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 권영우는 영원히 젊은 이방인으로 || 하퍼스 바자 코리아 (Harper's BAZAAR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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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 권영우는 영원히 젊은 이방인으로

권영우에게 한지는 재료가 아니라 일종의 열린 공간이었다. 그 안팎을 넘나들며 순수한 자유를 열망한 작가의 생을 관통한 ‘젊은’ 시도들이 우리 곁에 남았다.

BAZAAR BY BAZAAR 2022.02.10
 
〈무제(Untitled)〉, c.2000s, Korean paper on canvas, 117x91cm.

〈무제(Untitled)〉, c.2000s, Korean paper on canvas, 117x91cm.

감히 ‘처음 만나는 단색화’라 쓴다. 이런 용기가 어떤 작품을 만나기 전과 후 나의 생각이 달라지는 경험에서 비롯된 건지, 알량한 지식이 전부라 믿는 고약한 습성을 새삼 자각한 데서 온 건지 모르겠다. 다만 권영우의 전시를 준비하고 작품을 들여다보면서, 나는 그간 알던 단색화가 전부가 아니라는 각성의 순간을 맛보았다. 단색화가 고유명사처럼 회자된 건 2010년 이후의 일이라, 1926년에 출생해 2013년에 작고한 그에게는 ‘단색화 작가’로서의 영광을 온전히 누릴 시간이 많지 않았다. 설사 그랬다 해도, 명예조차 자유로운 그를 가두진 못했을 것이다. 권영우는 동양화를 전공했지만 동서양 구분 없이 그저 그림이고 회화였다. 지필묵 중 붓과 먹을 과감히 버리고 종이(한지)를 현대적으로 취했다. 화면을 어떤 그림으로 채울지 전전긍긍한 게 아니라 아예 그림을 제거하고 수행적 행위 자체를 화면으로 탄생시켰다. 그러므로 권영우를 ‘기억해야 하는 또 다른 단색화 작가’로 정의한다는 건, 단색화에 자유와 혁신을 부여하고자 함이나 다름없다. 예나 지금이나, 좋은 작업은 보는 모두를 동시대인으로 만든다.
“내 작업은 화선지로 캔버스를 만드는 일로 시작됩니다.” 권영우는 통금시간도 지나 모두가 잠든 후, “위조지폐를 만드는 것처럼” 세상에 혼자 남아 적요한 밤이 저물 때까지 종이의 물성과 씨름했다. 한지 중 가장 얇고 질기고 투명하다는 화선지를 한 장씩 여러 장 겹쳐 발랐다 말리는 과정을 반복하면 하드보드지처럼 딱딱해진다. 그리고 나선 새로운 개념의 화면을 찢고, 뚫고, 자르고, 붙이는 일련의 행위를 펼쳐 보였다. 손가락이나 손톱을 썼다가, 나무 꼬챙이나 쇠붙이를 썼다가, 그래도 부족하면 도구를 만들어 썼다. ‘추상적인 걸 그리는 게 아니라 추상적인 현상을 만든’ 그의 작업에서 한지는 캔버스가 되었다가, 붓이 되었다가, 먹이 되었다가, 물감이 되었다가, 마침내 회화 그 자체가 되었다. 독창적인 그의 작업을 평생 보아온 1세대 미술평론가 이일은 말했다. “뚫고 찢는 행위는 종이가 지닌 삶의 본연의 모습을 드러내 보여주고, 종이가 그 자체로 독자적인 하나의 회화 세계일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한다.”
세월의 흔적에도 불구하고 백색 작업은 파격과 절제 사이에서 생생하게 줄타기 한다. 빛바랜 흰색은 여전히 의젓하고, ‘침범’ 당한 표면은 자연스럽게 여백과 음영, 형태를 생성하며, 구조화된 종이의 질감은 색채의 뉘앙스와 소통한다. 특히 잘라낸 틈새로 드러나는 화면 내부의 속살은 작품에 충실한 관객에게만 허락되는 웅숭깊은 비밀 공간이다. 겹쳐진 화선지 수도, 풀의 양도, 마르는 정도도 일정치 않기에 종이가 찢기고 뚫릴 때의 상황도 다 다르고, 각각은 저마다의 운율을 지닌 작품으로 거듭난다. 무구와 무위라는 화선지의 본성을 존중한 작가는 인위성(작가의 의지, 의도)이 야기한 자연성(우연, 현상)도 작품의 일부로 온전히 받아들인다. 그렇기에 무명의 동양화가가 제시한 새로운 추상성에 대해 비평가 드니스 로제가 기꺼이 “흰색의 눈부신 고집과 다양하고 미묘한 율동들이 눈부신 백색과 음영이 있는 부조로 나타나 광명과 심연이라는 이중의 감명을 불러일으킨다”(1975년 파리 자크 마솔 개인전)고 화답했을 것이다.
“동서양의 경계가 없다”는 작가의 선언은 의지의 표현인 동시에 명백한 사실이다. 해맑은 빛의 한지를 활용한 한편 방법론의 면에서는 서구 추상미술주의와 궤를 같이했다. 그의 작품이 예컨대 앙리 마티스의 커팅 페이퍼, 조르주 브라크의 파피에 콜레, 루치오 폰타나의 공간개념 시리즈 등과 나란히 언급된 이유는 역설적으로 이들이 아니면 도저히 비교대상을 찾지 못할 만큼 희귀했기 때문이다. 중요한 건 이것이 작가의 의도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전도유망한 동양화가가 제시한 새로운 어법이 낯설었던 당시 미술계는 그에게 한국적 자연주의의 명분과 한지 미학의 의도를 끊임없이 물었지만, 그는 “소담한 걸 좋아하고 떠벌리는 걸 좋아하지 않는 내 성격처럼, 하얀 종이를 좋아하는 것도 자연 발생적인 발견 같은 것이었다”고 초지일관 답했다.
“간혹 무슨 그림이 이런가, 이런 것도 동양화인가 등의 말을 듣기도 합니다. 그럴 때는 내 앞에 전통이라는 문제가 가로놓임을 느꼈죠. (중략) 왜 산에 오르는가의 물음에 등산가는 ‘산이 거기 있으니 오를 뿐이다’라고 말하죠. 아르망은 버려진 물건들을 모았고, 세자르는 폐차를 압축해서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나는 내 곁에 항상 화선지가 있었기에, 그것으로 작품을 만들었어요. 어쩌다 우연히 겹쳐 발라진 화선지들이 자아내는 미묘한 분위기에 이끌려 시작하게 된 것이지요.”(전작 도록 〈권영우〉, 70p, 108p)
 
