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준이 7년 만에 펴낸 시집 '마중도 배웅도 없이'에 담긴 속사정
내는 책마다 이례적인 판매 부수를 기록한 문단계 아이돌, 박준이 전혀 다른 스타일의 시집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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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곡과 곡해의 시 쓰기
시는 모난 데 없이 완만하며 부드럽고 때로는 의뭉스럽다. 해가 저물고도 소란한 여름밤, 박준은 7년 만에 펴낸 시집 <마중도 배웅도 없이>를 앞에 두고 나직하게 말을 잇는다. 명료하게, 그러다 휘휘 에두르기도 하면서 끝내 가만히 듣게 만든다. 박준은 시를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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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퍼스 바자 인터뷰를 청하는 메일에 “시를 쓰는 박준입니다”라는 인사말로 시작하는 답신을 보냈다. 오랜 시간 박준이 쓰는 시와 산문에는 뚜렷한 경계가 없다는 생각을 해왔던 독자로서 가장 먼저 묻고 싶었다. 스스로를 작가가 아닌 ‘시를 쓰는’ 사람으로 명명해야 하는 이유가 있는지.
박준 현대에 가까워질수록 시와 산문의 경계는 더 흐려지고 있다. 그런데 쓰는 사람 입장에서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으려면 구별이 명확해야 한다. 나에게도 시를 쓸 때와 에세이를 쓸 때, 그리고 생활인으로서 생계 유지를 위한 일을 할 때를 구분 짓는 명확한 선이 있다. 그중 가장 먼저 시작한 건 시를 쓰는 일이며, 어느 때보다 시인일 때 예민해진다. 그러니 시를 쓰는 사람이라고 밝히는 것은 내가 나를 보다 예민한 상태로 고양시키려는 일종의 선언인 것이다. 오늘 인터뷰와 촬영에도 그렇게 임하고 있다.
하퍼스 바자 신간 <마중도 배웅도 없이>는 2018년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 이후 쓴 세 번째 시집이다. 그 사이에는 그림책과 산문집도 한 권씩 냈지만 ‘시를 쓰는 박준’으로 따지면 7년 만의 신간이다. 왜 이렇게 오래 걸렸나?
박준 딴짓을 많이 했다. 7년 중 3년은 어떤 의미에서 시와 담을 쌓고 살았다. 심야 음악 방송 라디오 디제이이자 작가로 살 때였는데, 매일 섭외부터 오프닝, 클로징까지 두 시간짜리 생방송 대본을 써야 했다. 매일 마감이 있는 삶을 살게 된 것이다. 그때 내 하루는 오직 라디오 방송을 중심으로 돌아갔다. 라디오와 시의 화법은 엄연히 다르기 때문에 시는 삶의 우선순위에서 저만치 멀어졌다. 사실 시가 지겹기도 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에게 닥친 어떤 사건이나 마음을 흘려보내지 못하고 굳이 눈앞으로 불러다가 살피는 일에 신물이 난 것이다. 그냥 넘기면 될 것을. 그러다 어느 순간 시를 써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멀리 밀어버릴 땐 속 편했는데, 다시 내 삶의 중심으로 끌어오려니 잘 안 온다. 시가 안 써지는 것이다. 결국 나머지 4년은 부단히 당기는 시간으로 썼다. 솔직히 시를 처음 썼던 스무 살과 비교하면 시를 대하는 온도가 많이 식었다. 그때 내 인생은 시가 아니면 안 되고, 시랑 결혼이라도 하겠다는 정말 뜨거운 마음뿐이었거든.(웃음) 지금은 내가 어떤 선택을 해도 영영 시와 멀어지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으니 이렇게 자발적으로 밀어냈다가 원하는 때 당겨볼 수도 있었다.

나는 일상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전위적이거나 미학적인 것으로 도약해 표현하는 시인은 아니다. 하지만 뭇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을 감각하되, 조금 더 천천히, 세밀하게 말하는 능력쯤은 있다고 생각한다. 나만 그런 줄 알았던 내밀한 감정, 책 밖에서 느꼈던, 그 여전한 기분을 세심하게 건드리는 방식이 통한 것 아닐까.
하퍼스 바자 지난한 밀당의 시간을 거쳐 만들어진 <마중도 배웅도 없이>는 지난 두 권의 시집과는 확연히 달라졌다. 훨씬 건조하고 직설적이다. 책의 마지막 장인 4부가 특히 그런데, 직접적으로 아버지의 장례식을 언급하는 ‘블랙리스트’ 같은 시는 당신의 시집에서 처음 보는 스타일이다.
박준 시를 쓸 때 비뚤어져 있어서 그렇다. 그간 사랑하는 가족의 죽음부터 상주가 되어야 하는, 혹은 상주 같은 마음으로 누군가의 죽음을 목도해야 하는 상황이 여럿 있었다. 상실과 슬픔 앞에선 감정이 적당히 말랐을 때, 그러니까 치기와 분노, 욕심이 사그라들었을 때 쓰는 것이 보통인데 이번에는 달랐다. 슬픔이든 상실이든, 희한하게 익숙해지지가 않는 것이다. 속에서 연신 비명 같은 것들이 터져 나온다. 어쩔 수 없는 강렬함 앞에서 울음 말고 할 수 있는 건 시를 쓰는 일뿐이니 눈물을 훔치는 심정으로 비명 대신 침묵을 택했다. 목 놓아 토해내고 싶은 인생의 일들이 1부터 10까지 펼쳐져 있다면 3까지만 이야기하고 나머지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는 것이다. 그래서 조금 더 건조하고 불친절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전략은 아니다. 시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밀려오는 상실감에 가깝지.
