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언제나 현재진행형, 데이비드 호크니와 나눈 대화

지난 25년을 돌아보는 파리 루이 비통 재단 미술관에서의 대규모 회고전을 앞두고.

프로필 by 손안나 2025.04.29

데이비드 호크니, 장르가 되다


87세의 나이에도 창의력이 끓어오르는 현재진행형 예술가. 데이비드 호크니의 지난 25년을 돌아보는 회고전이 파리 루이 비통 재단 미술관에서 열린다. 로스앤젤레스의 에메랄드빛 수영장, 사랑하는 이들의 초상, 짙은 녹음이 우거진 영국 시골, 투명한 물과 그로부터 반사되는 빛. 그의 작품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자연을 주제로 삼은 전시를 앞두고, 작가와 나눈 대화.


커다란 사이즈의 뿔테 안경, 클레롤 광고에서 영감을 받아 노랗게 물들인 머리, 형형색색의 스타일과 짝짝이 양말. 1970년대부터 ‘악동’ 데이비드 호크니는 이미 팝 문화의 아이콘이었다. © Jack Garofalo, Parismatch, Scoop.

커다란 사이즈의 뿔테 안경, 클레롤 광고에서 영감을 받아 노랗게 물들인 머리, 형형색색의 스타일과 짝짝이 양말. 1970년대부터 ‘악동’ 데이비드 호크니는 이미 팝 문화의 아이콘이었다. © Jack Garofalo, Parismatch, Scoop.

“나는 현재를 살고, 현재를 그린다.” 현대미술계의 슈퍼스타, 데이비드 호크니가 줄곧 해오던 말이다. 여든일곱이라는 나이가 무색하게 호크니의 열정은 여전히 뜨겁다. 팝 문화의 아이콘이 된 비틀스나 믹 재거를 모르는 사람이 없듯, 끊임없이 변화하는 작품과 자유로운 반항 정신은 대중과 컬렉터들의 사랑을 받았고, 비평가들에게는 뒤늦은 인정을 받았다. 호크니의 작품은 다가오는 봄날 파리 루이 비통 재단 미술관의 벽을 색색이 물들일 것이다. 이번 전시는 캘리포니아의 볕에서 영감을 받은 호크니의 수영장 시리즈, 그중에서도 전설적인 작품으로 회자되는 <A Bigger Splash>부터 시작된다. 자기 자신과 어머니, 반려견, 친구들, 연인들의 초상화 시리즈와 큐비즘을 연상케 하는 폴라로이드 콜라주, 그의 도피처였던 노르망디의 사계절을 생생히 담아낸 벽화까지. 호크니는 가능한 모든 혁신적 기술을 활용해 이미지를 만들며 발전해왔다. 2018년 호크니의 <Portrait of an Artist (Pool with Two Figures)>는 크리스티 경매에서 9천30만 달러(한화 약 1천306억원)에 낙찰되며 현존하는 아티스트의 작품 중 최고가 기록을 갈아치웠다. 구상화의 천재이자 마티스에 버금가는 색채 예술가. 젊은 시절 테이트 모던에서 피카소의 전시를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는 그는 동시대 자유의 아이콘이 되었다. 다비도프 담배를 즐겨 피우는 그는 1960년대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받아들이고 자유를 찾아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해 꿈꾸던 삶을 살기 시작했다. 빨강·초록·노랑·파랑 색채, 물방울과 줄무늬, 시그너처나 다름없는 치켜올린 넥타이, 짝짝이 컬러 양말, 저항할 수 없는 사랑스러운 얼굴, 노란색으로 물들인 부스스한 머리와 둥근 안경까지. 젊은 시절 귀여운 괴짜 스타일을 고수한 탓에 한때 ‘파티 보이’라는 오해를 받기도 했던 그는 화가 앤디 워홀, 패션 디자이너 오시 클라크, 영화감독 토니 리처드슨, 빌리 와일더, 조지 큐커, 존 슐레진저와 어울렸지만, 사실 누구보다 철저하고 집요한 예술가였다. 밤 9시면 잠에 든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로. 이제 트위드 정장에 캡모자를 눌러쓴 백발의 호크니는 자신의 인생을 이렇게 요약할지도 모른다. “나는 그림을 그리고 담배를 피운다. 평생 그렇게 살아왔다.”


