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가장 부산다운 공간, 도모헌에서 발견한 부산의 새 얼굴

맛있는 음식과 바다, 새로 들어선 쇼핑 스폿 말고. 오직 전시를 보기 위해 부산으로 향했다.

프로필 by 손안나 2025.10.31

부산


도모헌

무엇이든 자유롭게 도모하라.


도모헌에서 보이는 광안대교 풍경.

도모헌에서 보이는 광안대교 풍경.


 김중업이 건축하고 최욱이 리노베이션한 도모헌 건물.

김중업이 건축하고 최욱이 리노베이션한 도모헌 건물.


«슈타이들 북 컬처, 부산» 전시 전경.

«슈타이들 북 컬처, 부산» 전시 전경.


부산이 예술과 거리가 먼 도시라 생각한 적도 있었다. 먼저 천혜의 바다를 즐기느라 바빴다. 맛있는 음식과 양질의 숙소, 매번 새로 생기는 경관 좋은 공간과 쇼핑 스폿을 둘러보느라 시간이 모자랐다. 부산국제영화제는 매년 가면서도 부산의 미술관이나 문화 공간에 곁을 줄 생각을 못했다. 대략 15년 전 서울에도 드문 사진 전문 미술관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고은사진미술관을 찾았다. 부산에서 갤러리를 처음 방문한 기억이다. 그로부터 한참 후 연도의 중간 숫자가 바뀌고 나서야 부산의 미술관들을 돌아봤다. 와이어 공장을 개조한 F1963에 국제갤러리가 들어서고, 그에 응수하듯 30년의 세월을 지닌 부산 대표 갤러리 조현화랑이 서울에도 생기면서 자연스럽게 시선이 이동했다. 낙동강 하구 을숙도에 지어진 부산현대미술관이 인상적인 전시를 줄지어 세상에 내놓으면서 대대적인 리노베이션에 들어간 부산시립미슬관을 포함한 공공 미술관에 대한 관심도 자라났다. 페어인 아트부산이 시작되고 뮤지엄 원(Museum1)과 아르떼뮤지엄 같은 몰입형 전시장도 생겼다. 부산과 미술이라는 두 단어가 포개지는 와중에 나의 관심은 가장 부산다운 공간으로 쏠렸다.

군사정권 시절 대통령의 지방 숙소로, 이후 부산시장 공관으로 사용되던 관사를 복합문화공간으로 뒤바꾼 도모헌. 부산 시민들의 투표로 결정되었다는 이름은 얼마든지 도모하는 대로 이룰 수 있는 공간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열 명 이상의 시장이 거쳐가는 동안 폐쇄적이고 권위적으로 운영되다 40년 만에 전면 개방된 것이 2024년 9월. 개관 1주년을 맞은 도모헌은 벌써 30만 명 이상이 다녀갈 만큼 도시에 스며들었다.

정문을 거쳐 건물까지 짧지만 어엿한 산책로가 이어지고 숨이 조금 차오를 무렵 2층짜리 건물이 모습을 드러낸다. 1세대 건축가 김중업이 지은 특유의 붉은 벽돌 건물은 최대한 처음의 모습을 보존한 채 놓여 있다. 그 외에는 온통 정원. 1만 평이 넘는 생활 정원에는 커다란 느티나무와 작은 연못, 첫 야외 조각 작품인 정현의 <서 있는 사람>이 자리 잡고 있다. 그 너머로 광안대교와 부산 사람들의 터전이 굽이굽이 걸쳐 있다. 도모헌으로 바뀌면서 새로 생긴 풍경이다. 관사였던 시절에는 보안을 위해 빼곡히 나무를 둘렀고 근처에는 높은 건물도 세울 수 없었다. 바로 앞에 있는 MBC 건물의 한 벽면은 아직도 창문이 없다.

내부는 손님을 맞던 예전의 쓰임을 염두에 두어 입구부터 모든 공간이 한눈에 들어오도록 벽을 허물고 커다란 라운지를 만들었다. 원오원아키텍스의 최욱 건축가는 기본 골조가 되는 기둥을 최대한으로 남겨 김중업 건물의 가치를 보존하고자 하면서도 현대적인 시도를 곳곳에 녹여냈다. 새로 낸 커다란 창을 통해 소환되는 외경이 도모헌만의 분위기를 만든다. 건물의 끄트머리 회의실로 사용되던 공간에 들어선 모모스 커피에서 차를 사 2층에 올랐다.

2층은 1층과는 달리 원래 있던 공간들을 살려 각자에 어울리는 쓸모를 만들었다. 광안리의 풍경이 정면으로 보이는 안방은 컨퍼런스 룸이 되었고 평소에는 차를 마시며 휴식할 수 있는 공간으로 사용되고 있다. 서재로 사용되던 공간은 여전히 책을 읽을 수 있도록 했다. 증축한 공간은 계단식 강연장으로 쓰이고 있는데, 건축의 변주가 낳은 시간 차를 느낄 수 있다. 관사 시절부터 아름답기로 이름났던 돌담길은 감상에 적합하게 산책로로 정비되어 맞닿은 황령산의 경치까지 누릴 수 있다.

축구 경기장의 2.5배나 되는 공간은 반나절을 보내기에 충분하다. 그만큼 전시를 열기에도 많은 제약과 고민이 따르는 공간. 독일의 전설적인 출판인 게르하르트 슈타이들이 책과 함께하는 여정 «슈타이들 북 컬처, 부산»전은 적재적소다. 슈타이들이 공간을 직접 보고 세팅한 전시는 마치 거대한 타셴의 아트북을 펼쳐보는 기분에 빠지게 한다. 든든한 백과사전이 눈앞에 놓여 있다. 맘에 드는 페이지를 열면 섬세한 정보가 펼쳐진다. 1972년 피의 일요일이라 기억되는 날에 26세의 나이로 영국군이 아일랜드 민간인을 학살하는 장면을 찍은 사진가 질 페레스, 소설가 귄터 그라스의 빨간 양장본 더미, 폭발한 와인병의 잔여물을 마시고 “어서 와봐, 나 별을 마시고 있어”라는 말을 남긴 수도사 돔 피에르 페리뇽으로부터 시작된 칼 라거펠트의 프로젝트. 괘도(掛圖) 형태로 걸린 폭넓은 이야기들에 그저 발길 따라 닿으면 그만이다.

※ «슈타이들 북 컬처, 부산»은 12월 7일까지 열린다.

도모헌 부산시 수영구 황령산로7번길 60(남천동)


박의령은 컨트리뷰팅 에디터다. 어느새 부산에 가는 목적이 ‘전시’로 바뀌었다.

Credit

  • 글/ 박의령
  • 사진/ 김연제
  • 디자인/ 이예슬
  • 디지털 디자인/ GRAFIKS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