하퍼스 바자 직설할 바에 침묵하는 것. 당신이 생각하는 시의 화법인가?
박준 시의 전범을 정하겠다는 생각 같은 건 결코 없지만, 적어도 시적이지 않은 것들은 있다고 생각한다. 직설은 다른 생각을 못하게 만든다. 하나의 생각에 꽂아버리는 건데, 그건 시적이지 않다. 읽고 나서 고개가 한껏 갸웃해지는. 저마다의 여백과 여지를 두는 게 좋은 시의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마음을 전하고자 ‘사랑해’라고 적은 쪽지를 책상에 올려둔다면 상대는 장난인 줄 알 것이다. 그렇다고 종이 한 바닥을 깨알 같은 ‘사랑해’로 채운다면? 겁에 질리겠지. 신기하게도 인간의 어떤 마음은 부정확하게 전달할수록 정확히 닿는 경우가 많다. 이 방식이 가장 잘 적용되는 분야가 시를 포함한 문학예술이다. 사랑을 우리가 아는 모범적인 하트 도형으로 표현한 회화작품을 본 적이 있나? 그보다 사랑과는 무관해 보이는 이미지를 두고 이것이 왜 사랑인지를 파고들게 만드는 식이겠지. 내가 생각하는 시의 표현법도 그렇다. 그리고 이 표현법이야말로 전하고자 하는 주제를 가장 아릅답게 보여주는 방식이라 생각한다.

니트 톱은 Lemard. 셔츠는 Draw-Fit. 팬츠는 Konzert. 슈즈는 Remagine.
하퍼스 바자 지난 두 권의 시집에 비해 제목이 비교적 짧아지기도 했다. 이 또한 더 많은 여백을 위함인가?
박준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 16글자 제목의 시집 두 권이 판매 측면에서는 흥행에 성공하지 않았나. 공교롭게도 이번 시집에 처음 지었던 제목 역시 16글자였다. ‘시간은 우리를 어디에 흘리고 온 것일까’. 이 또한 판매는 되겠구나.(웃음)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생각이 바뀌었다. 몇 권 더 팔려서 뭐하겠나, 책을 한 번에 꿰뚫을 수 있는 정직하고 담백한 제목을 지어야지. 나는 마중과 배웅을 좋아한다. 행사나 강연을 하며 전국을 돌아다닐 때 가장 좋아하는 순간은 역이나 터미널, 공항에서 배웅과 마중을 나온 사람들을 보는 것이다. 그런데 가만 보면 결국 마중이든 배웅이든 같은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기차를 떠나 보내고 한동안 앉아 먼 곳을 응시하는 사람들, 이제 막 역에 도착해 기다림을 시작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비슷하게 닮아 있다. 마중도 배웅도 할 겨를 없이 들이닥친 일련의 일들을 겪으며 느낀 것은, 언뜻 무용해 보이는 그 시간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다는 것이다. 살면서 더 많은 마중과 더 많은 배웅을 나가고 싶다는 마음으로 제목을 붙였다.
하퍼스 바자 “박준의 시는 읽는 것보다 머무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던 어느 독자의 말에 공감한다. 이 책 안에서 당신을 가장 오래 붙잡아 두었던 시는 무엇인가?
박준 ‘섬어’라는 제목의 시가 있다. 섬어는 아플 때, 혹은 잠에 취해 있을 때 하는 헛소리 같은 건데, 한 시절 나에게 가장 가까웠던 말이 상대가 사라지는 순간 가장 먼 말이 된다는 생각을 하다 쓴 시다. 누군가의 호칭일 수도, 별명일 수도 말버릇처럼 어떤 사람 앞에서만 쓰는 말일 수도 있다. 하다못해 전 애인의 애칭만 해도 헤어진 뒤엔 다시 발음할 일이 없지 않나. 바로 그런 것이다. 말은 내가 하는 것 같지만, 사실 소유는 상대에게 있을 때가 많다. 상대가 멀어지면 말의 소유권도 같이 이전되는 것이고.
하퍼스 바자 첫 시집부터 22만 부라는 기록적인 판매 부수를 달성한 이후, 두 번째 시집도, 이후 발간한 산문집도 연이어 흥행에 성공했다. 당신의 시와 산문이 보통의 다수를 설득할 수 있었던 힘은 어디에 있다고 보나?
