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의 끝, 잔잔한 위로가 되는 시집 5권
올겨울, 사랑하는 이에게 선물하기 좋은 신작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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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이 다가오고 차가운 겨울이 깊어질수록 마음을 데워줄 한 권의 시집이 간절해진다. 올 겨울, 사랑하는 이에게 선물하기 좋은 다섯 권의 신작 시집을 소개한다. 너무 아름다워서 처연한 시(詩)와 시인의 이야기가 한 해의 끝자락에 잔잔한 위로와 울림을 선사할 것이다.
<비신비>, 백은선
사진/ 문학과지성사
시인 백은선의 다섯 번째 시집이다. ‘비신비’라는 제목은 그녀의 첫 시집 <가능세계> 때부터 이어져 온 연작시의 제목으로, 말 그대로 “신비롭지 않음”을 뜻한다. 제목에서 짐작되듯이 이번 시집은 새로운 관점으로 세상을 해석하기보다는 우리가 모두 알고 있지만 쉽게 입에 올리지 못했던 감정들에 집중한다. 시인의 솔직하면서도 알쏭달쏭한 시어처럼, 어쩌면 우리의 매일은 설명할 수는 없지만 결코 없던 일로 할 수 없는 감정들로 가득 차 있는 게 아닐까. 매 순간 느끼지만 누구 앞에서도 쉽게 꺼낼 수 없었던 속내들이 마치 토하듯 쏟아져 나온다. “백은선의 거짓에 속아서는 안 된다. 백은선이 담담히 세상의 진실 같은 걸 알아버린 사람처럼 굴고 있다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 백은선은 분명 당신이 노래를 따라 부르기를 원하고 있다. 백은선이 원하지 않는다면 내가 원한다. 그러니 여러분이 다음으로 해야 할 일은 이것이다. 백은선의 시집을 해로운 시집 취급하라.”는 시인 시집에 실린 김승일의 글은 틀리지 않다. 그만큼 백은선의 시는 읽는 이를 쉼 없이 언어의 소용돌이 속에 끌고 들어가 감정의 여백조차 남겨두지 않는다. 고통과 절망을 낱낱이 드러내면서도 사랑만큼은 누구도 심판하지 않는 시선이 시집 전반에 흐른다. 모든 것을 다 태우고, 남은 재 속에서 끝끝내 찾아낸 작은 진실들을 특유의 강렬한 언어로 우리 앞에 내보인다.
에디터가 밑줄 친 시구
」“정확해지고 싶어서 노래하기 시작했는데 어디서부터 틀려버린 걸까 우리는”
“나는 가끔 내가 거대한 솥에서 끓고 있는 낙엽 같아”
“예전에는 사랑은 잿더미를 뒤지는 손이라고 썼는데, 이제는 타오르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
“내가 눈 감을 때 네가 무엇을 빌었는지 결코 알 수 없을 거라는 게 그게 사랑이라서”
<뭐 사랑도 있겠고, 인간 고유의 특성: SF 시집> , 김혜순 외
사진/ 허블 제공
언뜻 보면 어울릴 것 같지 않은 SF 장르와 시의 만남을 실현한 SF 시집이다. 종과 개체, 퀴어, 생물성, 변신 같은 말들이 등장하며 “인간이 인간으로 남기 위해 얼마나 많은 것을 상상해야 하는가”를 질문하게 한다. 김혜순, 신해욱, 이제니부터 서윤후, 고선경 등 요즘 주목받는 12명의 시인이 참여해 시적 상상력과 SF적 상상력의 접점을 모색한 작품 36편을 한데 모은 앤솔로지 형식이다. 시적인 것과 SF적인 것의 이질적인 결합에서 오는 낯섦과 경이로움이 독특한 매력을 선사한다. 종과 개체, 퀴어, 생물성, 변신, 자연, 우주, 무한, 외계, 시간, 타자, 사랑 등 우주적 상상력과 인간 보편의 정서를 아우른다. 시는 직관의 언어로 세계를 단번에 변화시키는 힘을 보여주고자 했다. 작가들의 개성이 뚜렷한 시를 한 권에 담되, 어떤 작품이 누구의 것인지 표기하지 않고 흐름에 따라 엮어 놓은 편집 방식도 흥미롭다. 시인이기도 한 안태운 편집자가 “구성에 따라 시가 가지고 있는 ‘SF성(性)’이 강화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SF와 시의 경계를 허문 실험적 시도는 겨울 밤에 어울리는 오묘하며 낯설고 아름다운 여운을 남길 것이다.
