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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영국, 예술가의 순수한 노동

추상화가 유영국의 산 그림 앞에서 받는 감동을 ‘숭고’라 부를 수 있다면, 이는 그림을 그린다는 것과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것의 본질을 평생 노동하며 탐구한 자를 향한 경외나 다름없다.

BYBAZAAR2021.03.17
 
유영국, 〈Work〉, 1973, Oil on Canvas, 136x136cm, Courtesy of Yoo Youngkuk Art Foundation.

유영국, 〈Work〉, 1973, Oil on Canvas, 136x136cm, Courtesy of Yoo Youngkuk Art Foundation.

 
예술가들의 공통점은 무엇인가요?
〈나의 사적인 예술가들〉 출간 후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이다. 미술가, 배우, 문학가, 건축가, 음악가, 사진가, 출판인까지, 각기 다른 문화를 아우르는 19인의 예술가 면면에 같은 점이 있을 리 만무했다. 겨우 찾은 교집합이라면, 서문에도 썼듯, 자율성과 무목적성, 그리고 엄청난 자유의 대가이기도 한 불확정성과 불안을 매 순간 극복해내는 용기와 한 발씩 나아가는 소명의식이다. 하지만 이들이 천성적으로 대담하다거나 하늘로부터 영감을 계시 받은 대단한 인종이라는 찬사처럼 들리는 탓에 오해의 소지가 있다. 모르긴 해도, 미국의 미술가 척 클로스도 그래서 “영감은 개나 줘버려라.”고 독설했을 것이다. 어쨌든 이 자리를 빌려 부연설명하자면, 내가 어떤 예술가를 진심으로 존중하게 되는 순간은 그 용기가 꾸준히 작업하는 노동, 머리와 눈, 손과 발에서 나오는 것임을 새삼 발견할 때다. 예술가들은, 심지어 맨날 파티장에만 모습을 드러내는 것 같은 분방한 이들조차, 놀라울 정도로 근면성실하다.
 
추상화가 유영국(1916~2002)의 하루는 지극히 단순했다. 아침 8시가 되면 7평 남짓한 작업실로 향했고, 정오의 점심식사 후 저녁 6시까지 작업하는 식이었는데, 그나마도 한 작품을 몇 달에 걸쳐 완성했다. 특별할 것 없는 일과는 정제된 그의 삶을 대변하는 동시에 대조를 이룬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난 부유한 가문 자제들이 그랬듯, 그는 일본으로 미술 유학을 갔다. 그러나 모국이 일제의 병참기지로 전락하는 광경과 끔찍한 전체주의에 환멸을 느끼고는 출세가 보장된 국립미술대학이 아니라 자유로운 학풍의 문화학교를 선택했다. 그는 그곳에서 서양 미술기법이나 사조에 앞서 인간의 실존과 존엄을 배웠다. 한 인간으로서 그는 국가의 상실, 참담한 전쟁, 남북 분단, 이데올로기의 갈등 등 피투성이가 된 한국 근대사를 생의 한가운데서 고스란히 겪었다. 동시에 작가로서는 낭만주의니 초현실주의니 하는 논쟁도, 제대로 된 미술사학자나 미학자도 없는 세계 미술계의 철저한 주변국에서도 스스로를 작가로 곧추세우기 위해 분투했다.
 
유영국은 김환기와 더불어 한국 추상미술의 ‘양대 산맥’으로 불린다. 그러나 조형적, 기하학적 요소에서 출발한 그의 추상은 구상과 입체파적 시도 등 다양한 변이를 거쳐 이른 김환기의 그것보다 훨씬 엄격했기에 “가장 순수한 추상의 세계를 펼쳐 보인 작가”라는 평을 받기도 한다. 추상의 사전적 의미가 “여러 사물이나 개념에서 공통되는 특성이나 속성 따위를 추출하여 파악하는 작용”이라면, 유영국에게 그 대상은 산이었다. 그는 산을 포함한 한국의 자연을 점, 선, 면, 색 등 그림의 기본 요소로 환원하면서 ‘색면추상’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종종 “산 자체가 그림에 존재하는 모든 요소, 즉 직선, 곡선, 빛 등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고 말했는데, 실제로 삼각형 형태로 단순화된 산, 원으로 표현된 빛, 직선의 나무 같은 기하학적 형태들은 마치 내면에서 발현하는 듯 순도 높은 다양한 색을 통해 밝음과 어둠, 절망과 희망, 구속과 해방 같은 상징성을 얻는다. 무엇보다 그가 구현한 선과 면의 질서는 매우 정교하고, 색의 조합은 1916년에 태어난 화가의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동시대적이다. 그에게는 산을 그린다는 것 자체가 그림을 그린다는 행위를, 그리고 그림을 열망했던 생 자체를 추상화한 결과물이었다. 
 