박준 나는 일상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전위적이거나 미학적인 것으로 도약해 표현하는 시인은 아니다. 하지만 뭇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을 감각하되, 조금 더 천천히, 세밀하게 말하는 능력쯤은 있다고 생각한다. 문학예술 작품에서 누구나 참신한 충격만 기대하는 것은 아니다. 나만 그런 줄 알았던 내밀한 감정을 짚어주길 원하는 사람도 있다. 책 밖에서 느꼈던, 그 여전한 기분을 세심하게 건드리는 방식이 통한 것 아닐까. 내게 세팅되어 있는 기본적인 삶의 태도인 것 같다. 지금처럼 한 마디로 끝내도 될 것을 부연 설명을 덧붙여가며 어렵게 만드는 게.(웃음)
하퍼스 바자 “시만 쓰는 시인은 없다”는 말이 있다. 생계를 위해 시를 쓰는 일 외에 다른 일을 병행하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얘기인데. 문단계 아이돌이라 불리는 당신 역시도 현재 출판사 창비에서 문학전문위원 일을 함께 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 말은 사실일지도 모른다. 당신은 이를 축복이라 말한 적이 있다. “문학이 가진 큰 힘 중 하나는 아무리 성공해도 삶이 달라지지 않는 것”이라면서.
박준 사람이라면 누구나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집과 타는 차, 내 삶의 물리적인 환경이 몇 차례 도약하기를 바란다. 물론 나에게도 그런 욕망은 늘 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변화는 사람을 높은 곳으로 올려두기도 하나, 한순간에 삶의 리듬을 깨뜨리기도 한다. 나처럼 내공 없는 인간은 안하무인이 되거나, 건방져지거나, 잡기를 탐색할지도 모르지. 그런 말을 한 이후로도 책이 얼마나 많이 팔렸는지 모른다. 하지만 어제 썼다고 오늘 쓰지 않을 것이냐? 결코 그렇지 않다. 현실적으로 내 삶을 바꿀 만한 변화는 없다. 글 안 쓰고 쉬엄쉬엄 놀면서 살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내가 세 번째 시집까지 호평을 들었다 한들, 다시 백지를 마주하는 것이 내 일이다. 문학에는 끊임없이 쓰는 사람의 목덜미를 붙잡고 자리로 앉혀두는 힘이 있다.
하퍼스 바자 4년 전 <계절 산문>을 출간한 해에는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시 그림책 <우리는 안녕>도 펴냈다. 요즘에는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강연도 다닌다고. 유년기, 청소년기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집필과 대외 활동에 지속적인 관심을 보이는 이유는 무엇인가?
박준 내 첫 번째 역할은 좋은 시를 쓰는 것이고, 그 다음은 ‘이런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리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세계 중 하나는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문학이다. 세상은 아주 오래전부터 문학의 위기를 거론해왔지만, 사실 문학에는 한 번도 위기가 온 적이 없다. 책이 안 팔린다고? 그건 위기라고 할 수도 없다. 지금껏 문학이 잘 팔린 적은 없었으니까. 문학의 위기는 좋은 작품이 나오지 않을 때 온다. 주목을 받든 못 받든 지금도 좋은 작품들은 끊임없이 세상에 나오고 있고, 이를 알리는 것은 분명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강연을 다니는 건 아이들의 인생의 난이도를 조금이라도 낮춰주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다. 꿈과 직업이 동일할 필요는 없다고, 시인이나 작가가 아니더라도 마음을 풍부하고 다채롭게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을 해주고 싶다. 극도의 아름다움이나 쾌감, 희열 앞에서 ‘찢었다’ ‘미쳤다’ 두 가지의 말밖에 할 수 없다면 삶은 결국 앙상해진다.
하퍼스 바자 문학, 그중에서도 시가 계속 쓰이고 읽혀야 하는 이유가 있다면 무엇일까?
박준 뱉는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하는 마음은 시로 짓고 노래로 부른다. 적어도 인간이 사랑하는 마음을 진실히 표현하고자 고민하는 한, 시와 노래는 영원히 남을 것이라는 얘기다. 일상의 화법은 나날이 날카로워지고 있으니 시나 편지처럼 완곡하고 부드럽고 오독의 소지가 많은, 다양성이 한껏 열려 있는 화법은 더 필요하다. 저 어두운 골목길에서 어쩌다 어깨를 부딪힌 사람이 주먹을 쥐는 대신 문학적으로 분노를 표현할 수 있다면 세상은 훨씬 나아지지 않을까.
하퍼스 바자 책을 출간한 지 두 달이 흘렀고, 눈 깜짝할 새 여름이 왔다. 다시 마주한 백지에는 어떤 것을 쓰고 있나?
박준 책을 출간할 계획으로 쓰고 있는 것이 있다. 내가 좋아하는 시에서 출발한 감정들을 산문으로 적어보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설을 하는 건 아니고, 내가 좋아하는 이유를 보여주며 시를 이렇게도 읽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쪽에 가깝다. 언제 보여드리겠다 확언은 못하겠다. 주로 밤에 글을 쓰는데 밤이 짧은 계절이 왔으니. 이럴 땐 가장 좋은 핑계인 내년을 대는 수밖에.
Credit
- 사진/ 박규태
- 헤어 & 메이크업/ 장하준
- 스타일리스트/ 김한비
- 어시스턴트/ 유정아
- 디자인/ 한상영
- 디지털 디자인/ GRAFIKS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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