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감독 박찬욱이 ‘나의 사적인 예술가인 이유’는 ‘아름다움’, ‘좋은 영화’란 무엇인가 끊임없이 자문하게 했기 때문이다. 그의 다채로운 행보 곳곳에 매복해 있던 내 오랜 질문들은 사사로운 존재들의 초상을 담은 ‘사진작가 박찬욱’의 영역에서 종횡으로 활개치고 있다. 아무래도 ‘사진작가 박찬욱’은 ‘영화감독 박찬욱’보다 덜 알려져 있어, 잠재적 관객에게 설명할 일이 왕왕 생기는데, 그때마다 나는 2년 전에 진행한 인터뷰에서의 대화를 주워섬긴다. 근사한 풍경이든 하찮은 사물이든 잘 발견되고, 잘 디자인되고, 보살핌을 받는 듯한 사진, 한 단어로 규정되는 감정이 아니라 기기묘묘하거나, 웃기거나, 귀엽거나, 징그럽거나, 요염하거나, 거룩하거나, 쓸쓸하거나 등의 느낌이 혼재된 사진, 각자에게 모두 다르게 읽히는 사진…. 이쯤 하면 십중팔구 듣는 이의 표정이 모호해진다. 당최 모르겠다는 반응이라기보다는 보거나 들은 박찬욱 영화의 결정적 이미지를 출발점 내지는 참조점으로 삼을 수밖에 없는 혼란에 가깝다.
그가 말한 바, “별거 아닌 걸 찍었는데, 왠지 아름다운데, 보통 사진과는 다른 아름다움인데, 왜 아름답게 느껴지는지 생각하게 만드는 이미지”들. 나는 장 뤽 고다르, 거스 반 산트, 데이비드 린치, 특히 빔 벤더스는 중요한 사진작가였고, 타르코프스키의 폴라로이드 사진집은 유명하며, 키아로스타미가 사진전을 열었다면, 우리에겐 박찬욱이 있다고 호들갑을 떨었었다. 그러나 와중에 간과한 것이 있었다. 트럭 짐칸에 실린 옹색한 코끼리 조각, 몸통에서 분리된 백조 머리, 유령 같은 파라솔, 남근 모양 바위, 사지를 비틀어 그루밍하는 고양이 따위가 가령 〈박쥐〉나 〈친절한 금자씨〉 등의 영화와 뒤섞이는 상황을 결코 막을 수 없다는 사실 말이다. 그러므로 국제갤러리 부산점에서 열리는 사진전 «너의 표정»은 혼돈과 딜레마라는 예정된 변수를 동력 삼아, ‘좋은 영화’에 대한 질문을 ‘사진’으로 치환하는 자리가 될 것이다. 모든 걸 자연스럽게 꾸며내야 하는 운명의 영화감독과 세계관과 미감을 반영하는 찰나를 위해 실패할 줄 알면서도 끊임없이 셔터를 누르는 사진작가, 샴 쌍둥이 같은 이들이 이합집산하는 풍경은 이번 개인전의 하이라이트다.
전에 없던 의문이 생겼습니다. 사진작가 박찬욱과 영화감독 박찬욱이 과연 별개일까, 하는.
영화를 만들어온 사람으로서 사진 작업은 별개라고 할 수도, 연장선상이라고 할 수도 없어요. 오늘도 전시에 맞춰 출간될 동명의 사진집(을유문화사)에 영화 필모그래피를 넣을지 말지 한참 고민했어요. 처음엔 안 넣으려고 했죠. 그런데 과연 사진집의 독자들에게, 이미지를 다루는 감독으로서의 정보가 완전히 불필요한가, 무관한가 자문하게 되더군요. 뻔히 아는 사실을 굳이 쓰지 않는다는 건, 결국 사진작가와 영화감독을 분리해 봐달라는 의지의 표현일 텐데, 그건 좀 아니지 않나. 그렇다고, 이런저런 영화를 만든 박찬욱이 찍은 사진이라는 걸 아예 전제하고 보기를 바라느냐, 그것도 아닙니다만. 어쨌든 결국 필모그래피를 포함시키기로 했어요.
