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두에서 말한 세 인물은 서로 떨어질 수 없다. 아뜰리에 에르메스에서 열리는 류성실의 새로운 전시 «불타는 사랑의 노래»를 관람하려면 전사를 아는 것이 유익하다. 2018년 BJ 체리장이 유튜브 생태계를 어지럽히며 화려하게 등장한다. 직시하기 어려울 만큼 과하게 꾸민 이 여성은 정신 사나운 화면에 갇혀 북한이 남한에 핵미사일을 날렸다며 거짓 정보를 뿌린다. 급기야 사망을 선언하고 부활을 중계한다. 2020년에는 대왕트래블이라는 여행사가 홈페이지(www.bigkingtravel.com)를 통해 미지의 여행지 칭쳰의 투어를 소개한다. 홈페이지를 클릭하면 휴대폰으로 접속해 맛보기 여행을 할 수 있는데 체리장을 닮은 가이드 나타샤가 초로의 할아버지 관광객들을 인솔하며 희롱 당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BJ 체리장과 나타샤는 류성실 작가 스스로 분한 가상의 캐릭터다. 유튜브에는 아직도 체리장의 계정이 남아 있으며 조회 수는 수십만을 갱신하고 신봉하는 댓글들도 아직 그대로다. 대왕트래블의 ‘모바일 칭쳰 투어 맛보기’ 역시 현재진행형이다. 류성실은 1인 미디어의 작동과 삐걱거림을 내보이기 위해 실제 플랫폼으로 뛰어들고 비틀린 여행 사업을 조명하려 가상의 투어 상품을 만들었다. 그 행보는 일맥상통하게 이어져왔고 2022년에는 온라인의 영지에서 흘러나와 전시장이라는 영토에 발붙였다. 이번에는 체리장이 언급하던 ‘대왕 오빠’, 나타샤가 일하는 대왕트래블의 사장님 ‘이대왕’이 전면에 나선다. 코로나 사태로 여행업 대신 애견상조 사업을 시작한 한 사업가의 소름 끼치도록 속물적인 한판 굿이 시작된다. 관객은 전시관에 들어서자마자 화환의 인사를 받으며 한 반려견의 죽음을 애도하는 절차를 밟게 된다. 장례식장은 화장터로 이어지는데 환풍구가 달렸을 뿐 외형은 독립기념관에서나 볼법한 거창한 기념비다. 원래라면 돌이어야 할 기념비는 무늬를 전사한 시트지를 붙인 거대한 광고판에 불과하다. 스크린을 통해 이대왕은 추모를 빙자한 자기 PR 자작 노래 ‘진짜배기 사랑’을 불러젖히고 애니멀 커뮤니케이터로 직업을 바꾼 나타샤가 등장해 죽은 동물과 교감을 시도한다. 혼이 쏙 빠지는 일련의 과정은 자본주의 사회의 일면을 15분 정도로 압축해 보여준다. 잠시 나타샤로 등장하며 한 보 뒤로 전진한 류성실은 정작 말간 얼굴을 가졌다.
〈굿바이 체리장〉의 죽음, 칭쳰 투어도 결국 죽음으로 귀결된다. 이번 전시는 아예 장례식장의 애도를 체험하게 되어 있다.
죽음 이후에 사후세계가 있다는 건 어찌 보면 삶이 계속 이어진다는 건데 그 ‘영원함’이 낭만적인 동시에 무서운 포인트가 있다고 생각한다. 연인 사이에서 ‘영원한 사랑’을 약속하기도 하고, 그냥 사람들도 “영원히 죽고 싶지 않다”라는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하곤 하는데 참 섬뜩하다. 절대 끊어지지 않는 무한한 인생 타임라인을 이야기해보고 싶어 자꾸 ‘죽음’이라는 소재를 가지고 오는 것 같다.