에디터가 밑줄 친 시구
」“아! 나 아닌 것 되기란 인간이기에 벌을 받는 것인가 그러고 보면 오직 인간만이 돈으로 죄를 산다”.
- 김현, ‘죄인 되기’ 중 -
"우주는 강아지가 산책하는 넓은 운동장. 우주는 강아지가 산책하는 넓은 운동장. 무서운 마음이 들 때마다 나는 그렇게 상상해요.”
- 조시현의 '크런치' 중 -
“내가 오늘 들고 있을 부케는 우주대폭발/ 한 아름에 받을래? ... 함께 흩어질 수도 있어 우리의 소원처럼”
-서윤후, '드론과 결혼하기' 중 -
<29.9세>, 고선경
사진/ 난다 제공
서른을 앞둔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고 나서야 비로소 “아, 나만 이런 건 아니었구나”라고 말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번 12월이 지나면 나는 서른 살이 된다”는 통과의례를 담고 있다. 스물아홉의 겨울날 겪는 두근거림과 불안, 아픔과 설렘을 특유의 유쾌한 입담과 시적인 패기로 그려낸다. 2022년 등단 이후 왕성하게 활동하며 두 권의 시집을 펴낸 고선경 시인은 이십 대의 마지막을 마주한 솔직한 속내를 시와 산문, 일기와 편지 형식으로 풀어냈다. 한 해의 끝자락이자 청춘의 끝인 12월을 ‘0.1의 가능성에 기대어 영영 꿈꿀 수 있는 달’로 그리며, 끝나버린 사랑들과 끝나지 않은 사랑들, 그리고 끝내주게 멋진 사랑까지 담아낸다. 눈보라 휘몰아치는 황량한 거리에서 대차게 넘어지고 깨지더라도, 구질구질해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기대를 거는 용기를 택한다. 아이돌을 가까이 보지 못해 가슴 아파하다가도, 그저 그런 맛의 간식을 더 맛있게 먹는 법을 찾아내며 일상의 소소한 행복을 놓지 않는다. 서른을 앞둔 이들에게 특별한 공감과 위로를 건넬 것이다. 시, 산문, 일기, 메모가 섞여 있어서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에디터가 밑줄 친 시구
」“내가 취한 게 아니고 십이월의 나무들이 알전구를 감았어요 하루아침에 겨울이 온 게 아니듯이 순식간에 어질러진 마음 아니고 빈 가지에 걸린 심장처럼 포도송이 열린 거예요”
“읽을 대상을 상정한 뒤 그를 재빨리 사랑해 버리는 식으로 대출받은 사랑의 힘 말이에요”
“다들 어떤 멋진 사랑에 속아 넘어가는 것 같고, 나에게는 틀림없이 통해서, 그래서 너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잖아”
<작약과 공터>, 허연
사진/ 문학과지성사 제공
허연 시인의 전작 <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 이후 5년 만에 펴낸 여섯 번째 시집이다 1991년 등단 이래 날카로운 감수성과 짙은 여운을 남기는 세련된 문체로 평단과 독자의 사랑을 받아온 허연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한층 깊어진 미학을 보여준다. 제목에 등장하는 ‘작약’(모란의 한 종류)과 ‘공터’의 대비가 암시하듯 시인은 여운이 진동하는 고요한 공터에 홀로 서서, 삶의 비극을 온몸으로 마주할 투지를 다진다. “보호색처럼 온몸을 슬픔의 색으로 무장하고 기꺼이 슬픔의 한가운데로 섞여 들어가려는 어떤 결심”으로 전쟁 같은 현실의 차가운 풍경들을 조심스레 끌어안는다. 