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STYLE
괴짜 소리꾼 이희문이 Tiny Desk에서 배운 것
변함없이 변화하는 젊은 장인들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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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퍼스 바자 경기민요 명창인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차근차근 소리꾼의 길로 들어선 줄 알았다. 알고 보니 뮤직비디오 조감독으로 일하다가 뒤늦게 전업을 한 경우라고.
이희문 스물일곱, 늦은 나이에 시작했다. 내 어머니가 활동할 당시에는 전통 예술을 하는 이유가 대부분 생계 때문이었다. 특히 노래를 하는 사람들의 사회적인 지위가 낮았고 소리꾼 하면 기생 취급 받던 시절이었다. 민요는 나에게 공기같이 자연스러운 것이었지만 내가 할 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다 어머니와 동문수학을 하셨던 이춘희 선생님을 만났는데 “너 소리 해보고 싶은 생각 없어?” 하고 물으셨다. 그전까지는 아무도 나에게 그런 질문을 한 적이 없었다. ‘내가 해도 되는 건가?’ 잔잔한 호수에 돌을 던진 것처럼 파문이 일었다. 바로 다음 날, 선생님 댁으로 찾아갔다.
하퍼스 바자 그 다음부터는 일사천리였나?
이희문 여자가 대다수인 경기민요판에 들어갔으니 처음엔 단지 내가 남자라는 이유만으로도 가점이 많았다. 그러나 점점 어머니에 대한 후광 아닌 후광 때문에 힘들어졌다. 내가 유학도 다녀왔고 스타일이 예사롭지 않으니까 말도 많이 나왔고 혼도 많이 났다. 여러 가지 일을 겪고 3년 정도 지났을 땐 그만둘 생각까지 했다. 그러다 안은미 선생님을 만났다. 국악 하는 젊은 친구들과 현대무용 하는 젊은 친구들을 모아서 작품을 만드는데, 오디션을 보겠냐고 하더라. 어디라도 피신하고 싶은 마음에, 경기민요판 아닌 곳에서 노래를 할 수 있다는 희망으로 합류했다. 지난 3년 동안 계속 혼났는데 안은미 선생님은 뭘 해도 잘했다고 칭찬을 해주니까 하나 할 거 열 개 하고 그랬다.
하퍼스 바자 스승 안은미가 평소에 어떤 조언을 해줬나?
이희문 “변화라는 건 언제나 모 아니면 도”라고 하셨다. 무대에서 뭘 보여주려면 ‘모 아니면 도’지 중간은 없다고. 그런데 그 말이 무슨 뜻인지 7년을 못 알아들었다. 나중에 매너리즘에 빠지게 된 시기가 있었는데 그때 선생님한테 무릎 꿇고 내 공연 연출을 부탁했다. 그랬더니 “돈 쓸 준비가 됐니?” 하시더라. “그렇게 찔끔 써가지고는 변화가 없다. 쓰려면 왕창 쓰든가 아예 안 쓰든가.” 그야말로 모 아니면 도였다. 그때까지 모은 1억원이라는 돈을 다 써서 공연을 만들었는데, 진짜 뭔가가 바뀌었다는 느낌이 들더라. 그게 2013년도였다. 그때부터 조금씩 알게 된 것 같다. 모 아니면 도라는 말이 무엇인지.
하퍼스 바자 가장 최근에 무대 위에서 ‘도’ 아닌 ‘모’가 된 순간은 언제였나?
이희문 해마다 나의 자전적 이야기를 담은 ‘강남 시리즈’라는 공연을 올리고 있다. 재작년에는 <강남 오아시스>, 올해는 <강남 무지개>라는 작품을 했다. 사실 내 이야기를 하면서 내가 치유를 받는 건데, 그걸 관객분들이 돈 내고 오셔서 들어주고 같이 이입하는 그 순간이 정말 특별하다. 그럴 때 가장 자유롭다.
하퍼스 바자 명창 어머니에 대한 유년 시절의 강렬한 기억이 있나?
이희문 나에게 민요라는 건 곧 어머니다. 소리 하러 가는 날은 화장대에서 곱게 화장을 하셨다. 어머니가 너무 예뻐서 화장하는 걸 계속 지켜보다가 어머니가 나가시면 어머니의 LP를 전축에 틀어놓고 계속 어머니를 느꼈던 기억이 난다. 말하자면 나는 어머니의 팬이었던 것 같다. 어머니 오타쿠.