전시 제목인 ‘불타는 사랑의 노래’는 처음 들으면 언뜻 어울리지 않는 이름처럼 느껴지기도 하나 관람을 마치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모든 게 집약적으로 담겨 있다. 불타고 있고, 사랑에 대해서 계속 이야기를 하고, 마지막에는 노래를 부른다. 그래서 말 그대로.(웃음) 이름을 정할 때 불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태도에 대한 생각해봤다. 흔히 ‘불멍’이라는 표현을 쓰잖나. 멍 때리며 타오르는 불을 바라보는 일인데, 사람들은 그걸 ‘힐링’이라는 표현을 써가면서 사용한다. 불멍 중의 불멍은 남의 집 불구경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잘나가던 누군가의 몰락을 옆에서 관조하는 일이나 어린 연예인들의 타오르는 열정을 소비하는 일이라든지. 우리는 그런 것들을 너무 재미있어 한다. 불이 타오르면 주변으로 사람들이 몰려든다. 그런 사람들을 또 하나의 돈벌이로 보고 계산기를 두드리는 또 다른 구경꾼도 있는 것 같다. 이런 것들을 총체적으로 이야기해보고 싶었다.
허리를 굽힌 화환과 기념비에 달린 환풍기가 직설적이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화환이 도열해 관객을 맞이한다. 그냥 맞이하는 게 아니라 군기가 바짝 들어 90도로 인사한다. 전시장은 장례식장인 동시에 이대왕이라는 사람의 치적을 과시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그런 자리에 필요한 제스처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다. 또 이 작업을 하기까지의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길을 가다 보면 목이 안 좋은 건지 항상 뭘 열 때마다 망하는 가게가 있다. 화환은 잠시 뒀다 바로 수거되야 하는 성질의 물건인데 망하는 터를 보면 화환이 방치되어 있다. 비바람이 불던 날 화환이 흔들리는데 혼자 춤을 추는 것처럼 보였다. 그 장면이 발단이 되었다. 기념비는 추모의 벽이자 화장장의 역할을 수행하는 구조물이다. 그 안에서 무언가가 태워지고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조금씩 언급되던 이대왕의 존재가 이번 전시를 통해 도드라져 나온다. 이대왕의 정체는?
아무런 밑천이 없는 상태에서 자수성가를 이룬 인물이다. 보통 사람이 돈을 벌면 이 돈으로 무엇을 해야 하겠다라는 생각을 한다. 돈을 하나의 수단으로 두고 목적을 다른 곳에 두는데, 이대왕은 돈을 벌기 위해 돈을 버는 사람이다.
중년 남성인 사업가 이대왕과 손잡으려던 어린 여성 체리장을 떠올리면 이 둘의 비즈니스 관계성에도 흥미가 생기더라.
이대왕과 체리장은 2019년도에 동업을 할 뻔했는데 체리장이 불의의 사고로 죽게 되면서 그 관계가 흐지부지되었다. 나이 대와 성별이 다른 두 사람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만났는지 정확히 설정하지 않았지만 체리장은 자본가 선배로 조언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다. 영상을 보면 어린 여성 쪽이 중년 남성한테 호통도 친다. 이대왕은 다 겸허하게 받아들이는데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서 자본가 선배를 섬기는 깍듯한 성격인 거다. 젠더와 세대론을 다 뛰어넘는 이 무시무시한 자본!
이대왕은 대왕트래블이라는 여행사를 하다가 갑자기 애견상조회사로 사업 방향을 튼다.
맞다. 정말 뜬금없는 느낌이 있다. 이대왕이라면 사고의 흐름이 이랬을 거다. 코로나 때문에 사람이 많이 죽어나가니까 장례 사업을 해야겠는데 사람보다는 동물의 생애 주기가 짧고 몸집이 작아 회전률이 빠를 거라고. 상품성과 수익성에 초점을 맞췄을 것이다. 전시에 강아지 얼굴이 많이 등장하지만 사실 강아지가 중요한 소재라기보다 이대왕이 왜 갑자기 이런 사업을 하게 되었을지 생각해보게 하는 것이 설정의 목적 중 하나다.