요즘 유행어를 빌려, 사진작가가 ‘본캐’ 중 하나라면 “왜 (굳이) 사진을 찍는가”라는 질문에 해명해야 할 것 같고, ‘부캐’라면 사진이 영화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니, 그야말로 (행복한) 딜레마 아닐까요?
만약 사진을 영화와 아예 별개로 취급하려고 결심했다면 필모그래피를 빼야 할뿐더러, 아예 새로운 이름으로 나서야 하지 않겠느냐, 싶어요. 독자이든 관객이든, 영화를 만들어온 박찬욱의 사진이라는 관점으로 볼 때, 내가 생각지 못했던 의견들이 나올 거라는 기대도 크고요. 그렇게 생각하니 대략 답이 나오더군요. 화가이자 평론가인 존 버거가 자기 활동을 구분하지 않는 것처럼, 결국 같은 사람이 하는 일이니까요. 그럼 ‘나중캐’라고 해야 하나?(웃음)
실제로도 개인전 준비에 영화 〈헤어질 결심〉 후반작업까지, 아주 정신없으시겠습니다.
뭐, 어차피 영화 일도 여러 가지 동시에 하고 있으니까요. 미국 드라마 〈동조자〉, 투자 못 받아 미뤄둔 영화들, 손보고 있는 각본, 제작자로서 참여하는 작품, 아이폰4로 찍은 〈파란만장〉처럼 다시 아이폰13으로 만들 영화….
사진작가 박찬욱과 영화감독 박찬욱의 교집합에 대해 질문 드렸을 때 “익숙한 존재를 낯설게 만든다, 아름다운 것, 그로데스크한 것, 유머러스한 것이 분리되지 않는 한 몸이다, 피사체와의 적당한 거리가 중요하다”고 하셨어요. 그럼 둘 ‘사이’에는 뭐가 있을까요?
서사가 있겠죠. 훨씬 개인적이고, 은밀하고, 순수하고, 시적인 서사. 보통 영화를 보면서는 서사를 받아들이는 반면 완결된 이미지인 사진에서는 서사를 찾아냅니다. 저 장면은 어디일까, 저 프레임 밖은 어떻게 생겼을까, 저 물체는 어쩌다 여기 놓이게 되었을까…. 기억과 경험으로 오래 음미하고 깊게 상상할수록, 서사는 더욱 확장합니다. 사진은 자율성이 높은 매체라 내 영화들이 일으킨 어떤 기억이 사진에 덧씌워져도 흥미로운 해석이 되는데, 그런 해석들이 많아질수록 좋아요.
사진이 영화 만드는 행위나 결과에 직접적인 영향도 주나요?
로케이션을 보러 가서도 한눈 팔고 사진을 찍으니 프로듀서나 촬영감독이 잔소리를 해요. 제발 영화에 집중하라고. 난 사진이 영화와 별개의 일이 아니라고 답합니다. 그렇게 욕 먹으며 찍은 사진들을 들여다보다 보면, 원하는 영화의 분위기나 룩에 대한 방향이 구체화되는 면이 분명 있어요. 10~20년 전에 찍은 사진에서도 영감을 주는 것들을 찾을 수 있죠. 촬영감독이나 미술감독에게 나의 사진들을 보여주면서 이런 느낌은 어떨까 제안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아예 무관한 일은 없어요.
〈Face 45〉, 2015, Archival pigment print, 111x111cm(여백 포함).