유영국의 전작을 다룬 모노그래프 〈Yoo Youngkuk: Quintessence〉가 한국 작가로는 처음으로 리졸리 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는 사실은 그래서 매우 유의미하다. 부제 그대로 유영국의 ‘정수’를 찾아 엮어낸 편집자 로사 마리아 팔보는 서문에서 언급한다. “유영국의 작품 속 형태들은 특정한 사물에 얽매이지 않은 채 유동적으로 진화하는 동시에, 그 기하학적 구조들로 작가 표현의 결정체를 만들어준다. 자연은 그에게 영감이 되었으며, 경이로움과 겸손함을 토대로 한 이 특별한 유대는 그가 살면서 경험한 파괴와 비극을 향한 갈망에 맞서는 이로운 해독제 역할을 해주었다.” 나는 출간 시점에 맞춰 관련 영상 제작을 디렉팅했다. 담당자들은 유영국이 그린 그림 속 산과 최대한 비슷한 산을 찾아보겠노라 나섰다. 사진 대여 사이트를 뒤졌고 급기야 강원도까지 찾아가기도 했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방방곡곡을 다니며 항공촬영까지 불사했더라도 그의 그림 속 산과 똑같은 산을 찾아낸다는 건 애초에 불가능했을 것이다. 유영국은 산을 ‘재현’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산은 내 앞이 아니라 내 안에 있다”는 명언을 남긴 그가 그린 산은 실재하는 산이 아니라 그의 마음에 존재하는 산이다. 관념 안에 맥락 없이 덩그러니 갇힌 산이 아니라 고단한 인생과 강퍅한 시대적 상황, 미술에 대한 열정과 현실의 한계 등이 치열히 충돌하고 갈등하여 마침내 조화를 이뤄낸 살아 있는 산이다. 이 유일무이한 산은 유영국에게 독자적이고도 절대적인 세계였다. “산을 그리다 보면 그 속에 굽이굽이 길이 있다. 꼭 나의 인생 같다. 내 그림 속 산에는 여러 형상의 삶이 숨겨져 있다.”(〈아뜰리에〉 Vol. 36) 작가의 자아성찰적 소회는 추상의 숨은 의미, 즉 “세상을 해석하고 살아내는 고유한 논리를 창조하는 과정”임을 실감하게 한다.
 
미술계도 어떤 분야만큼이나 스타를 원하는 곳인데 비해, 유영국이 다른 근대 작가들에 비해 많이 알려지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평론가들은 그를 “이렇다 할 장식도, 수사도, 기교도 없이 과묵하게 살아온 작가” 혹은 “수도원의 수사”라 기술했다. 물론 유영국은 미술계 혁신을 위해 활동을 도모하고, ‘한국성’을 세련되게 표현한 흔치 않은 모더니스트였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그에게는 세상이 기대하는 문학적 신화나 낭만적 기행담이 없었다. 그는 해방과 전쟁 전후 낙향과 상경을 반복한 십 수 년의 시간 동안 붓을 꺾었다. 결혼을 하고, 아이들을 낳고, 양조업과 어업 등에 종사하며 생계를 책임지는 ‘진짜 아버지’였던 것이다. 덕분에 그는 1964년 지천명의 나이에서야 첫 번째 개인전을 열 수 있었다. 예상하겠지만, 미술제도에 편승해 출세하고자 하는 욕망도 없었다. 당시 구태의 상징이었던 ‘국전’에 반대하는 전시에 참가하기 위해 서울대 미대 교수직을 내던졌고, 작업할 시간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홍대 미대 교수직을 버렸다. 작품 제목조차 인상적일 정도로 담백한데, 거의 대부분은 ‘작업(Work)’이고 간간이 ‘산’ ‘바다’ 등이 섞여 있는 정도다. 
 
