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퍼 디테일 스커트수트, 화이트 셔츠는 모두 Alexander McQueen.
요즘 많은 것들이 처음이라 긴장의 연속이에요. 〈마스크걸〉 촬영 때보다 걱정을 더 많이 했어요. 말을 수려하게 하지도 못하고 혹시 실수라도 할까봐. 방금 전까지 울렁거렸는데 저와 작품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감사한 기회이니 잘해보려고요.
연기와 상관없는 학부를 다녔어요. 당장이라도 휴학하고 연기를 할까 생각한 적도 있지만 공부도 내 선택지니 잘 마쳐야겠다 싶더라고요. 졸업하고 고향에 내려가 돈을 벌어 다시 서울로 올라왔어요. 본격적으로 연기를 하겠다고 마음먹고 단편영화에 출연하기 시작한 게 20대가 끝나갈 무렵이었어요.
연기를 꼭 해야겠다는 결심이 선 순간을 기억해요?
어릴 때부터 이야기를 읽고 보는 게 좋았어요. 이 글을 쓴 사람은 어떤 생각으로 이야기를 쓴 걸까, 등장인물은 왜 이런 선택을 했을까? 흥미와 호기심을 느꼈죠. 배우가 되겠다는 생각은 못했고 나를 보여주고 내가 투영된 작업물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은 있었어요. 미대 입시를 준비해서 디자인을 전공했는데 막상 이 일을 평생 하면 행복할까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질문하게 되더라고요. 그럴 때 한 연극을 봤어요. 아무 장치도 없는 무대에서 배우가 혼자 두세 시간을 연기하는데 극장이 너무 작아서 침 튀는 것까지 다 보일 정도로 가까웠거든요. 그때 뭔가 충격을 받았던 것 같아요.
주변에 연기하는 친구가 거의 없어서 정작 내가 어디 가서 연기할 수 있는지도 잘 몰랐어요. ‘필름 메이커스’라는 사이트에 올라오는 작품에 지원해서 연기를 시작했는데 대사 있는 역할 자체가 좀 적었고요. 이미지나 느낌만으로 채우는 일에서 학생들 졸업 작품을 하면서 비로소 제대로 현장을 경험했어요. 연기를 한다는 사실도 기뻤지만 현장이라는 그 공간이 되게 좋았던 것 같아요. 영화를 사랑하고 작품을 만들어내겠다는 사람들의 기운이나 동질감을 처음 느껴봤거든요.
〈마스크걸〉의 모미 역할을 하기까지 무수한 오디션 과정을 거친 걸로 알고 있어요.
제가 여기저기 돌려놓은 프로필을 보고 연락을 주셨더라고요. 독백이나 자유 연기 영상을 차례차례 찍어 보내는 동안 잊을 만하면 연락이 왔어요. 상업 작품 오디션이 처음이라 어떻게 진행되는지, 어떤 역할인지도 몰랐거든요. 몇 번의 대면 오디션을 거쳐서 감독님을 만났는데 그게 끝이 아니었어요.(웃음) 감독님께서 여부는 확답할 수 없지만 마지막으로 합을 맞춰볼 시간을 가져도 되겠냐고 해서 아르바이트하던 빵집을 그만두고 오디션에 매진했어요. 4개월이 걸렸어요.
오디션에 합격하고 가장 먼저 무슨 생각을 했나요?
막상 같이 하자는 말을 들었을 때는 머리가 차가워지면서 정리가 되더라고요. 너무 기쁘고 쾌재를 부르고 싶은 마음보다는 앞으로의 과정이 떠오르고 모미가 될 준비를 제대로 해야겠다는 생각이 더 많이 들었어요.
모미는 자기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이유로 꿈이 좌절되었지만 그 과정에서도 마스크를 쓰고 방송을 하는 인물이에요. 감독님은 제가 연기를 하려고 준비하고 지금까지 살아온 모습에서 모미가 가진 열망과 비슷한 뭔가를 느끼신 것 같아요.