<Christopher Isherwood and Don Bachardy>, 1968. Courtesy of David Hockney, Photo: Fabrice Gibert.

<Christopher Isherwood and Don Bachardy>, 1968. Courtesy of David Hockney, Photo: Fabrice Gibert.

당신은 20세기와 21세기를 대표하는 거장입니다. 어떻게 지금과 같은 인정과 인기를 얻게 되었다고 생각하나요? 공간을 이해하는 방식 덕분이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저는 공간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단순하지 않다고 느낍니다. 그리고 그 공간을 평평한 표면 위에 표현하는 것이 늘 매력적이었어요. 이렇게 해온 지도 벌써 70년째네요. 캔버스 밖의 사람들을 캔버스 위에 그대로 투영한 것도 하나의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의 머릿속에 들어가볼 수 없으니, 인정과 인기를 얻게 된 이유에 대해 정확히는 모르겠어요. 방금 말씀드린 것들로 어느 정도 추측해볼 뿐이지요.

회화부터 아이패드까지 다양한 매체를 활용해 작업합니다. 그중에서 가장 애정이 가는 것은 무엇인가요? 고민할 필요도 없이 회화입니다. 회화는 제 작업의 원천이에요. 아이패드에서도 회화를 하듯 그림을 그립니다. 요즘은 붓으로 그림을 그리는데, 사실 아이패드로도 다 가능한 작업이고요. 심지어 색을 켜켜이 쌓아 올릴 수도 있죠. 이 기능을 활용해 아이패드 작업을 할 때도 있습니다. 본질적으로 둘의 방식은 같아요.

예술과 기술은 함께 가는 것이라고 생각하나요? 그렇습니다. 붓도 기술적인 도구잖아요. 연필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술은 여러분이 남긴 흔적에 따라 사물이나 이미지를 변화시킬 수 있을 거예요.

캔버스 앞에서는 어떤 생각을 하나요? 대부분의 예술가가 그렇듯, 제가 관심 있는 것은 바로 표현입니다. 예를 들면, ‘2차원이라는 표면에 공간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라는 물음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있어요.


호크니는 1960년대부터 장소와 시대의 시각적 정체성을 담아내며 캘리포니아의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들을 선보였다. 이후 요크셔에선 시골의 짙은 녹음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May Blossom on the Roman Road>에서도 그 흔적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리고 최근, 호크니는 노르망디의 노을과 사랑에 빠졌다. Courtesy of David Hockney. Photo: Richard Schmidt.

호크니는 1960년대부터 장소와 시대의 시각적 정체성을 담아내며 캘리포니아의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들을 선보였다. 이후 요크셔에선 시골의 짙은 녹음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May Blossom on the Roman Road>에서도 그 흔적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리고 최근, 호크니는 노르망디의 노을과 사랑에 빠졌다. Courtesy of David Hockney. Photo: Richard Schmidt.

당신은 1960년대에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했고, 수영장 시리즈도 그곳에서 탄생했습니다. 특히 <A Bigger Splash>와 미국 서부를 그린 풍경화가 유명하죠. 경이로운 빛과 그림자를 포착했다는 것 외에 이 도시의 어떤 점을 좋아했나요? 저는 30년 동안 로스앤젤레스에서 살았습니다. 너무나도 경이로운 곳이죠. 이 도시에서 인상 깊었던 기억은 놀랍게도 자동차와 관련된 것들입니다. 로스앤젤레스에서 자동차는 필수였어요. 차 없이는 어디도 갈 수 없었고, 길에서 사람을 마주치는 일조차 드물었습니다. 어쩌다가 마주친 사람들도 대개 차에서 내리거나 타고 있는 찰나에 만난 것이었어요. 저는 운전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특히 니콜스 캐니언에 서서 바라보는 풍경은 정말 압도적이었죠. 1964년 당시에는 차로 1시간 반이면 남캘리포니아 어디든 갈 수 있었습니다. 샌디에이고, 샌루이스 오비스포, 샌버너디노, 심지어 사막까지도요. 자동차를 보면 도시의 활기가 느껴졌어요. 거대한 바퀴가 달리거나 말도 안 되는 디테일을 갖춘 환상적인 자동차 모델을 많이 봤거든요. 그런 차들은 뉴욕에서도 보기 힘든데 말입니다. 그곳에서는 제 차가 가장 평범했죠.