«불타는 사랑의 노래» 전시 전경.(2022)
전작에서 가상의 장소 ‘칭쳰’을 구현하기 위해 여행지에서 얻은 이미지와 인터넷 사이트에 떠도는 이미지를 조합했다. 이번 전시에도 많은 이미지들이 쌓여있다. 어디로부터 온 것인지?
직접 기르는 강아지는 아니다. ‘공주’라는 강아지의 장례식인데 공주 대접 받는 강아지라는 단순한 의미다. 그것보다 좀 더 개괄적인 이야기를 하자면 작업 리서치를 하는 과정에서 재미나고 이상한 유튜버를 발견했다. 이른바 ‘창업 유튜버’인데 온갖 재미있는 창업 아이템을 가져와서 본인이 시도하다 항상 실패를 한다. 늘 ‘이번에는 될 거야’라는 마인드로 계속한다. 유튜브 팔로어 수도 많지 않다.(웃음) 청포도막걸리 사업을 하다 갑자기 강아지 장례 사업에 정착했다. 항상 ‘창업의 신’이라고 적힌 모자를 쓰고 다니던 사람이 엄숙한 표정으로 “제가 강아지와 유족들을 벗겨 먹어야 하겠어요? 벗겨 먹을 수 있는 사업이 아닙니다!”라고 외친다. 전 영상들과는 다른 모습의 실체는 무엇일까? 기만과 퇴색된 진정성을 떠올리다 이 작업을 시작했다.
대가족의 구성원으로 부모님이나 주변 어른의 행동과 말투에서 작업의 아이디어를 얻는다고 했다. 이번에도 그런 줄 알았다.
가족이나 지인 중에 사업하는 사람이 많다. 그 사람들에게서 동업 제의를 자주 받았다. 당연히 내가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그런 에피소드가 조금씩은 녹아 있다. 이대왕이 사업을 벌이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예를 들면, 지인이 건물을 짓는데 건물 초입에 거대한 모닥불을 만들겠다고 했다. 왜 하필 모닥불이냐고 물었더니 사람들은 불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 불을 지펴 놓으면 간판 저리가라 하는 기능을 발휘할 것이라고 하더라. 불을 지피면 사람들이 오고 따듯하면 기분이 좋고 군고구마도 구워 먹고 쓰레기도 소각할 수 있다는 미친 이야기를 늘어놨다. 정말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지점은 작가가 창조적인 직업이라고 얘기하지만 그건 매체가 만들어내는 환상이라고 생각한다. 예술가보다 훨씬 창조적인 사업가들이 많다. 간절한 마음이 만들어내는 부산물, 순수한데 악으로 가는 그런 창조성에 대한 호기심이 작업에 녹아들어가는 것 같다.
기념비 뒤편에서 음악가 바밍타이거와의 협업 영상이 재생된다. 대왕트래블 이름으로 ‘직진(feat. Omega Sapien, Mudd the student, Lil Cherry, GOLDBUUDA)’이라는 곡을 발표하기도 했다.
체리장 시리즈는 미술관이 아니라 아프리카 TV와 유튜브에서 유통되기 시작했다. 물론 다시 미술관에 들어와 다른 방식으로 조명이 되기는 했지만. 미술관에서는 체리장이 우아해진다. 많은 사람들이 멋진 단어로 이 작업을 설명해주는데 온라인상에서는 맥락이 아주 달라진다. 체리장은 온라인 정글 속에서 살아가는 방향을 선택했던지라 그 생태계에 걸맞은 작업 방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다른 분야의 창작자들과 협업하는 방식으로 진행된 것이다. 미술관은 마음먹고 가야 하는 곳이다. 감상할 준비를 하고 집을 떠나 시간을 거쳐 장소에 도착하는데 음악은 스트리밍으로 곧장 들을 수 있다. 내가 방심한 틈을 타 치고 들어오는 그런 감상 방식의 작업물을 해보고 싶었다.
