턱 막혀 접고 하다 보니 4년째 책이 나오질 못하고 있다.
아트하우스 영화, 블록버스터 영화 중 다음 작품을 고른다면?
무조건 들어온 순서대로다. 여태 한 번도 영화를 골라 받아본 적이 없었다.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여러 수입사(직배사 포함, 이하 생략)와 일하고 있다. 영화에 따라 페이 차이도 꽤 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조건 들어온 순서대로 한다. 원칙이 확실해야 거절할 때 불편하지 않고 거절당하는 쪽도 이해하기 쉽다. 개인적으로 영화에 대한 선호 자체도 둘 다 좋아해서 아무 쪽이든 상관없다.
꼭 번역해보고 싶은 감독은?
스티븐 스필버그. 너무 재미있다. 최근 것도, 예전 것도 모두. 내가 일하는 회사들과는 작품 계약이 없는 감독이지만 언젠가 한번은 해보고 싶다.
다시는 안 하고 싶은 감독은?
웨스 앤더슨. 정말 좋아하는 감독이다. 볼 때는 좋은데 번역은 또 다른 얘기다. 〈프렌치 디스패치〉를 번역했는데 너무 어려워서 다시는 안 하고 싶은 감독에 등극했다. 대사가 너무 현학적이다. 보통 사전을 자막 20개에 한 번 정도 보는데, 이 영화는 한 문장에 두 번씩 찾아야 하더라. 보통 영화의 자막 수가 1천3백~1천5백 개인데 이 영화는 2천9백 개였다. 어려운 말만 사용하면서 말까지 많으니….
다른 영화 분야 시네마 키드 출신들의 흔한 소명의식과는 관계없어 보인다.
영상 번역가들은 다 극장을 꿈꾼다. 극장 영화가 직업적 정점이다. 야구선수가 메이저리그 진출을 꿈꾸는 것과 같다. 더 나은 대우를 받으며 더 집중해 일할 수 있는 자리다.
다른 사람보다 사다리를 좀 더 빨리 올랐다.
시장 개척이 굉장히 빠른 편이다. 어떤 업체로 어느 일이 들어가고, 페이가 어느 선이고 자리가 있고 없고 등 정보 수집 능력이 좋았다. 남들보다 철면피인 것 같다. 극장 영화를 작업하게 되기까지 국내의 영화 수입사란 수입사는 최소 한 번 이상 다 전화해봤다. 처음 하게 된 극장 영화는 〈선샤인 클리닝〉이라는 제목이다. 에이미 애덤스 등 지금 와서 보면 슈퍼 캐스팅인데, 아무튼 당시엔 형식적으로 개봉하는 작은 영화였다. 수입사에는 그런 영화들이 왕왕 있어서 초저가에 번역 자막을 작업해 짧게 개봉하고 내리기도 했다.
그렇게 극장 영화 이너서클에 들어가게 된 건가?
아니. 그런 걸로는 당연히 못 들어간다. 원래 케이블TV 번역가는 영화계로 못 올라간다. 그런 사다리는 없다. 원래 안 되는 거니까 영화 일이 다시 들어오지 않아서 좌절한다는 것조차 없었다. 한 번 했으면 충분하기도 했다. 당시 영화 쪽에서나 몰라보지, 케이블TV 쪽에서는 입지가 다져져 있었으니 좌절할 이유가 정말 없었다. 〈왕좌의 게임〉 〈뉴스룸〉 〈NCIS〉 시리즈 등 각 채널에서 에이스로 미는 드라마를 번역하고 있던 때여서 하던 일 쭉 하고 소원은 풀었다고 만족했다. 20만원짜리 로또에 당첨된 것 정도인 거다. 당첨돼서 좋으니까 기분 한번 내고 소고기 한번 먹고 그냥 또 원래 하던 대로 출근하는 이런 거다. 실제로 그 영화사에서도 일이 이어지지 않았고, 이후 4년 동안 영화 일은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다 다시 극장 영화로 경로가 틀어진 계기가 있었던 건가?