“예술은 현실과 비현실 사이의 좁은 틈새에 존재하는 무엇이다”. 일본 에도시대 극작가 지카마쓰 몬자에몬의 명언은 박찬욱의 사진을 겨냥한 듯하다. 그의 피사체는 실재하나 실재하는 것이 아니고, 실재하지 않으나 실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무엇이든 그릴 수 있는 화가의 전지전능함이 결여된 사진작업에서 가장 중요한 건 프레임 안에 무엇을 넣느냐의 문제이며, 프레이밍은 시선과 의도를 잘 드러낼 수 있는 행위가 된다. 그의 사진은 여간해선 눈치채지 못할 절묘한 구조를 이루거나, 우연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무언가를 명확히 연상시킨다. 피사체와 적확한 거리를 둔 프레임이 아니었다면 존재하지 않았을 이 대상들은 박찬욱에 의해 ‘호명’되는 순간, 현실과 비현실 틈새 지점에 착지한다. 논리에 지배되지 않은 채, 도덕적 선입견을 배제한 초현실주의적 사유에서 출발하는 무국적, 무중력, 무시대적 사진은 일상의 한 조각을 낯설게 보도록 이끈다.
박찬욱의 사진적 시선을 따라가본다. 그에게 발견된 대상을 다시 내가 발견하는 과정에서 ‘사진보기’의 레이어가 자연스레 생겨날 뿐 아니라, 평범한 풍경 속 특정한 순간이 부조처럼 솟아나 입체적으로 보이는 경험을 하게 된다. 특정한 계절과 특정한 시간대에 특정한 광선 아래의 이 유일무이한 순간은, 그 기록의 주체가 박찬욱이 아니었다면 애초에 아름다움의 범주에 들 일도 없었을 것이다. 대체로 그 순간은 매끄럽고, 유려하고, 반질거리고, 압도적이기보다는 거칠고, 미숙하고, 소소하고, 투박하다. 간혹 대체 이런 걸 왜 찍었을까 궁금해진다 했더니, 그가 답했다. “이걸 왜 기록으로 남길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는지 생각해보도록 만드는 것이 예술의 존재 이유 아닐까요?”
인스타그램(@pcwpcwpic)이 기본 관객 1만7천만 명의 온라인 상설전이라면, CGV용산아이파크몰 아트하우스 박찬욱관은 오프라인 갤러리다. 이곳 극장 안에서는 기를 써서 직조한 드라마가, 밖에서는 철저히 발견된 풍경이 대조를 이룬다. 헌정관을 만들자는 제안에 박찬욱은 사운드와 이미지의 엄격한 품질관리, 그리고 4개월마다 사진을 바꿔 걸 수 있는 공간을 조건으로 내세웠다. “이 관이 존재하는 한 계속되는 사진전”의 제목은 ‘범신론(汎神論)’. 우주, 세계, 자연의 모든 것, 즉 세상만물 이대로가 신이라는 뜻이며, 이는 그의 사진뿐 아니라 삶의 철학이기도 하다. 따라서 박찬욱의 사진을 본다는 건 세상만물과 대화를 나누는 것이나 다름없는데, 이 과정에서 익숙한 당위에 가려진 나의 편견과 고정관념, 모순과 아집이 슬며시 드러난다. 물론 이 피사체들은 진실을 대변하고자 욕심 낸 적 없다. 그 자체로, 주체로서 존재하며 영원과 순간을 붙들 뿐. 그게 아니라면, 그의 사진이 그렇게 믿게끔 한다.
〈Face 16〉, 2013, Backlit film, LED lightbox, 110x75cm(여백 포함).
‘너의 표정’, 제목이 예상 외로 꽤 서정적이에요. 세상 평범한 대상들이 사진으로 포착됨으로써 생기 있게 살아난다는 의미와 동시에 ‘사진 보는 관객의 표정이 궁금하다’는 작가의 의도가 엿보이기도 합니다.
피사체와 나 사이 또는 피사체와 관객 및 독자 사이에 사적인, 친밀한 관계의 개념을 부여하고 싶었어요. 앞서 말했듯 사진 자체가 보는 이의 경험이나 심상 같은 요소를 건드리는 역할을 한다면, 마음속에 무엇이 떠오르는지에 따라 사진들이 다 다른 표정을 짓지 않을까 해요.
