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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도 셋도 넷도 없는 예수정

배우 예수정의 독보적인 존재감은 그의 외형에도 기인하지만 창작에 대한 깊은 이해와 존중, 연기가 무언가 바꿀 수 있다는 힘을 믿는 것으로부터 뿜어져 나온다.

BYBAZAAR2020.08.17
재킷은 Dior. 귀고리는 Cos. 반지는 Jem & Pebbles.

재킷은 Dior. 귀고리는 Cos. 반지는 Jem & Pebbles.

69세의 ‘효정’은 병원에 입원했다가 남자 간호조무사에게 성폭행을 당한다. 영화 〈69세〉를 설명하는 한 줄이다. 각오를 굳히고 눈을 질끈 감고 보다가 크레딧이 다 올라가고 나서는 알았다. 짧은 보폭이라도 떨치고 나아가는 한 사람을 그리는 영화라는 걸. 자극적인 장면은 없다. 손목에 남은 멍과 수영장 위에 떠 있는 힘없는 육체로 치유받기 힘든 충격을 대신한다. 효정은 자는 아기를 깨우지 않으려는 사람처럼 살금살금 목소리를 낮추고 ‘젊은이 뺨치는’ 가느다란 몸을 풍경 속에 숨긴다. 먹먹하리만큼 담담한 영화의 호흡을 구성하는 건 예수정 배우라서, 아니 다른 누가 할 수 있었을까? “보이스피싱이 다들 그렇지 않나요?(웃음) 우리 나이대 사람들은 독립영화를 불편해해요. 나같이 철없는 사람이 해야지. 철없다는 의미에서 유일했을 거예요.”
 
‘낚였다’고 웃었지만 그는 스스로 작은 사명을 안았다. 노년의 이야기는 어딘가 자연스럽지 못한 구석이 있다. 노인이 사랑을! 노인의 도전이! 그들의 삶이 시간을 오래 먹었다는 이유만으로 떠들썩해진다.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 독특하면서도 오히려 현실감이 느껴졌어요. 노인들이 정말 저렇게 산다고? 의문이 드는 낯선 장면을 많이 봐왔거든요. 우리 곁에 있는 엄마, 이모, 할머니들의 안을 들여다보기 힘들지 않나요? 그 연세가 되면 현실 속에서 잘 감추고 살아요. 이 작품은 그 감춰진 것을 차분하게 드러내요.”
 
드레스는 Minjukim.

드레스는 Minjukim.

“극장은 시민을 계몽하는 공간이다”라는 극작가 브레히트의 문장에 이끌려 독일로 유학을 떠난 그에게 지금 시대에 꼭 필요한 이야기인 〈69세〉가 이상과 현실의 합치처럼 느껴졌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유학은 보이스피싱이 아니라 ‘글자피싱’ 당해서 갔어요.(웃음) 내 평생 피싱당한 문장입니다. 계몽이라는 말 자체가 오해가 있을 수 있는데 73학번인 그때는 계몽이라는 단어가 아침에 먹는 국밥처럼 몸을 후끈하게 해주었어요. 계몽의 해석을 시대에 맞춰 해볼게요. 살면서 항상 ‘아! 한 걸음만, 아니 반 걸음만이라도 나아갔으면’ 하는 마음. 억압으로부터의 해방과 자유를 지향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음지에서 침묵하다 비로소 움직이는 효정의 행동이 누군가에게 메시지를 줄 수 있겠죠.”
 
피해를 부정당하는 효정은 억울함에 통곡하지도, 소리 높여 호소하지도 않는다. 상대를 철저히 파멸시키려는 복수심에 불타는 일도 없다. 다만 자신의 선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사이다는 아니지만 목을 축이는 한 움큼의 샘물 같다. 다시금 물을 찾을 채비를 할 수 있게 하는. “관객들이 만든 사람의 생각보다 훨씬 더 다양한 보석을 찾아갔으면 해요. 우연히 아무것도 아닌 장면에서 무언가를 받아 갈 때가 있잖아요. 굳이 주제와 상관없이 그저 빨래를 너는 장면에서 비추는 햇빛의 은총에 감명받는다든지요.”
 
드레스는 Minjukim.

드레스는 Minjukim.

인터뷰를 마친 예수정 배우는 떠오르는 젊은 디자이너의 풍성한 드레스를 입었다. 영 어색하다면서도 옷을 갈아입는 대신 메이크업 아티스트에게 이런 주문을 했다. “아이라인 말고 푸른색 아이섀도를 눈두덩에 넓게 발라보면 어떨까요? 한쪽만 해도 괜찮을 거 같은데. 얼마 전 피카소 그림에서 본 것처럼.”
 
“괜찮으시겠어요?” 말을 꺼내진 않았지만 흔들리는 내 눈동자를 읽은 예수정 배우는 호쾌하게 말했다. “노는 거니까.” 추억의 만화 〈요괴인간 벰베라베로〉를 아냐고 물으며 마치 자신이 그 속의 ‘베라’가 된 것 같다며 콧노래를 불렀다. 머리를 높이 묶고 맨발이 된 그는 처음 보는 모습이 되어 촬영장 안으로 유유히 걸어 들어갔다.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 독특하면서도 오히려 현실감이 느껴졌어요. 노인들이 정말 저렇게 산다고? 의문이 드는 낯선 장면을 많이 봐왔거든요. 우리 곁에 있는 엄마, 이모, 할머니들의 안을 들여다보기 힘들지 않나요? 그 연세가 되면 현실 속에서 잘 감추고 살아요. 이 작품은 그 감춰진 것을 차분하게 드러내요. -  예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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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 글/ 박의령(피처 에디터)
  • 사진/ 김영준
  • 스타일리스트/ 이경은
  • 헤어/ 한지선
  • 메이크업/ 홍현정
  • 웹디자이너/ 김유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