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AM

호주 애들레이드에서 유학하다가 재작년 귀국했다. 세계 여행을 끝내고 돌아온 부모님이 우리 가족이 살 집을 직접 짓는다고 해서 나도 합류했다. 건축가의 꿈이 있었지만 단순히 대학교에 진학하기보다는 현장을 경험해보고 싶었다. 내 눈으로 보고 듣고 깨달으면서. 지금은 빌더 팀의 막내. 바로 위 사수와는 열 살 차이다. 콘크리트를 거푸집에 넣는 타설 작업 뒤에 골조를 세우고 시트를 덮고 인테리어까지. 다섯 명의 팀원이 공동으로 작업해서 길게는 6개월 동안 한 채의 집을 짓는다.
STEREOTYPE
호주에서는 엔지니어, 카펜터, 빌더, 플럼버같이 건설업에 관련된 직업을 꿈꾸는 친구들이 많았다. 임금도 높고 선망받는 직종이니까. 그런데 한국에서는 ‘노가다’라는 단어로 모든 게 뭉뚱그려지고, 그걸로 사람의 계급을 나누더라. “학교에서 문제 일으키고 쫓겨나서 노가다 하는 거 아냐?” “어린 여자애가, 왜 굳이 힘든 일을 하느냐”는 말도 들었다. 심지어 같은 현장에서 일하는 분들도 “사무실에서 일할 수 있는 직업을 찾아보는 게 어떠냐”고 하시더라. 지금은 당당하게 말한다. “내 꿈은 사람을 위한 공간을 만드는 것이다. 험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 힘든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모두 하나가 되어야 공간을 창조할 수 있다. 그게 진짜 건축이고 예술 아닌가?”

온몸을 써서 뭔가를 창조해내는 것에 대한 즐거움. 언제든 내 머리, 내 두 손, 두 발을 총동원해야 한다는 것.
ARTISTIC MOMENT
나무는 한번 자르면 다시 자라나지 않는다. 1㎝만 짧게 재단해도 큰일이 난다. 건축용 계산기로 아주 세세하게, 두 번, 세 번 실측한다. 마침내 지붕의 나무 기둥들이 오차 없이 견고하게 섰을 때 마음이 웅장해진다. 그 순간 지붕을 올려다보면 햇빛이 비치면서 공간이 마치 궁전이나 신전처럼 보인다. 아름답고 영롱하다. 사람이 사람을 위해서 한 공간을 창조해낸다는 것은 가슴이 벅찬 일이다.

건축에 대해 깊게 공부하고 싶어서 유학을 준비하고 있다. 10년 뒤 나의 최종 목표는 마스터 빌더가 되는 것. 설계, 설비, 시공, 마감까지 전체 공정을 책임지는 사람이다. 어벤저스같이 나만의 팀을 꾸려서 전 세계에 공간이 필요한 곳에 집을 지어주고 싶다.
MY BODY
배에 복근이 생겼고 팔에 근육이 잡힌다. 지방이 빠졌고 허벅지가 두꺼워졌다. 두드러지지는 않지만 힘쓸 때 드러나는 현실 근육이다. 햇볕에 피부도 까무잡잡해졌다. 운동선수냐는 오해를 가장 많이 받는다. 경험이 쌓여서 근육이 된 거니까 나는 나의 근육이 자랑스럽다.

I AM

요리를 했지만 목수라는 직업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 목수나 타일이나 현장에서 일하는 건 같으니 일단 해보자는 마음으로 뛰어들었다. 12월 추운 겨울 신축 아파트 공사장이었다. 콘크리트가 머금고 있던 냉기, 현장의 먼지 냄새가 아직도 기억난다. 그때의 나에게 이렇게 말해주면 좋을 텐데. “모든 일은 네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더 잘 되어가고 있다”고. 그게 벌써 6년 전. 지금은 타일 시공업체 ‘PIT A PAT TILE’의 대표다.
MY SCHEDULE
타일 시공이 필요한 공간은 생각보다 다양하다. 가정집의 주방, 현관, 베란다, 화장실, 상가나 옥상 바닥, 요즘 유행하는 아트월이나 파벽돌 인테리어까지. 게다가 최근에 부동산법이 바뀌면서 자기 집으로 들어가는 집주인들이 늘었고 리모델링 수요도 덩달아 증가했다. 코로나 이후 인테리어에 대한 관심이 폭발했고 타일을 45도로 깎아서 이음새가 보이지 않는 졸리컷 시공법이 유행하면서 더 바빠졌다.
CREATIVITY
있는 그대로 붙이는 게 아니라 보기 좋게 붙여야 하는 게 타일 작업의 핵심이다. 수직 수평을 맞춰주는 레이저 도구를 활용하고 상황에 따라 융통성을 발휘해야 하기 때문에 머리가 아플 때도 있다.