지퍼 디테일 스커트수트, 화이트 셔츠는 모두 Alexander McQueen.
오디션 중간에 원작이 있다는 걸 알고 그때 웹툰을 봤어요. 전체 시나리오가 나오기 전에는 원작에 많이 의지하려고 했던 것 같아요. 웹툰 속 모미는 처절하게 자신을 봐달라고 외치는데 내가 연기할 느낌이 맞는지 고민이 많았어요. 그러다 시나리오를 마주했을 때 내가 연기할 모미는 대본 안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부터는 웹툰을 의식하기보다는 느껴지는 대로 연기했어요.
모미는 낮에는 평범한 회사원이고 저녁에는 마스크를 쓰고 BJ가 되어 춤추고 노래해요. 노출과 극적인 장면들도 있고요.
어릴 때 현대무용을 해서 어렵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방송댄스와는 또 다르더라고요.(웃음) BJ가 어떤 직업인지 잘 몰라서 많이 찾아보기도 했어요. 정작 감독님께서는 레퍼런스를 주기보다 너무 잘하려고 하지 않아도 된다, 감정 연기에 집중했으면 좋겠다고 말씀해주셨어요. 세 시기의 모미 중에서 본체 같은 역할이기 때문에 감정적으로 이입이 되는 역할로 만들어놔야 이후의 이야기에도 설득력이 생긴다고.
3인 1역 중 2인인 나나, 고현정 배우와의 연기 릴레이는 어땠나요?
아이러니하게도 같은 역할이라 더 접점이 적었어요. 리딩도 코로나 기간이라 따로 나눠서 했고요. 현장에서 저희를 순서대로 모미 a, b, c로 불렀거든요.(웃음) 다른 배우분들께서 모미 a가 너무 궁금하다고 보고 싶다고 했는데 감독님께서 따로 자리를 안 만들었어요. 현장에서 나나 선배님은 퇴근하고 저는 출근할 때 몇 번 마주친 적이 있었는데 항상 힘내라고 응원해주셨어요. 고현정 선배님은 쫑파티에서 처음 뵀어요.(웃음) 저를 보자마자 “너가 a구나”하면서 안아주시더라고요. 걱정될 법도 한 상황에서 믿어주시는 것 같아 큰 힘이 되었어요. 감독님도 각 배우의 개성대로 연기하길 원하셨고 서로 연결하기에 너무 맞지 않는 해석만 조정하는 식으로 찍어서 좀 더 재밌는 상황이 된 것 같아요.
모미와 지독하게 얽히는 ‘오남’ 역의 안재홍 배우 역시 화제에 중심에 있어요. 첫 상대역이네요.
특수 분장한 벗겨진 머리만 보다가 촬영 끝나고 분장을 벗은 모습을 보니 숱이 정말 많으시더라고요.(웃음) 감독님께서 리딩 전에 안재홍 선배님과의 자리를 따로 마련해주셨어요. 연기 합을 맞춰야 하는 상황에서 제가 경험이 없어 불안할 수도 있는데 묵묵히 기다려주시고 기 죽지 않도록 맞춰주셨어요. 나중에는 동선이랑 타이밍도 미리 짜고 빨리 집에 가자며 서로 화이팅하는 동료가 되었고요. 정말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마스크걸〉은 추함과 아름다움을 극명하게, 선과 악을 희미하게 다루고 있어요. 이 주제들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나요?
아무래도 제가 맡은 역할이라 멀리 떨어져 볼 수가 없었어요. 모미를 계속 이해하려고 했고 한 사람으로 바라보려 했어요. 모미뿐 아니라 〈마스크걸〉에 등장하는 인물의 대부분이 과감하고 극적인 일들을 벌이지만 이들이 정말 악하다고만 볼 수 없게 만들어요. 제 안에도 추한 면이 있지만 그것만으로 나쁜 사람이 되진 않잖아요. 각자의 역사가 있고 그렇기 때문에 어떤 선택을 할 수밖에 없을 때도 있구나, 생각했던 것 같아요.