피처링 음악가 이름 중에서 ‘체리장’과 비슷한 ‘릴 체리’가 눈에 띈다.
체리장 유튜브에 자꾸 이상한 댓글이 달리는 거다. “내가 릴 체리를 보러 왔는데 이게 뭔지 모르겠다. 불쾌하다” 이런 뉘앙스의.(웃음) 그래서 나도 찾아봤는데 너무 재미있는 친구들이었다. 이렇게 재미있는 사람들이랑 뭔가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턱대고 제안했는데 다들 흔쾌하게 받아주었다. 어떻게 보면 너무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다.
작가가 창조적인 직업이라고 얘기하지만 그건 매체가 만들어내는 환상이라고 생각한다. 예술가보다 훨씬 창조적인 사업가들이 많다. 간절한 마음이 만들어내는 부산물, 순수한데 악으로 가는 그런 창조성.
작업물 안에서 음악의 쓰임이 중요하다. 사운드를 담당하는 업체(eobchae)의 존재감이 확실히 드러난다.
이 질문을 해줘서 고맙다. 업체 이야기를 꼭 하고 싶었다. 나는 사실 사운드가 그렇게 중요한지 몰랐는 데 최근 2년 동안 뼈져리게 느끼고 있다. 음악 작업을 전담하는 휘한테 이 자리를 빌어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휘는 업체라는 컬렉티브의 팀원이며 오디오와 비주얼 담당을 맡고 있다. 고등학교 선배이자 대학교 선배다. 학연이다.(웃음) 오디오에 대한 아무런 배경 지식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친구 덕에 좋은 프로젝트를 할 수 있었다.
이대왕이 부르는 ‘진짜배기 사랑’도 휘의 작품이다. 두 사람의 작업 방식이 궁금하다.
음악마다 조금씩 다르다. 대왕트래블 로고송 가사를 쓰고 “좀 오리엔탈했으면 좋겠어. 비트는 이 정도로 빨랐으면 좋겠어.” 하고 레퍼런스 몇 개를 보냈다. 그러면 기가 막히게 노래를 뽑아서 보내준다. 서로 어떤 걸 원하는지 너무 잘 안다. 그래서 한 번에 끝난다. 휘가 ‘진짜배기 사랑’ 가사를 써서 보내줬을 때 원래 ‘배기’가 없었다. 거기에 내가 ‘배기’를 붙이는 식이다.
작가 본인 외에도 연기하는 사람이 필요하다. 캐스팅에도 관여하는가?
등장인물을 보면 실제 사람 얼굴이라고 하기에는 작위적인 느낌이 있다. 실리콘 거죽을 쓴 채로 연기하는 거다. 내 지인이다. 이대왕 역할을 담당해주는 친구가 있다. 아무리 거죽이 같다고 하더라도 몸으로 표현할 수 있는 액션들이 있다. 잘하는 친구가 있어 전속으로 계약했다.(웃음)
등장인물들의 대사가 어쩌면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일지도 모르겠다.
재미있으면서도 어려운 작업이다. 〈불타는 사랑의 노래〉에서는 계속 연료 이야기를 한다. 이대왕이 인터뷰 영상에서 “적은 연료비로도 하늘나라에 잘만 가십니다”라든지, 애니멀 커뮤니케이터가 유족인 할머니한테 “중력을 거스르는 비결이 휘발유도 등유도 아니고 어머니의 사랑이다”라고 얘기한다든지. 강아지 공주가 “어머니는 따땃하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번 작업에서 불이 가장 핵심적인 대사라고 생각해 강조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한국은 석유 한 방울 나오지 않아서 사람이 자원이다라는 말을 지겹게 들으며 자랐다. ‘인적 자원’이라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쓰는데 초등학생 때부터 들을 수 있는 내용이라기에는 되게 폭력적이라고 생각한다. 가끔은 내가 땔감처럼 타오르는 듯한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이런 감정을 대사에 포함하려 했다.
