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반클리프 아펠: 시간, 자연, 사랑>전, 시간의 미학을 발견하다

시대의 진폭 속에서 아름다움을 사유하던 반클리프 아펠.

프로필 by BAZAAR 2023.11.28
 
 
무언가를 창조해내는 이들은 일종의 사명감 같은 걸 지니게 된다. 시대의 진폭 속에서 자신만의 사유를 담아내는 것. 그것은 남겨지는 것과 사라지는 것, 고귀한 것과 쓸모없는 것을 나누는 기준이 된다. 한 세기에 걸쳐 탄생하고, 또 남겨진 반클리프 아펠의 주얼리와 워치, 그리고 고귀한 오브제가 한자리에 모였다. 2019년 밀라노에서 시작된 «반클리프 아펠: 시간, 자연, 사랑(Van Cleef & Arpels: Time, Nature, Love)» 전시가 상하이와 사우디아라비아를 거쳐 서울의 디뮤지엄(D Museum)에서 선보인다. 이번 전시는 귀하고 미적으로 가치 있는 작품을 진열하는 것에서 한 발짝 나아가 인류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가 무엇인지를 느끼게 한다. 이 전시만의 독특한 매력은 전시의 큐레이팅을 맡은 알바 카펠리에리(Alba Cappellieri)의 남다른 접근법에서 기인한다. 알바 카펠리에리는 이번 전시를 준비하며 이탈리아 작가인 이탈로 칼비노(Italo Calvino)의 강의록 <다음 천년기를 위한 여섯 가지 메모>에서 핵심적인 개념을 차용하여 메종 작품과의 연관성, 시간과의 관계를 해석했다. 그 속에서 다시 한 번 우리는 반클리프 아펠의 주얼리를 예술의 범주에서 해석하게 된다. 주얼리의 반짝임은 비단 시각적인 것에서 끝나지 않음을, 전시장 입구의 문턱을 넘는 순간 느끼게 될 것이다. 자, 이제 끌림으로 가득한 그 빛 속으로 들어가보자. 
 

Part.1  TIME

모든 작품은 자신만의 시간, 즉 시대를 대표할 때 가치와 의미를 지닌다. 시간은 창의력과 생산에 매우 중요한 요소다. 시간은 오브제의 미학을 빚어내고, 그 기능과 사회적 효용성을 결정하고, 스타일을 규정하며, 소재와 기술의 선택에 영향을 주고, 기원을 보여주고, 취향을 나누고, 무엇보다 탄생의 배경을 알려준다. 이탈로 칼비노가 남긴 강의록에 빗대어 정의한 반클리프 아펠의 시간과 가치.
 
테이블 클락(Table clock),1928년, 플래티넘·라피스라줄리·오닉스·락 크리스털·에나멜·다이아몬드, 반클리프 아펠(Van Cleef & Arpels) 컬렉션.

테이블 클락(Table clock),1928년, 플래티넘·라피스라줄리·오닉스·락 크리스털·에나멜·다이아몬드, 반클리프 아펠(Van Cleef & Arpels) 컬렉션.

와일드 로즈 미노디에르(Wild Rose Minaudi`ere), 1938년, 옐로 골드· 미스터리 세팅 루비·루비, 반클리프 아펠(Van Cleef & Arpels) 컬렉션

와일드 로즈 미노디에르(Wild Rose Minaudi`ere), 1938년, 옐로 골드· 미스터리 세팅 루비·루비, 반클리프 아펠(Van Cleef & Arpels) 컬렉션

 
다양성 Multiplicity
단일한 목소리로 이야기하지만 다양한 차원에서 해석할 수 있는 것이야말로 다양성의 본질을 꿰뚫는 요소다. 이 작품은 1920년대에 선보였던 배니티 케이스의 변형으로, 실용적인 오브제와 액세서리로서의 화려함을 적당히 버무려내고 있다. 파우더 콤팩트, 미스터리 세팅의 루비를 상단에 더한 작은 박스 2개, 립스틱 케이스 1개, 노트, 라이터, 빗과 같은 다양한 소지품을 보관하도록 제작되었다. 이러한 혁신적인 디자인을 통해 그 당시 여성들은 소설책보다 크지 않은 세련된 박스에 필수적인 액세서리를 간편하게 휴대할 수 있었다.
 