내가 내 직업을 대하는 태도가 좋아야 결과물도 좋아진다고 믿는다. 최근엔 내 또래의 사람들이 유입되면서 이 직업에 대한 의식이 바뀌는 걸 체감하고 있지만 과거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돈만 받아 가면 된다는 마인드로 대충 작업하는 어른들도 자주 봤다. 적어도 그런 사람은 되지 말자고 다짐했다. 나부터 내 직업에 자부심을 갖자고.
DREAM
기술직의 메리트는 한 달 내내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준비가 되면 일을 서서히 줄여나가면서 즐기는 삶을 살고 싶다. 회사원의 정년이 65세라면 나는 그보다 이른 50살에 은퇴하는 게 목표다. 그후엔 컨테이너든 차고든 나만의 공간에 목수 연장을 두고 목공일을 취미를 즐기고 싶다.
MY BODY
손바닥에 잡힌 굳은살. 타일을 붙이기 전, 접착제를 바르는 붓을 쥘 때 생긴다. 앉아서 작업하기 때문에 상체 위주로 발달하고 하체는 무릎이 닳는다. 그래서 무릎보호대는 필수다. 신체의 밸런스를 맞추기 위해 러닝 크루에서 매주 달리기를 한다.

I AM

조소과를 졸업한 뒤 친구들과 구산동에 지하 작업실을 얻었다. 침대가 없었는데 같은 방 친구가 잠만 자면 데굴데굴 굴러와 내 배에 머리를 올렸다. 이케아도 없던 시절이었다. MDF 가구는 성에 안 찼고 돈은 없었다. 내가 쓸 가구를 내가 직접 만들어야겠다는 마음으로 목재소를 찾아갔다. 6개월에 걸쳐 조립식 이층 침대를 만들었다. 그게 친구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재료 값만 받고 가구를 만들었다. 미술관 일을 하면서 점점 욕구가 커졌다. 짜맞춤 전수관을 찾아 다니고, 공방에 취직해 현실적인 기술을 배웠다. 지금은 가구 공방 ‘소목장세미’를 운영한다.
JOY OF WORK
눈에 보이는 생산성은 이 일의 최고의 즐거움이다. 조소를 배우면서 나는 ‘왜 작품을 만들었는가?’ ‘왜 쓰레기를 만들어야 하는가?’
‘어떤 의미가 있는가?’ ‘누구에게 필요한 것인가?’를 고민했고, 어느 정도 마음속으로 답을 찾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졸업 후 맞닥뜨린 현실에는 ‘돈이 안 되면 나는 당장 굶는다’는 전제가 존재하더라. 나의 20대는 암담했다. 항상 불안했고 어떻게 먹고살아야 할지 고민스러웠다. 가구는 실용성과 예술성이 모두 중요한 작업이다. 너무 영혼을 팔지 않으면서 나의 예술성을 발휘할 수 있는 중간 지점이랄까. 이 일을 20대 중반에 빨리 발견한 것이 내 인생의 행운이었다.
ROUTINE
2주 정도의 디자인 작업이 끝나면 자재 분석을 거쳐 재단에 들어간다. 치수에 맞에 기계로 자르고 조립을 한다. 나는 못 대신 ‘도미노’라는 핀을 넣어서 가구를 조이는 방식을 선호한다. 더 빨리 끝내야 하는 작업은 타카 또는 피스를 쓴다. 조립이 끝나면 다치지 않도록 각을 날리고, 표면에 샌딩 작업을 한다. 그런 다음 하루에 한 번씩, 두세 번 칠을 한다. 한 달에서 한 달 반 하나의 가구가 완성되는 데 걸리는 시간이다.

손으로 작업을 하다 보니 엄지와 검지 사이의 근육이 발달한다. 만져보면 길고 두툼하게 도드라져 있다.
STEREOTYPE
블루칼라 워커에 대한 편견은 모든 게 공장화되면서부터가 아닐까. 사람의 기술이 필요한 게 아니라 그저 물리적인 힘이 필요한 상황이 되어버린 셈이니. 몸으로 일하는 사람과 공장화된 시스템의 노동력은 조금 다르다. 여자가 목수를 한다는 것에 대해 의심부터 하는 사람들. 그래서 더 보여줘야 된다고 생각했고 더 열심히 했다. 사실 그렇게 증명할 필요는 없었는데. 지금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이게 진짜 감각”이라고. 30년, 40년 이 일을 한 분들의 감각은 극도로 발달되어서 감히 일반인이 범접할 수 없는 경지에 올라 있다. 그들이야말로 무형문화재다.
HEALING
예민하고 뾰족한 성격이었지만 목공을 시작하면서 부처 소리를 듣는다. 교도소의 죄수들에게 목공 수업을 가르치는 이유가 있다. 나무라는 물성을 촉각적으로 느끼면서 안정감을 얻을 수 있고 무엇보다 자기 삶의 가치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땀 흘려서 만든 가구를 남이 쓰면서 행복해하는 모습을 본다는 건 그런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