지난 1월 로스앤젤레스가 산불로 뒤덮인 장면을 봤을 때 어떤 기분이었나요? 선셋 대로와 퍼시픽 팰리세이드가 불길에 휩싸인 장면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비현실적이었고, 정말 가슴이 아팠습니다. 다행히 말리부에서 살던 집과 좋아했던 듀크 식당은 무사했어요. 제가 살던 집은 바위 위에 지어졌는데, 마지막으로 갔을 때 창밖으로 파도가 넘실대고 있었어요. 이따금 셀리아(오시 클라크의 전부인이자 패션 디자이너, 호크니의 친한 친구이자 뮤즈로 종종 호크니의 그림에 등장한다. 그 유명한 <Mr and Mrs Clark and Percy>의 주인공이다.)와 나란히 앉아 부서지는 파도를 조용히 바라보곤 했죠. 한쪽엔 장엄한 산타 모니카의 언덕이, 다른 한쪽엔 바다가 있어 완벽한 풍경이었습니다. 부엌에서 나오면 바로 해변으로 향하는 길이 있었어요. 바다가 남쪽에 있어 11월부터 4월까지는 거실 창문에서 산타 모니카의 일출을, 서쪽에서는 일몰을 볼 수 있었죠. 저는 이 장소에서만 느낄 수 있는 감정들을 온전히 느끼며 살았습니다.


1973년에 개봉한 잭 헤이전의 다큐멘터리 <A Bigger Splash>는 연인이자 뮤즈였던 피터 슐레진저와 이별한 이후의 호크니를 다뤘다. 이별 후 겪는 내면의 변화와 예술적 창작 과정을 밀착 조명했다. © Buzzy Enterprises Documentaire, Collection ChristopheL.

1973년에 개봉한 잭 헤이전의 다큐멘터리 <A Bigger Splash>는 연인이자 뮤즈였던 피터 슐레진저와 이별한 이후의 호크니를 다뤘다. 이별 후 겪는 내면의 변화와 예술적 창작 과정을 밀착 조명했다. © Buzzy Enterprises Documentaire, Collection ChristopheL.

지금까지 런던, 로스앤젤레스, 요크셔, 노르망디에서 살아본 경험이 있습니다. 어느 도시에서 가장 행복했나요? 지금은 런던에 살고 있지만, 어디에 가든 그림을 그릴 때가 가장 행복합니다. 아마 반 고흐도 같은 마음이지 않았을까요?

당신의 어머니는 “예술가가 되려면 이기적이어야 한다”고 말했다죠. 스스로 생각하기에 당신은 이기적인가요? 어머니의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해요. 다만, 저의 이기적인 면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저는 일흔 평생 매일같이 제가 하고 싶은 것만 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니 분명 이기적이겠죠. 모든 훌륭한 아티스트는 어느 정도는 가지고 있는 성향 같아요. 그렇기에 작업을 멈출 수 없습니다. 누군가가 제게 회고전을 하고 나면 더 이상 작업을 할 수 없을 거라고 말하더군요. 하지만 저는 예술을 해야만 하는 사람입니다. 대규모 회고전이 예정되어 있다 해도, 저는 계속해서 그림을 그릴 겁니다.

1960~70년대에 선보였던 패션은 당신을 상징하는 이미지가 되었습니다. 본인이 패션의 아이콘이라는 것을 알고 있나요? 늘 넥타이를 매고 다녔고, 청바지는 딱 한 번 입어봤어요. 그런데 제가 패션의 아이콘인지는 잘 모르겠네요. 아닌 것 같아요.

스무 살 때 왜 머리를 금발로 염색했나요? 금발이 더 재밌잖아요! 그래서 한동안 그 상태로 지냈죠.

마지막 질문입니다. 가장 좋아하는 프랑스 단어는 무엇인가요? “Non(싫어요)” !

※ 데이비드 호크니의 «데이비드 호크니 25»는 파리 루이 비통 재단 미술관(Fondation Louis Vuitton)에서 4월 9일부터 8월 31일까지 열린다.


Credit

  • 글/ Olivier Lalanne
  • 번역/ 김영은
  • 디자인/ 이예슬
  • 디지털 디자인/ GRAFIKS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