브로치, 1936년, 플래티넘·옐로 골드·화이트 골드· 미스터리 세팅 루비·다이아몬드, 반클리프 아펠(Van Cleef & Arpels) 컬렉션

브로치, 1936년, 플래티넘·옐로 골드·화이트 골드· 미스터리 세팅 루비·다이아몬드, 반클리프 아펠(Van Cleef & Arpels) 컬렉션

 
정밀성 Exactitude
이탈로 칼비노가 이야기하는 정밀성은 ‘정밀하게 정의되고 잘 계산된 작품의 설계’, ‘분명하고 예리하고 기억에 남을 만한 가시적 이미지들의 환기’, ‘가능하다면 사전처럼 그리고 생각과 이미지의 풍부한 명암처럼 정확한 언어’ 세 가지를 뜻한다. 그 의미를 함축한 브로치가 바로 이 작품이다. 이 브로치는 완만한 곡선의 다이아몬드 세팅 잎사귀와 미스터리 세팅 루비로 장식된 잎사귀가 정교하게 중첩되어 있다. 반클리프 아펠만의 미스터리 세팅 기법이 더욱 풍성한 볼륨을 갖춘 구상적인 모티프로 등장한 최초의 작품으로 메종의 역사에서 정점을 찍은 걸작으로 손꼽힌다.  
 
칼라렛(Collaret), 1939년, 플래티넘·다이아몬드,이집트 나즐리 여왕이 이전에 소장했던 컬렉션

칼라렛(Collaret), 1939년, 플래티넘·다이아몬드,이집트 나즐리 여왕이 이전에 소장했던 컬렉션

 
가벼움 Lightness
이탈로 칼비노는 단테, 셰익스피어, 레오파르디, 카프카, 쿤데라처럼 현대 인간에게나 작가에게 가벼움은 결함이 아니라 오히려 추구해야 할 가치라고 여겼다. 삶은 무겁고 권태롭고 불확실하지만 가벼움이 그 무게를 덜어준다는 그의 철학과 일맥상통하는 아르데코 스타일의 네크리스 칼라렛. 이 네크리스는 1939년 이집트의 나즐리 여왕이 자신의 딸인 이집트 포지아 공주와 이란 모하마드 레자 팔레비 왕자의 결혼식을 위해 반클리프 아펠에 의뢰한 것이다. 총 204.03캐럿에 이르는 6백73개의 다이아몬드로 제작된 걸작으로 프레셔스 스톤의 방대한 개수에도 불구하고 시각적인 가벼움이 느껴진다.

 
플랩 커버의 루도 시크릿(Ludo Secret) 워치, 1949년, 옐로 골드·플래티넘· 미스터리 세팅 루비·다이아몬드, 반클리프 아펠(Van Cleef & Arpels) 컬렉션

플랩 커버의 루도 시크릿(Ludo Secret) 워치, 1949년, 옐로 골드·플래티넘· 미스터리 세팅 루비·다이아몬드, 반클리프 아펠(Van Cleef & Arpels) 컬렉션

 
기민함 Quickness
아주 오래된 라틴어 문장 중에 “천천히 서두르라(Festina Iente)”는 말이 있다. 이탈로 칼비노가 말하는 <다음 천년기를 위한 여섯 가지 메모> 속 기민함 역시 시간에 대항하는 질주가 아니라 시간을 영리하게 분배하게 하는 기술이다. 루도 시크릿 워치는 루이 아펠(Louis Arpels)의 아명인 ‘루도’에서 따온 이름으로, 마치 가죽 벨트처럼 유연한 골드 블릭 링크 밴드가 특징이다. ‘시크릿 워치’라는 이름답게 두 개의 스프링이 장착된 플랩 아래에는 직사각형의 다이얼이 숨겨져 있다. 사파이어가 장식된 두 개의 라운드 아치를 누르면 플랩이 열리면서 다이얼이 등장한다. 때문에 착용자의 미세한 동작을 통해 하루 중 어느 때라도 기민하게 시간을 확인할 수 있다.