작품 제목이 모두 공평하게 ‘페이스(face)’인 이유이기도 하겠죠. 어떤 경우에 그 표정을 발견하시나요?
어느 찰나 나와 마주친 존재, 나를 숙연하게 만드는 순간, 옷깃을 여미며 기념하고 싶은 욕심이 드는 어떤 사물…. 딱 특정한 순간에만 보이는 것들이 있어요. 어느 누구도, 나조차 지금의 이 자리에 있을 수 없어요. 지금이 아니면 사라지는 순간, 나만이 목격한 시각과 장소의 앵글인데, 특히 그것이 존중받을 가치가 있는 광경이거나 기록될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는 숭고한 풍경이죠.
사진작가 필립 퍼커스는 자신의 저서에 “카메라로 관찰하는 행위는 세계에 대한 풍부한 표현과 개인적 성찰을 담은 행위가 될 수 있다, 이렇게 ‘예술’의 정의에 부합하는 일이 사진에서 일어났을 때 이건 기적이다, 우리는 결코 이러한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고 썼어요. 기적까지는 아니더라도, 순수한 기다림으로 발견된 순간을 만나는 입장에선 이만한 사건이 없을 듯합니다.
사건은 도처에서 벌어지고, 누군가 발견해주면 큰 사건이 되고, 그렇게 보자면 세상에 하찮은 건 없어요. 사진은 찰나의 기록이기에 바로 그런 가치를 일깨워줍니다. 넘쳐나는 이미지 중 눈길이 가는 건 다 다르지만, 특히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일깨워주는 이미지가 있다는 것, 보기에 따라서 모든 게 가치 있는 사물이고 풍경이 될 수 있다는 얘기이죠.
〈Face 6〉, 2016, Backlit film, LED lightbox, 110x75cm(여백 포함).
사진을 찍는다는 건 인식의 한 형태입니다. 그렇다면 방금 말씀하신 게 좋은 사진의 요건일까요?
그렇죠. 하지만 ‘어떤 이미지는 어떤 누군가에게 큰 의미가 있다’는 식은 너무 주관적이고 환원적이니까. 좀 더 예민하게, 실체를 가장 잘 볼 수 있는 적절한 거리에서 주변을 관찰해 정확한 의도로 찍힌 사진이 좋은 사진이 아닐까. 적어도 그런 노력은 필요하다 봐요.
사진이든 회화든 작품의 크기는 그 이상을 의미하는데, 이번 전시작의 크기를 결정하는 기준은 무엇이었나요?
사진이 점점 커지고 있는 추세예요. 기술도 발전한 데다 거창해 보여야 눈에 띄고, 존중받는 느낌도 들고, 일단 압도하고 보자는 마음도 있겠죠. 하지만 조그맣지만 잘 찍은 사진들을 보면 뒤통수를 맞은 듯한 충격이 있어요. 요세프 쿠델카의 사진 중 집시 시리즈 작품을 선물받았는데, 딱 요만해요. 더 컸다면 어땠을까 상상해보지만, 역시나 작은 게 좋다는 결론에 도달하죠. 반면 나는 하찮은 풍경이 중요한 사건, 거대한 드라마의 주인공처럼 보일 수 있다는 인상을 전달하고 싶어해요. 예컨대 낡은 소파일 뿐이지만, 사진을 통해서 이렇게 아름다운 디바일 수도 있다는 느낌을 주려면 작은 사진으로는 부족할 것 같았어요.
사진을 찍는다는 것과 그렇게 찍은 사진을 세상에 내놓는다는 건 완전히 다른 이야기이지 않을까요?
그렇죠. ‘존중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찰나를 찍는 것과 ‘그것을 잘 보세요’ 하고 내놓는 건 다르죠. 하지만 정작 나는 영화를 만들기 때문인지 큰 차이가 느껴지지 않아요. 혼자 보려고 영화 만드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기록하고 싶다는 방향과 보여주고 싶다는 방향이 갈등을 일으킨 적은 없었어요. 모두에게 보일 가치가 있다는 것이 결국 사진을 찍는 목적인 것 같습니다, 여태까지는.
