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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사랑 이야기

취약성을 드러내는 순간 잔잔한 수면 위로 드러나듯 시작되는 사랑을 그린 영화 <죽고 싶지만 사랑은 하고 싶어>.

프로필 by 안서경 2024.09.04
사랑에 빠지는 순간을 그리는 영화들을 떠올려보자. 첫 데이트의 간지러운 분위기와 설렘,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끊이지 않는 대화 같은 것들. <죽고 싶지만 사랑은 하고 싶어>는 전혀 다른 풍경을 내어놓는 로맨스 영화다. 어디에서든 외딴 섬 같은 사람들이 있다. 여느 회사원의 일상을 사는 프랜(데이지 리들리)은 누구에게도 속마음을 얘기하지 않는다. 입 안에 맴도는 말조차도 없다. 타인과의 소통에 대한 의지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퇴근 후 완벽히 고립된 집에서 와인 한 잔과 코티지치즈와 패티를 먹고 보드게임을 하고는 잠자리에 드는 모습은, 낡고 지친 휴지 같은 우리 일상과 다르지 않다. 오직 차이점은 프랜의 환영. 프랜은 매일 죽음을 생각한다. 그 이미지는 평온한 자연의 모습에 가깝다. 안개가 자욱한 아무도 없는 숲속 이끼 위에서 눈을 감고 있다거나 해변가 앞 고목에 널브러져 기대어 있는 것. 그런 일상에 균열을 내는 건 새로 입사한 로버트(데이브 메르헤예)의 존재. “당신에 대해 말해주세요. 어떤 곳에서 자랐어요? 조용한 걸 좋아하나요?” 낯설고 편하진 않지만, 점점 로버트가 좋아지는 프랜은 묻기만 하는 쪽이다. 그의 질문에 진실로 대답하지 않는다. 결국 프랜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해 궁금해하는 로버트에게, 프랜은 무엇 하나 말해주지 않은 채 지쳐가게 만들고 상처를 입히고야 만다. 두 사람 사이 긴 적막 끝에 프랜은 처음으로 용기를 낸다. “그런 생각을 종종 해요.” 하고. 가장 드러내기 싫은 내 모습을 고백할 때 그걸 감싸안아주는 광경은, 우리는 타인이 필요하다는 외침 같다. 제39회 선댄스영화제 US 드라마틱 경쟁부문 개막작으로 선정된 영화는 레이첼 램버트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다. 환영의 이미지로 초현실적인 설정이 등장하고, 시 같은 정서는 무엇보다 섬세하고 과묵하다. 이 영화는 타인과 관계 맺기보다는 고립이 편한 이들에게 작은 용기가 될지 모른다. 결국 우리는 사랑 앞에서 변화할 수 있을까? “사랑은 변형의 힘이다.” 시인 이성복의 말이 어쩐지 영화 말미에 맴돌았다.

※ 영화 <죽고 싶지만 사랑은 하고 싶어>는 9월 4일 개봉한다.

Credit

  • 사진/ 푸투라 서울, 디오시네마, CHS
  • 디자인/ 이진미
  • 디지털 디자인/ GRAFIKS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