하퍼스 바자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무기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이희문 소리의 DNA라는 게 있다. 어머니의 기술이라든가 스타일, 정서는 오로지 나만 물려받은 거니까 그게 나에게는 자신감의 근원이다. 다른 사람에게는 없는 오직 나만 갖고 있는 것이니까.
하퍼스 바자 경기민요만의 매력은 무엇인가?
이희문 경기민요는 한국 전통 음악계의 팝송이다. 화려하고, 경쾌하고, 신나는 음악이 많은데 찬찬히 가사를 들여다보면 희로애락이 다 담겨 있다. 그런 점에서 블랙코미디 같다는 생각도 한다. 슬퍼도 슬퍼하지 않고 웃으면서 노래하는 느낌이랄까.
하퍼스 바자 그런데 경기민요에 남성 소리꾼이 귀한 이유는 무엇인가?
이희문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과거에는 여자 소리꾼이 더 상품성이 있었다. 원래는 남자 소리꾼이 더 많았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에 일본의 게이샤 문화가 한국에 들어오며 권번이라는 기생 학교가 생겼다. 지금으로 치면 아이돌 기획사 같은 거다. 노래, 춤, 그림, 음악 등등을 가르쳐서 상품 가치가 있는 예능인을 배출해내는 게 그들의 목적이었다. 그러면서 점점 남자 소리꾼들이 쇠퇴하기 시작했다.
하퍼스 바자 지금은 어떤가?
이희문 지금은 그래도 남자 소리꾼이 많이 생겼다. 좋은 현상인가 싶기도 한데…. 나는 전통 음악도 하면서 다른 장르와 협업하는 등 투 트랙으로 음악을 해오고 있다. 그런데 주로 후자가 보여지다 보니까 젊은 후배들이 기본기를 등한시할까봐 우려되는 것도 사실이다. 기본을 충실히 닦아야 다른 장르와 작업할 때 팽팽하게 같이 갈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바로 서양 음악에 먹혀버린다. 민요 록밴드 씽씽으로 타이니 데스크에 출연하거나 해외 뮤직 페스티벌 무대에 섰을 때 쫄지 않을 수 있었던 것도 결국 기본기에 대한 자신감 덕분이었다고 생각한다. 전통 음악을 주도적으로 끌고 가려면 반드시 기본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하퍼스 바자 국악은 분명 우리 음악인데, 왜 이렇게 어렵게 느껴질까?
이희문 내 어머니가 활동하던 시대에는 국악이 친구 같은 존재였다면 지금은 선생님의 이미지다. 사실 인간문화재라는 게 일본에서 들여온 제도인데 우리나라에 적합하다고 볼 수는 없다. 예술이라는 게 소멸되는 거다. 그렇게 인간문화재는 신적인 존재가 되고 권력이 생기면서 점점 더 엄격해진다. 그런데 예술에 그런 게 어디 있나.
하퍼스 바자 어떻게 해야 국악에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을까?
이희문 나에게도 숙제 같은 건데, 사실 전통 예술을 하면서 가장 슬픈 건 이걸 알아봐주고 제대로 들을 줄 아는 ‘눈 명창’, ‘귀 명창’이 없다는 거다. 지금은 아이돌 시대라고 하지 않나. 아이돌 노래는 전부 꿰차고 있고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이 관심을 끈다. 그건 아이돌에 대한 귀 명창, 눈 명창이 된 것인데 국악에는 그런 게 없다. 전반적으로 문화의 다양성이 커져야 할 것 같다. 다양한 마니아 문화가 발달해서 여러 장르의 음악인이 함께 살아나갈 수 있는 시장이 되어야 한다. 그러려면 제도가 마련되어야 할 테고, 음악인들도 노력해야겠지. 지구력이 필요한 일이다.
하퍼스 바자 “전통이란 가장 트렌디한 것”이라고 말한 적 있다.
이희문 지금까지 남아 있는 전통은 당대에 유행하면서 대단한 힘을 가지고 버텨온 것들이다. 그렇게 본다면, 전통이란 건 끊임없이 회자되는 ‘ing’의 형태이지 과거에 박제되는 게 아닌 것이다.
하퍼스 바자 당신이 정의하는 장인정신은 무엇인가?
이희문 변화무쌍하되 핵은 변하지 않는 것. 그리고 지구력.
Credit
- 프리랜서 에디터/ 박의령
- 사진/ 이우정
- 헤어&메이크업/ 장하준
- 스타일리스트/ 이명선
- 세트 스타일리스트/ 김태양
- 어시스턴트/ 정지윤
- 디자인/ 이진미
- 디지털 디자인/ GRAFIKS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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