〈Face 127〉, 2020, Archival pigment print, 80x80cm(여백 포함).
틈 나는 대로 박찬욱은 “영화 찍을 때 못지않은 기쁨을 느끼는 일이자, 평생 해야 할 일이다”라며 사진작업에 대한 진심을 피력해왔다. “미술을 하고 싶었지만 동생(미술가 박찬경)의 재능을 보고 포기했다”는 그는 대학 사진반에서 활동했다. 난지도나 달동네를 다니며 리얼리즘 사진을 찍었고, 1학년 말 유네스코 명동회관에서 첫 사진전을 치렀다. 당연히 감독이 된 후에도 사진을 놓지 않았다. 영화를 찍지 못해 고통스러울 때나, 잘 찍어야 해서 부담스러울 때나 “그때그때 할 수 있는 만큼 한다는 생각으로, 소중한 순간은 예민하게 관찰하면 언제든 찾아온다”고 믿어왔다. 틈만 나면 아이패드 속 사진들을 정리한다는 ‘준비된 사진가’는 후반작업 중인 영화 〈헤어질 결심〉 현장의 ‘소중한 순간’을 보여주었다. 멍한 표정으로 어깨에 안마기를 올린 탕웨이, 옆모습이 선연한 박해일 등은 사진집 〈아가씨 가까이〉에서 목격했듯 배우와 캐릭터 사이의 중간 상태인데, 박찬욱의 유일한 인물 시리즈다. 언젠가는 만나게 될, 그의 사진세계 안에서 물밑 작업 중인 또 다른 세계다.
〈Face 107〉, 2013, Digital C-print, 80x80cm(여백 포함).
포트레이트를 찍은 사진가 안주영은 ‘박찬욱표 사진’을 보며 독자적인 세계와 스타일을 향해 직진하는 거장의 태도에 혀를 내둘렀다. 그를 대신해 사진작가 지망생들을 위한 조언을 박찬욱에게 부탁했다. “많이 찍어야겠죠. 그리고 자기 사진을 유심히, 열심히 보라고 하고 싶어요. 뜬구름 잡는 얘기지만, 자기 영혼이 솔직하게 표현됐는지 숙고해야 합니다. 아니라면 다른 스타일을 찾아야 하고, 찾아질 때까지 계속 찍어야죠. 거울에 비친 자기 얼굴을, 영혼을 가만히 보듯이, 자기 사진을 열심히 봐야 합니다.” 만약 이 말이 «너의 표정»전을 찾을 관객들, 그리고 저마다의 표정을 짓고, 애써 찾고, 가끔은 외면하고, 그럼에도 꿋꿋이 제 표정을 지키며 사는 우리 모두를 위한 최소한의 살가운 제언으로 읽힌다면, 그것이 박찬욱표 ‘사진의 용도’일지 모르겠다.
컬러 사진의 선구자이자 역시 하찮은 사물을 찍는 윌리엄 이글스턴의 작품 중 아이스크림 가게 앞 갈색 머리의 젊은 여성 사진이 있어요. 순간의 광선과 분위기가 어우러져 잊히지 않은 이미지로 각인되었죠. 외젠 앗제의 사진은 이상하게 꿈결 같아요. 인물이 거의 없지만, 있다 해도 유령처럼 보이죠. 알렉 소스도 좋아해요. 유머가 있는 데다 후줄근한 풍경이라도 그 지역에 가보고 싶게끔 만들거든요.
〈Face 106〉, 2016, Archival pigment print, 124x124cm(여백 포함).
감독님 사진 특유의 무겁지 않은 진지함이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궁금한데, 비슷한 맥락으로 ‘선데이 포토그래퍼’가 아님을 증명하는 것에 대한 우려는 없나요?