2013년에 〈웜 바디스〉라는 영화를 번역하게 됐다. 우연히도 첫 영화와 같은 수입사였는데, 그쪽에선 처음이라고 믿고 나에게 의뢰했다. 정말 〈선샤인 클리닝〉은 기억도 못했던 거다. 이곳에도 포트폴리오를 보내놨었는데, 작업 목록 중 드라마 〈뉴스룸〉 번역이 좋았던 것을 담당자가 기억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황석희를 써보자’가 됐고, 나는 마침 〈웜 바디스〉를 꼭 하고 싶던 차여서 두 번째 영화 작업이 성사됐다.
〈웜 바디스〉는 잘된 영화였다. 그 이후로는 일이 이어졌던 모양인데.
〈50/50〉도 그렇고 〈롱 샷〉도 그렇고 조나단 레빈 감독 코드가 미국식 개그인데, 희한하게 한국 정서와 잘 맞는다. 한국어 번역으로 살릴 여지가 많다 보니 자막을 재밌게 본 분이 많았다. 작은 좀비 영화인데 의외로 대중적이고 재미있어서 1백만 명 넘는 흥행 성적을 기록했다. 이쯤 되니 이래저래 일이 이어지고 찾는 사람이 생기더라. 영화를 본 사람이 거의 없었다면 이 또한 없던 경력이 돼버렸겠지.
이제 엔딩 크레디트에서 ‘번역: 황석희’ 자막을 자주 만나게 됐다.
틈 없이 영화가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 나만 유독 작업을 엄청 많이 해서 ‘번역: 황석희’를 자주 보는 건 아니다. 수입사마다 방침이 다른데, 공교롭게도 내가 일하는 수입사들 중 번역가 크레디트를 넣어주는 곳이 있는 거다. 그래서 영화를 다 황석희가 번역한다는 착시가 일어나는 거다. 그리고 또 하나 흔한 오해. 나는 MCU(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영화를 단 한 편도 해본 적이 없다. 〈데드풀〉 〈엑스맨〉 〈스파이더맨〉 모두 다른 회사 소속이었다.
자막이 영화 팬덤에 분란을 일으키기도 한다. 가장 흔한 게 오역 논란이다.
한국은 전 세계에서 자막에 가장 예민하고 민감하게 반응하는 나라다.
언어 뒤 문화의 차이를 어떻게 옮겨놓는지가 과거 번역의 문제였다면 이제 장르 문화까지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요즘은 하나의 콘텐츠가 영화, 만화, 게임, 소설, 웹툰 등 모든 플랫폼 사이를 건너뛴다. 나는 그런 것들을 다 좋아한다. 성향이 원래 좀 ‘덕후’다. 아이가 생기다 보니 예전처럼 하지는 못하지만 아무튼 현직 덕후들과 눈높이 차이가 크지 않다. 이를테면 〈언차티드〉 같은 게임 원작 영화는 당연히 게임을 해본다. 게임 팬들이 영화화된 결과물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다. 앞으로 게임 원작 영화가 굉장히 많아지는 추세라 게임기 두 대를 장만했다. 플레이스테이션과 엑스박스인데, 판매 시간이 돼서 눌러봤더니 주문창이 뜨기에 샀다. 구하기 어렵다던데 운이 좋았던 모양이다.(두 게임기 모두 굉장한 품귀 현상을 겪고 있다.)
집에 두고 온 맥북이 느려져서 바꿔야 할 것 같다. 얼마 전 새로 나온 맥북을 사면 될까? (굉장히 행복한 표정으로 친절하고 전문적인 설명을 알아듣기 쉽지만 매우 길게 해주기 시작했다.) 덕후인지 던져본 떡밥이었다. 오늘 평소 사용하는 애착 도구로 가져와준 키보드도 덕질 장르인가?
기계식 키보드들인데, 키보드는 감히 덕질까지는 아닌 것 같다. 진짜 덕질은 이렇게 어중간하지 않다. 이 정도 수준도 덕질이라고 한다면 나는 다양한 덕질을 하고 있는 셈이다. IT 기기는 골고루 좋아한다. 하지만 진짜 내 장르는 음악이다. 버스킹도 오랫동안 나갔었고 기타, 앰프, 이펙터 잔뜩 있다. 아이가 자라는 동안 모든 장르를 참았는데 음악에 대한 애정만은 멈춰지지 않았다.