무엇보다 시집에 수록된 66편의 시에서는 고통을 외면하지 않겠다는 어떤 용기가 묻어난다. “벌어질 일은 반드시 벌어진다”는 체념 어린 진술에서 시작해, 죽은 참새 옆에 핀 작약을 “살아서 바라보”는 시인의 목소리에는 삶의 비극을 끝까지 지켜보겠다는 책임의식이 배어난다. “시는 그랬다. 모든 시는 불온해야 하고 모든 시는 자유로워야 한다.” 는 허연 시인의 말에서 한복판에서 피어난 붉은 작약처럼, 처절하면서도 눈을 뗄 수 없는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읽고 나면 묵직하고 슬픈 여운이 오래도록 남아, 공터와 같은 허무한 매일을 보내는 이에게 삶을 다시 들여다보게 만들 것이다. 시집이 지닌 슬픔은 설명되지 않을지라도.
에디터가 밑줄 친 시구
」“나는 살아서 작약을 본다
어떨 때 보면
작약은 목매 자살한 여자이거나 불가능한 목적지를 바라보는 슬픈 태도 같다”
“어른이 되어 더 슬퍼졌지만 슬픔은 여전히 더 갈 데가 있는 것 같다"
"슬프겠구나"라고 말하면 슬퍼지는 것들이 있었다”
“이제는 죽어서 고체가 된 사랑에게
우리가 먹었던 것들과
우리가 파묻었던 것들에 관해 말해주고 싶었다”
<모텔과 나방>, 유선혜
사진/ 현대문학 제공
문단의 라이징 스타, 시인 유선혜의 두 번째 시집이자 2025 문지문학상 수상작이다. 그의 전작 <사랑과 멸종을 바꿔 읽어보십시오>보다 시각을 넓혀, 다종다양한 사랑과 이별의 방식을 면밀히 관찰하며 그로부터 파생한 고통과 상처, 병리적 현상을 다룬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모텔'이라는 특수한 공간을 인간의 욕망, 폭력성, 내재화된 허위와 혐오 의식이 교차하는 우리가 사는 세상의 축소판과 같은 공간이다. 그 안에서 우리는 빛을 등지고 살아가는 나방으로 스스로를 인식하게 된다. 그럼에도 빛을 향해 나아가려는 인간의 고군분투와 쉽지 않은 삶에 대한 이야기를 온전히 담았다. 배우 심은경이 "이 시집을 꼭 안아주고 싶었다"고 추천했듯이, 유선혜 시인의 시는 단지 한없이 우울하고 좌절스러운 이야기가 아니다. ‘모텔’ 연작이 강렬하고 인상적이긴 하지만 전부는 아니다. “자신 스스로에게 못되게 굴었으나 결국 잘 살아가고 싶어서 그랬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을 이야기하고 싶었다”는 시인의 솔직한 자기 고백에서 스스로를 마주하고 또 보듬어주고 싶어진다. 그 마음이 곧 사랑이자 삶이기 때문에, 우리를 계속 살아가게 할 것이다.
에디터가 밑줄 친 시구
」“빛을 등지기
서로가 서로에게
완벽한 무의미로 남기
그러니까 나는 그냥 살고 싶었던 것 같아”
“너의 천재적인 결핍을 누구보다 사랑한 사람이 나라는 걸, 너의 우울을 읽는 최초의 독자이고 싶었다는 걸.
네가 어떻게 알아챘을까?”
“아름다운 것을 아름다울 때 알아챌 수 있다면
물과 빛
산성과 열에 취약한
동그란 미래가
부식되기 전에
믿어볼 수 있다”
Credit
- 사진/ 각 출판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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