매일 사진을 찍으니 일단 ‘선데이’ 사진가는 아니죠. 잠잘 때만 빼고 늘 진행된다는 점에서 오히려 생활에 더 가까워요. 영화 로케이션은 말할 것도 없고 영화제에 초청받아 가도 어떻게든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하죠. 휴가지를 정할 때조차 요즘 한창 찍고 있는 절이 있는 데로 가고요. 일상인 동시에 직업으로서의 면모도 있는 거예요. 어떤 다른 세계를 조직해야 하는 감독이라는 직업인으로서 일종의 결핍이 있었어요. 사적이고, 가볍고, 세상을 보는 눈을 좀 다르게 표현하는 매체가 절실했죠. 어떤 감독이 소설이나 시를 쓰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요. 사진작업이 카메라로 시를 쓰는 행위와 같기도 하고요.
동생 박찬경과 함께 하는 파킹찬스 활동에 대해 상업적 결과의 부담에서 자유롭게 창의적인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라 말씀하셨죠. 사진작업에서는 영화작업 때와 같은 고통이 없습니까?
상대적으로 그런 거지, 영화 일 자체가 크게 고통스럽진 않아요. 투자가 안 되어서 영화를 못 만들던 시절에나 고통스러웠죠. 물론 영화는 의도대로 구현하는 매체이고, 누구든 머릿속에는 거창한 게 들어 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불만족스러울 수밖에 없어요. 반면 사진작업에는 고통이 없어요. 무거운 카메라를 들고 나갔다가 하나도 못 찍고 와도, 여기저기 관찰하며 다닌 시간은 헛수고가 아니기 때문에. 원체 창작의 고통에 시달리는 타입도 아닌 데다, 사진은 카메라만 있으면 창작을 할 수 있기에 즐거운 일입니다.
〈Washington, D.C.〉, 2013, Archival pigment print, 111x111cm(여백 포함).
언젠가 “메인스트림과 인디펜던트를 오가는 활동을 할 것 같다” 하셨어요. 감독 활동은 메인스트림으로, 사진 작업은 인디펜던트로 하고 계신 게 아닐까 합니다만.
그렇게 봐도 되겠네요. 사진은 혼자 하는 일이니까. 하지만 감독으로서도 언젠가 내가 쓴 시나리오가 큰 투자를 받는 데 실패하는 때가 올 거라는 걸 항상 각오하고 있어요. 일종의 훈련이 필요해요. 저예산으로 영화를 탁 찍을 수 있는 법을 연습하고, 제작비용이 많이 들지 않는 시나리오를 시도하는 식으로요.
이번 전시는 관객과 고객 모두를 전제한다는 점에서 미술관 전시와 다릅니다. 작품 소유의 방식도 극장에 가거나 블루레이를 구입하는 식의 영화와 다르죠. 영화와 미술, 관객과 고객이 어떻게 공존할지 흥미진진한데, 시장에 본격 진입한다는 것 역시 예술가에게는 또 다른 국면일 겁니다. 심정이 어떠세요?
전혀 경험하지 못한 일인 데다, 미술계에도 트렌드라는 게 있다면 과연 내가 그걸 좇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어요. 어쨌든 손쉽게 ‘거실에 걸어 놓는 사진’으로 표현해버리는 건 너무 슬픈 일이죠. 작품당 에디션이 5개인데, 이 많은 사람들 중 그걸 좋아하는 사람이 5명쯤은 있지 않을까….(웃음) 무덤 사진이라도 풀과 나무와 구름이 만드는 아름다움이 보인다면, 나처럼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 있지 않겠냐는 거죠. 당신 같은 사람은 세상에 없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생각으로는 사진은 고사하고 영화도 만들 수 없어요. 나 같은 사람이 어딘가 있다고 믿어야 합니다.
※ «너의 표정»전은 10월 1일부터 12월 19일까지 국제갤러리 부산점에서 열린다.
윤혜정은 국제갤러리 이사로 활동 중이며, 예술에 관한 다양한 결의 글과 인터뷰를 여러 매체에 기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