그런 점에서 1968년 11월 21일자 〈코리아타임스〉에서 주디 노스가 쓴 바는 지금도 유효하다. “유영국 그림의 표면은 순수하고, 이는 화가 자신의 진실성을 증명한다. 지난 20년 동안 재능 있고 사려 깊은 사람의 헌신적인 작업은 요즘 현대미술가들이 획득하는 보상을 받지 못했다. (중략) 여기, 자연과 조화를 이룬 한 남자가 있다. 그는 결핍된 세상에서 열정과 성실함을 진술한다. 거짓된 겸손은 없다. 그가 스스로 배운 모든 것, 그리고 현재의 예술계에서 얻지 못한 모든 것. 그가 말하는 바는 거칠지만 순수하고 한국적이다.”예술과 삶을 같은 보폭으로 걸은 유영국의 그림은 필수불가결하게 서양의 추상미술가들이 당연시하는 ‘숭고(sublime)’의 미학을 떠올리게 한다. 다만 예컨대 마크 로스코의 숭고미가 막연하고 아득하며 환상적이라면, 유영국의 숭고는 이 땅에서 나고 자란 자만이 공감할 수 있는 역사와 기억, 그 한편에서 터져 나오는 탄식이다. 바람과 서리를 맞으며 선 나무 한 그루도 어여삐 여길 줄 아는 서정, 그 고독함과 초연함에 감탄할 줄 아는 성정의 작가는 본인 입으로 ‘숭고’라는 단어를 내뱉은 적 없었다. 그에게 그림은 초월의 대상이 아니라 현실의 대상인 동시에 삶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추상의 과정을 거쳐 거추장스러운 옷, 장신구, 심지어 살점까지 다 걷어낸 후에 남은 뼈대는 곧 본질을 의미한다. 유영국의 산 그림 앞에서 받는 감동을 ‘숭고’라 부를 수 있다면, 이는 그림을 그린다는 것과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것의 본질을 평생 탐구한 자를 향한 경외나 다름없다.
 
나는 항상 60세가 될 때까지 그림의 기본을 탐구하다가 자연으로의 회귀를 통해 좀 더 부드러운 접근을 재개하겠다는 생각으로 그림을 그려왔습니다. 그림 앞에 서면 늘 새로운 각오와 흥분으로 팽팽한 긴장감이 느껴집니다. 다시 태어난 것처럼 말이죠. 저는 죽는 날까지 이 긴장의 끈을 제 마음속에 단단히 묶으면서 제 일을 계속할 것입니다. (〈Yoo Youngkuk 1916~2002: The most beloved painter in Korea〉 中, 마로니에 북스)



유영국은 스스로 베테랑인 양 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평생을 이제 막 붓을 든 화가처럼 살았다. 오래 바라보고 끝까지 생각한 사람의 웅숭깊은 애정으로, 세상의 인정을 받는 대신 삶과 예술을 자기 의지대로 끌고 나가려고 노력한 사람만이 완성할 수 있는 세계를 일구었다. 하지만 만약 그가 묵묵한 노동자처럼 그림을 그리지 않았더라면 그의 그림이 이렇게 곡진할 수 있었을까. 누군가가 ‘재능 있다’는 건 끝까지 성실하고 순수하다는 것과 동의어임을, 유영국은 온 생으로 증명했다. 물론 그사이 시절이 많이 변했다. 세상은 ‘근면성실’의 미덕을 시대착오적이라 치부하거나, 빛나는 재능을 위한 기본값 정도일 뿐이라고 위악을 떤다. 기본보다는 기교를 높이 사고, 현실의 두려움 때문에 자유와 자율성을 회피하며, 자신과 자만을 구분하지 못하고, 순수함이 비웃음의 대상이 되는 세계에서 우리도 문득문득 그렇게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누구나 자기 삶을 고유한 방식으로 살아내는 예술가가 될 수 있다고 호언장담해왔다. 그러나 유영국처럼 순수하고 성실한 예술가가 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인정해야겠다. 물론 그런 사람이 되긴 더 힘들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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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 에디터/ 손안나
  • 글/ 윤혜정
  • 사진/ 안천호
  • 이미지 제공/ 국제갤러리
  • 웹디자이너/ 한다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