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재 벤치로 쇼 공간을 꾸민 발렌티노 2023 F/W 컬렉션 현장.
Green Copenhagen
지난 2019년 1월, 코펜하겐 패션위크는 세계 인류와 지구의 미래를 위한 2020-2022 지속가능한 실행계획(Sustainability Action Plan)을 발표했다. 2022년까지 제로 웨이스트 패션위크로 거듭나기 위해 인증된 유기농 섬유와 업사이클 섬유를 최소 50% 이상 사용, 모피 사용 금지, 제작된 모든 세트는 재사용이 가능해야 하는 등 총 18가지의 최소 요구사항이 담겨있다. 그로부터 3년 후, 올 1월에 열린 2023 F/W 컬렉션은 참석한 모든 브랜드가 지속가능한 실행계획을 실현한 첫 사례였다. 패션위크에 참석한 게스트는 전기자동차를 제공받았는데 이는 쇼 이동 시 발생했던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100% 감축시켰다. 또한 백스테이지에서 발생한 쓰레기는 브랜드에서 분리수거 수수료를 지불해야 했다. 코펜하겐 패션위크의 CEO 세실리에 토르스마크(Cecilie Thorsmark)는 “이번 시즌 참가한 28개의 브랜드 중 단 1곳을 제외한 모든 브랜드가 제시된 요구사항을 충족했다”고 말했다. 많은 제약 속에서 브랜드들은 어떤 행보를 보였을까? 덴마크를 대표하는 브랜드 가니(Ganni)는 오렌지와 선인장의 부산물, 재활용 플라스틱으로 제작된 바이오 기반 가죽 아이템 ‘가니 부’ 백과 부츠를 새롭게 선보였다. 이는 2023년 말까지 모든 제품에서 버진 가죽(Virgin Leather)을 단계적으로 퇴출하겠다는 포부라고. 한편 “지속가능한 실행계획은 디자이너들의 창의성을 저하시킬 것”이라는 일각의 우려를 말끔히 씻어낸 브랜드가 있었으니, 업사이클링 패션 브랜드 (디)비전((Di)Vision)이 그 주인공이다. 데드스톡 섬유와 재활용된 의류를 활용해 힙한 스트리트 웨어를 선보인 쇼의 말미, 관객석에 앉아있던 한 여성이 와인 잔을 두드려 이목을 집중시켰다. 이내 무대 중앙으로 걸어 나오자 테이블의 식탁보가 드레스로 변해 모두를 놀라게 했고 이 퍼포먼스는 틱톡에서 무려 4백만 조횟수를 기록했다. 그 외에도 재봉이 필요 없는 생산방식으로 폐기물을 최소화하는 아말리 뢰게 호베(A. Roege Hove)부터 컬렉션에 등장한 룩의 98%를 모노 섬유(단일 원사로 짜인 소재는 재활용이 용이하다)로 완성한 스칼 스튜디오(Skall Studio), 유기농과 재활용 면을 활용해 컬렉션을 완성한 헬름슈테트(Helmstedt), 온라인 패션 플랫폼 잘란도가 긍정적인 변화에 기여하는 신예 브랜드를 발탁하는 ‘잘란도 지속가능 어워드(Zalando’s Annual Sustainability Award)’에서 우승을 차지한 스탬(Stamm)까지. 환경보전 의식은 물론 화제성까지 놓치지 않은 패션위크로 거듭났다. 허나 비판적인 시선도 존재한다. 파슨스대학의 라즈 고델닉(Raz Godelinik) 교수는 “협회에서 제시한 기준이 모호하며 런웨이를 제작하는 데 탄소 상쇄를 허용한 것은 잘못됐다”고 지적했다. 그렇지만 연간 24만 톤의 탄소를 배출(에펠탑을 3천60년간 밝힐 수 있는 에너지와 맞먹는 수준)하는 세계 4대 패션위크와 비교할 때 지속가능성 측면에서 앞장서고 있는 것만은 명백하다.

친환경 소재를 87% 이상 사용한 스텔라 매카트니 2023 F/W 쇼.
이제 패션 산업에서 지속가능성은 선택이 아닌 필수적 요소다. 글로벌 패션 기업들은 유엔기후변화협약(UNFCC)에 발맞춰 2030년까지 총 온실가스 배출량을 30% 줄이기로 합의하며 2015년 파리 협정의 목표 달성을 위해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있다. 발렌티노는 이에 한 발짝 다가선 2023 F/W 컬렉션을 선보였다. 쇼 베뉴의 공간을 목재 벤치로 구성했는데, 이는 이후 하우스 이벤트와 프로젝트에 재사용될 예정이며 런웨이를 뒤덮은 모켓(의자 커버나 열차 시트 커버에 사용되는 직물)은 의식적 윤리를 이행하는 업체에 의해 재활용될 것이라고 전했다. 또한 프랑스의 비영리 협회 라 레제브 데자트(La Reserve des Arts)와 파트너십을 맺고 학생 및 다양한 전문가에게 일부 컬렉션 섬유를 제공하여 창의적인 순환경제를 촉진했다. 지난 1월, 마린 세르도 프랑스 파리에서 지속가능한 컬렉션을 선보였다. 쇼 베뉴에는 약 8미터 높이의 탑 3개가 놓여있었는데 이는 창고에 있는 재고를 쌓아 올린 데드스톡 탑이었다. 모든 룩은 업사이클 제품과 생분해성 원사, 재활용 원단으로 완성해 의미를 더했다. 디자이너는 “저로 인해 기후변화 운동이 탄력받기를 바랍니다”라며 지속가능한 행보에 동참해줄 것을 당부하기도 했다. 이 밖에도 프랑스의 가장 오래된 승마학교에서 친환경 소재를 87% 이상 사용한 쇼를 선보이며 동물 사랑과 친환경 메시지를 전달한 스텔라 매카트니와 윤리적인 방법으로 제작한 가죽과 폐기물을 재활용한 아이템을 선보인 클로에, 하우스에서 자체 개발한 지속가능 소재 데메트라(Demetra)로 관객석을 꾸민 구찌도 빼놓을 수 없다. 지속가능한 미래를 위한 많은 럭셔리 브랜드들의 깊은 고민을 엿볼 수 있었다.
우리는 이제 단순한 환경보존을 넘어 고차원적인 지속가능성을 모색할 때이다.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는 말처럼 거대 패션 기업들은 직면한 환경 이슈에 대해 누구보다도 심도 있는 자세로 앞장서야만 한다. 고객 또한 ‘지속가능’이라는 단어가 기업의 마케팅 수단이 되지 않도록 늘 관심을 갖고 동참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작은 관심과 노력이 당장의 큰 변화로 이어지진 않지만 다음 세대를 위한 새로운 지평을 위해 지속가능한 ‘쇼’는 계속되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