전시장이 아닌 플랫폼을 통해 불특정 다수의 여러 사람들이 작업을 감상하고 댓글을 남긴다. 기억에 남는 말들이 있나? 이런 반응이 다시 작업으로 수렴되기도 하는지.
댓글보다는 대왕트래블 로고송을 누군가 한 시간 버전으로 만들어 놨던 게 기억에 남는다. 이렇게 적극적으로 작업을 재유통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놀랐다. 온라인 유저가 어떤 식으로 내 작업을 경험하고, 어떤 행동을 낳는가는 물론 흥미롭다. 이런 경험을 벼려 웹 베이스의 작업을 하나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체리장을 〈유퀴즈〉로 보내야 한다는 댓글이 있더라.
좀 전에 “미술관에 들어오면 우아해진다”라고 표현했다. 전시장에서 전시를 연 이번 작업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점은 무엇인가?
작업을 시작할 때 어떤 사람이 이 작업을 볼 것인가가 중요하다. 타깃 설정이 선행된 후 작업을 풀어나간다. 온라인에서는 전시 기간을 무한으로 늘릴 수 있지만 타깃 관객층이 미술과 거리가 먼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이번 전시를 어떻게 할 것인가 고민이 많았다. 온라인 작업 때 만나던 관객을 전시장으로 유입시키는 전략을 선택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다른 관점에서 이 좋은 기회를 다뤄야 하는 것인지. 이대왕이라면 이 기회를 어떻게 활용했을까라는 생각에 다다르게 되더라. 큰 상을 받은 기쁜 자리이자 그야말로 과시하는 자리라고 볼 수 있다. 결국 이대왕의 최대치를 뽐내는 전시 방식으로 결정되었다.
아프리카 TV, 유튜브, 비메오 등의 플랫폼을 유용하게 활용하고 블랙코미디적 서사를 그 안에 풀어놓는다. 평소에 어떤 걸 자주 보고 좋아하는지 궁금함이 생긴다.
작업할 때 보는 모든 것들이 피로하다. 시끄러운 것, 반짝반짝거리는 걸 맨날 보니까.(웃음) 반대되는 걸 봐야 한다. 요즘 전원생활을 꿈꾸며 농사도 짓고 있다. 깻잎, 오이, 가지를 키우고 ‘진실’이라는 진돗개도 키운다. 디지털 디톡스를 하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한다. 그런데 팔자라는 게 있나 보다. 내가 원치 않더라도 목도하게 되는 순간들이 있다. 그렇게 끼여드는 것들이 작업으로 풀리게 된다. 삶에 녹아 있는 어떤 상스러운 흔적 같은 것들이 자꾸 나를 침투한다.
진짜 기도를 한다. 아이를 키워본 적은 없지만 “자식은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지 않나? 컴퓨터를 볼 때마다 그런 생각이 든다. 컴퓨터가 내 마음대로 해주지 않는다. 그래서 내 말 좀 들어달라는 의미로 기도한다. 내 작업은 컴퓨터와의 싸움이기도 하다. 이번에도 좋은 컴퓨터로 바꿔야 한다는 생각을 1분에 한 번씩 했다.
이름에 성실이라는 단어가 들어간다. 작업에서 만들어낸 캐릭터들처럼 성실이라는 이름이 본인 삶에 영향을 끼친 것 같나?
아버지가 지어주셨다. 우스갯소리로 본인이 성실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자식을 성실이로 지었다는 얘기를 하신다. 그렇게 세련된 얘기는 아니다. 어릴 때는 내 이름이 정말 싫었다. 성과 이름이 모두 흔하지 않으니 레이더에 잘 잡혔다. 자꾸 나를 안다는 사람들이 많고.(웃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잘 모르겠는데 상대적으로 자의식 과잉이 돼서 작업을 더 잘하고 있는 것 같다. 지금은 내 이름에 만족하며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