디지털 포맷에 익숙한 것은 번역가로서 유리한 면이다. 아날로그 시대 자막의 터부를 깨기도 한다. 〈스파이더맨: 홈커밍〉에서 주먹과 고양이 이모지를 사용하고, 〈데드풀 2〉에서는 “씨호박” 같은 충격적인 자막 플레이를 창안했다.
원래 자막에서 줄 수 있는 형태 변화는 글자를 기울이는 ‘이탤릭’ 정도였다. 필름이 디지털화되는 동안에도 자막은 여전히 아날로그 시대 두 줄 규격 그대로다. 제약을 벗어날 방법을 고민하는 때가 많다. 이모지나 “씨호박” 같은 경우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는데 구현이 되는지 알아봤더니 된다고 하더라. 대사에 셰익스피어 같은 고어(古語)가 막 나온다? 그 부분은 자막 서체가 고풍스럽게 명조 같은 세리프로 바뀌면 효과적으로 전달되지 않을까? 이것도 알아봤더니 또 된다고 하더라. 자막 얹는 걸 해외에서 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별도로 전달해서 조금 더 손이 가면 되는 거다.
황석희표 자막의 특징을 만드는 건가?
새로운 시도에 대한 고민이 많다. 하지만 아무 영화에서나 튀는 시도를 위한 쇼를 하진 않는다. 그럴 여지가 있는 영화들이 있다.
황석희 자막의 가장 큰 특징은 사실 ‘센스 있음’이다. ‘초월 번역’에 대한 칭송도 그래서 많다.
관객들이 기발하다, 재미있다 하는 것들은 대개 짧게 스친 영감이다. 그래서 얻어 걸린 운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영화 자막이 사실 이유를 알 수 없게 경직돼 있고 근엄했다. 국제 규약이나 자막 규칙이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고, 있다 해도 디지털로 넘어온 지도 이미 10년이 훌쩍 지났는데 그대로다. 나는 ‘근본이 없는’ 사람이라 그런지 왜 그렇게 딱딱하게만 해야 하는지 모르겠더라. 수입사에서 “너무 이상해요. 그냥 평범하게 해주세요”라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던 게 너무 감사하다. 수입사에서 재미있게 받아준 덕분에 아이디어를 구현해봤고, 그게 마케팅적으로 이야깃거리가 되었고 영화의 재미도 더해줘서 흥행에 도움이 됐다.
황석희표 자막의 또 다른 특징을 꼽는다면?
내 이미지가 욕설 번역도 많이 쓰는 번역가라 그런지 이 얘길 들으면 많이들 놀라는데 “병신”이라는 욕을 단 한 번도 쓰지 않았다.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최근에 PC함에 대한 생각을 할 텐데, 아무튼 나는 PC함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내가 생각하는 건전함을 지키려고 한다. 약자, 소수자에 대한 표현은 신중할 필요가 있다. 남녀가 대화할 때 존대와 하대를 어떻게 쓸지도 원칙을 정해놓고 결정한다. 옛날 번역처럼 특이하게 남자는 하대하고 여자는 존대하는 캐릭터 설정이 아니라면 상호 존대하거나 상호 하대하는 것을 디폴트로 두고 있다.
번역가로서의 사회적 책임감인가?
그게 자연스럽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요즘도 아이들 더빙 애니메이션에 아빠 혼자 하대하고 엄마는 존대하는 번역이 있는데 무척 어색하고 이상하다. 현실과 맞지 않는 번역인 거다.
번역가로서 OTT가 숱하게 론칭하며 생긴 변화는?
양질의 일자리가 훨씬 많아졌다. 서비스 론칭 때마다 일감이 쏟아지다 보니 번역가에 대한 대우가 많이 향상됐다. 업체 간 출혈 경쟁으로 무너져가던 업계였는데 OTT 서비스가 생겨나며 숨통이 트였다. 번역가와 OTT사가 직접 계약하거나, 아니면 해외 벤더를 거치니까 전처럼 번역 단가를 무작정 낮출 수 없게 됐다.
애플TV+ 〈파친코〉 작업을 했는데 자막 번역이 아니라 대본 각색이었다.
OTT, 팬데믹 두 가지 변화로 생긴 기회가 희한하게 튀었다고 할 수 있다. 아는 영화 PD님이 소개해준 일인데, 처음엔 단순히 영어로 쓰인 대본을 한국어로 번역하는 일이었다. 사실 이미 번역은 돼 있었는데 배우가 연기할 수 있는 대본 상태가 아니었다. “그는 밥을 먹었니?” 같은 느낌이었다. 내가 처음인 것도 아니었다. 의외로 적임자를 못 찾아냈던 것이다.