 
지프(Zip) 네크리스, 1951년, 옐로 골드·로즈골드· 루비·다이아몬드, 반클리프 아펠(Van Cleef & Arpels) 컬렉션

지프(Zip) 네크리스, 1951년, 옐로 골드·로즈골드· 루비·다이아몬드, 반클리프 아펠(Van Cleef & Arpels) 컬렉션

 
서로 다른 예술 분야의 교차점, 쿠튀르 Couture
반클리프 아펠은 한 세기가 넘는 역사 동안 다양한 소재, 형태, 분야로부터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있다. 이를 위해 무용, 패션, 건축 등의 분야에서 메종이 마주한 교차점은 새로운 영감이 되어 아이코닉한 명작을 탄생시켰다. 그 중 지프 네크리스는 역사상 가장 아방가르드한 작품으로 손꼽힌다. 1930년대 원래 해군과 공군 제복에 사용되던 지퍼를 디자이너 엘사 스키아파렐리(Elsa Schiaparelli)가 상류층 패션에 도입했다. 이에 깊은 영감을 받은 메종의 아티스틱 디렉터이자 설립자 부부의 딸인 르네 퓌상(Ren´ee Puissant)은 지퍼라는 기능적인 요소를 주얼리 작품으로 거듭나도록 구상했다. 지프 네크리스는 실제 지퍼처럼, 맞물려 있는 열을 따라 태슬 부분을 밀어 이동시키는 간단한 방식을 통해 브레이슬릿으로 변형된다.

 
개선문(Arc de Triomphe) 파우더 케이스, 1945년, 옐로 골드·에메랄드· 루비·다이아몬드, 반클리프 아펠(Van Cleef & Arpels) 컬렉션

개선문(Arc de Triomphe) 파우더 케이스, 1945년, 옐로 골드·에메랄드· 루비·다이아몬드, 반클리프 아펠(Van Cleef & Arpels) 컬렉션

 
파리 Paris
20세기 초 파리는 도시 그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예술과 미학이 풍성하게 타오르던 그곳에 대한 메종의 경의를 담아 파리의 상징적인 장소를 모티프로 한 클립, 참 브레이슬릿 및 고귀한 오브제와 같은 작품을 탄생시켰다. 그 중 하나가 이 개선문이 새겨진 파우더 케이스다. 옐로 골드 커버에 양각 기법과 프레셔스 스톤 세팅을 더해 표현했는데, 스타일이 돋보이는 두 명의 인물이 개선문 거리를 따라 거닐고 있다. 세심하게 구현된 개선문은 전쟁 후 새롭게 거듭나 탄생한 평화와 삶의 환희를 상징적으로 품고 있다.

 
버드(Bird) 클립 & 발스카(Walska) 펜던트, 1971-1972년, 옐로 골드·에메랄드·사파이어·화이트 다이아몬드, 반클리프 아펠(Van Cleef & Arpels) 컬렉션

버드(Bird) 클립 & 발스카(Walska) 펜던트, 1971-1972년, 옐로 골드·에메랄드·사파이어·화이트 다이아몬드, 반클리프 아펠(Van Cleef & Arpels) 컬렉션

 
시각적 구현 Visibility
현대사회는 넘쳐나는 시각적 이미지의 인플레이션을 겪고 있다. 이 와중에 훌륭한 창조자는 기존의 이미지를 새로운 맥락 안에 삽입시켜 다른 의미를 만들어낸다. 반클리프 아펠의 역사상 가장 특별했던 주문 중 하나는 오페라 가수 가나 발스카가 요청한 새 모티프 펜던트다. 96.62캐럿의 브리올레트 컷 옐로 다이아몬드를 세팅하여 장엄하게 날아가는 새 이미지를 구현한 작품으로 이후 1971년 소더비 경매에 출품되었다. 새로운 소유자는 메종에게 기존의 젬스톤에 옐로 골드, 에메랄드, 사파이어, 다이아몬드를 더한 디자인을 요청했다. 이 작품은 메종이 추구하는 변형 가능한 작품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새는 1930년대에 탄생했던 그대로 귀고리와 브로치로 변형 가능하고, 장엄한 자태의 옐로 다이아몬드를 분리하여 펜던트로 착용할 수 있다.

 
※ «반클리프 아펠: 시간, 자연, 사랑(Van Cleef & Arpels: Time, Nature, Love)» 전시는 디뮤지엄(D Museum)에서 2023년 11월 18일부터 2024년 4월 14일까지 열린다. 
 
김민정은 프리랜스 에디터다. 패션 산업과 예술의 폭발적인 화학작용을 관찰하고 기록하는 것을 업으로 삼고 있다. 
 
 
 

Credit

  • 글/ 김민정
  • 사진/ ⓒ 반클리프 아펠
  • 디지털 디자인/ GRAFIKS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