마치 모미처럼 감춰왔던 정체(?)를 곧 밝힐 텐데요.
이렇게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공개가 안 될 줄은 저도 몰랐어요.(웃음) 그런데 예고가 나가고 알려지기 시작하니까 정말 모미처럼 낮에는 평범하게 살다 밤에만 변신하는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도 들고. 이렇게 기대감이 커진 상태라 부담스러운 것도 사실이에요. 걱정되면서도 아직은 공개 전이니 생각을 하지 말자 가라앉히고 있는 상태예요.
스트라이프 수트 세트업은 Tod’s. 팔찌는 Versace. 앵클부츠는 & Other Stories.
화이트 셔츠는 Versace. 레이스 브라 톱, 새틴 스커트는 Ermanno Firenze. 로고 장식 목걸이는 Dolce & Gabbana.
저 제대로 볼 수 있을까요? 스크리너를 받았는데 아직 제가 나온 편은 못 봤어요. 부모님이나 친구들도 제가 연기하는 모습을 처음 보게 될 상황이라 아직 같이 못 보겠어요. 당분간 피해다니려고요.(웃음)
시리즈가 전부 공개되고 나면 모미를 잘 보내줄 수 있을 것 같나요?
정말 잘 보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데 촬영을 마쳤는데도 아직은 보내주지 못했나봐요. 한동안 모미를 보내주기 위해 글을 자주 썼어요. 너무너무 많은 것들이 휘몰아친 경험이라 끝나면 후련할 거라 생각했는데. 모미라는 이름 안에 제 모든 처음이 담겨있었어요. 앞으로 계속 연기를 하고 현장이 익숙해져도 이런 마음이 드는 캐릭터는 또 만나기 어려울 것 같아요.
혼자 있거나 혼자서 뭔가를 하는 걸 좋아해요. 혼자 선택하는 건 내가 정말 좋아서 하는 일이잖아요. 수많은 일 중에 내 마음이 동하는 일이 있다는 게 되게 소중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영화를 보거나 사진을 찍고, 그림 그리고, 필사하고.
갑자기 발레에 빠졌어요. 어릴 때 하던 무용이랑은 또 달라요. 발레를 하는 동안 몸에만 집중할 수 있는 게 좋고 어려워서 계속 도전할 수 있는 점도 좋아요. 취미인데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싶을 정도로 자료를 찾아보고 이걸 신으면 좀 더 잘할까 싶어서 뭘 막 사고 있어요.
쓰는 걸 좋아해서 일기를 아침 저녁으로 써요.(웃음) 일어나서 다짐할 게 있으면 쓰고 저녁에 힘이 남아있으면 또 써요. 촬영 마치고 나서는 내가 너무 좀스럽고 형편없는 사람 같아서 마인드 컨트롤을 위해 〈명상록〉을 필사하고 있고요.
최근 필사한 것 중에 기억에 남는 구절은 뭐예요?
“찬미를 받는다고 해서 더 아름다워지거나 찬미가 아름다움의 구성 요소인 건 아니다. 비난 받는다고 해서 더 추해지는 것도 아니다. 아름다움은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것이다.” 앞으로 저도 평가를 받게 될 텐데 이 구절을 보고 어떤 말을 듣더라도 내가 달라지는 건 아니라는 생각을 했어요.
인생이 힘들다고 느껴지는 순간마다 영화의 도움을 정말 많이 받고 산 사람이거든요. 좋아하는 작품을 기다리고 그 작품을 보러 가서 만족하고 나왔을 때의 공기와 풍경이 저에게는 큰 힘이 되었어요. 그래서 저도 누군가에게 잠깐이나마 위로도 될 수 있고 기대도 될 수 있는 순간을 만들어가고 싶어요. 시청자나 관객과 한 작품 한 작품 만들며 함께 늙어가는 배우가 되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