실제론 시대 배경에 다양한 지역의 사투리까지 더해져 난이도가 무척 높았다.
일단 영어로 된 대본을 한국어로 번역한다. 이걸 다시 다른 번역가가 영어로 직역을 해서 각본가이자 총괄제작자인 수 휴에게 보낸다. 그가 자기가 써놓은 것과 같은 의미가 됐는지 보면서 또 다시 코멘트를 달아서 돌려 보낸다. 나는 그럼 또 수정 번역. 이게 수십 번 반복됐다. 이 작업이 재미있었다고 하면, 변태 같지. 처음 예상보다 방대한 작업이 기간까지 엄청 확장됐기 때문에 평소 하던 영화 작업도 놓을 수 없어서 너무 힘들었다. 2020년 8월부터 작업이 들어갔는데 후시 녹음까지 한 일 년 반을 보냈다. 나중에는 지역별 사투리 전문가도 붙었고, 그럼 대본을 다 고치고 전에 했던 수정 작업을 똑같이 계속 반복하는 거다. 사투리 전문가 외에도 역사 고증팀도 있었고, 대본 버전이 계속 업데이트되는 게 감당이 안 되던 시점에는 대본 정리 담당자까지 붙여주더라. 역시 애플이라 그런지, 작업 기간과 강도가 올라간 만큼 페이도 중간에 점점 늘어나는 게 놀라웠다. 이런 회사 처음 봤다. 한국 정글이었다면 아마 계약 잘못한 자책만 하고 있었을 거다.
〈파친코〉는 명백한 여성 서사다. 남성으로서 한계를 느낀 순간도 있었나?
프로젝트 자체가 연출자를 구할 때도 여성 감독을 꽤 접촉한 걸로 알고 있다. 번역가도 마찬가지였을 거다. 번역은 번역가의 경험이라는 필터를 거치기 때문에 여성 정체성이라는 필터를 거쳐 나온 번역은 분명 내 것과는 많이 다를 것이라 생각한다. 어쩌면 피해의식에 사로잡힌 번역이 나왔을 수도 있다. 나 또한 최대한 투명한, 성중립적인 번역을 하려 노력하지만 그러지 못하는 부분들이 분명 있다. 하지만 각본가 수 휴가 여성이다. 남성 번역가가 가진 한계가 올 때마다 알려줬다. 정확한 표현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건 남성주의적인 시각이야”라고 하는 대신 “여성들은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아” 라고 코멘트를 보냈다. 여성 번역가였을 때와 남성 번역가였을 때, 장단점이 있는 것 같다.
이제 각색가라는 새로운 직업이 생긴 셈인가?
직업의 가능성이 아주 크게 확장된 것은 사실이다. 완성된 드라마의 자막이 아니라 배우들이 발화하는 그 대사를 내가 만든 것이니까 이제까지 해온 것과는 정반대 방향의 번역이다. 일회성으로, 너무 특이한 경험으로 끝나겠지 생각했는데 신기할 정도로 그 비슷한 의뢰가 계속 들어오고 있다. 각색, 윤색 일들이 많다. 활동 영역이 확장되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앞으로도 AI가 빼앗을 수 없는 일의 분야를 늘려놓는 것은 괜찮은 선택일 것이다. 번역은 AI로 대체될 첫 번째 분야로 꼽힌다.
의학, 법률, 건설, 자동차 등 전문 번역에선 AI가 많은 부분을 잠식했다. 영화나 드라마 등 구어 번역에서도 AI가 꽤 번역에 도움이 되고 있다. 번역 회사들이 개발한 번역 AI들이 번역가의 업무를 덜어간 만큼 번역가의 페이가 줄어들고 있다는 의미다. 이런 시기일수록 부티크 시장을 구축해 거기 들어가 있어야 살아남는다. 많은 것들이 달라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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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글과 진행/ 이해림
    에디터/ 박의령
    스타일리스트/ 고지혁
    헤어/ 도희
    메이크업/ 이주희
    디지털 디자인/ GRAFIKS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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