〈무제(Untitled)〉, 1982, Korean paper, 121x94cm.

〈무제(Untitled)〉, 1982, Korean paper, 121x94cm.

특정한 방식과 형식을 고수하는 작가가 있는가 하면 같은 사람의 것이 맞나 싶게 변화무쌍한 작업을 보이는 권영우 같은 작가도 있다. 1978년부터 1989년까지의 파리 체류 시기, 그는 그간 고수해온 백색 작업에 색을 회귀시켜 회화성을 강조했다. 말하자면 화면에 균열을 내는 걸 넘어, 화면 앞 혹은 뒤에 동양의 먹과 서양의 과슈를 섞은 물감을 칠해 자연스러운 번짐의 효과를 꾀하는 작업이었다. 종이에 침투되어 번지는 물감에서 엿보이는 의도와 우연의 조화가 경쾌함과 진지함, 자유와 질서, 모순과 갈등의 상반된 감정으로 발전하며 작품과 나를 둘러싼 맥락을 매우 풍부하게 한다. 이 예술적 긴장감을 즐기고 관망한 작가의 말은, 꼭 기억할 만하다. “내가 저 작품을 어떻게 만들었을까, 이런 걸 기억하지 말고 다음 작품을 해야 합니다. 재미있다고 그것만 고집해선 안 되죠. 그래야 매 작품이 진정한 오리지낼러티를 가질 수 있어요.”
자기복제와 요령, 관례적이고 생산적인 미술작업을 경계했던 권영우는 자기 작업에 끝내 익숙해지지 않음으로써 나날이 새로워지기를 택했다. 수십 년 만에 색이라는 요소를 전면에 가져와 화면 전체를 암갈색으로 칠하고, 그런 작품을 마름모꼴로 걸기도 했으며, 병, 번호판, 못 등 비미술적 오브제를 한지로 감싸 사물의 실루엣을 부조처럼 살린, 회화와 조각 중간 어디쯤 되는 작업을 내놓기도 했다. 개인적으로는 이번 전시에서 선보인 작업 중 베이지색 나무 패널 위에 기하학적 형태로 오린 화선지를 겹쳐 바른 작품이 인상적이었다. 화선지로 백색의 농도를 조절하고 풀의 양을 조율해 음영을 표현하는 솜씨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그 기운 자체가 매우 현대적이라 무려 20여 년 전 고희를 넘긴 작가가 새로 고안한 작품이라는 게 믿기지 않는다. 권영우의 작품은, 그가 해방 이전 만주에서 처음 미술을 배웠고, 만주의 영화사에서 근무했으며, 서울대 미대의 첫 입학생이며, 한국전쟁 당시 종군화가로 활동한, 피투성이 한국 근현대사를 고스란히 겪어낸 인물이라는 사실을 종종 잊게 한다는 점에서 시대를 초월한다.
작가가 삶과 작업을 회고한 구술서에 따르면, 그는 자기검열에 철저해 스스로의 업적을 남발하지 않았고, 소소한 일상 이야기를 좋아했으며, 말 끝마다 “별거 아니다”라고 했다. 어쩌면 알아차렸겠지만, 그의 어떤 작업에는 낙관이, 어떤 작업에는 사인이 있으며, 그마저도 없는 작업도 있는데 “내 얼굴에 내 이름을 써 다닐 필요가 없다”는 게 이유였다. 스스로 특별한 재주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그는 늘 “삼류 시인일수록 매력적이고, 잘 안 된 작품일수록 재미있다. 자신이 쓰지 못하는 시를 몸소 살고 있기 때문이다”라는 오스카 와일드의 명언을 인용하곤 했다. 그가 평생 끊임없이 새 작업을 시도할 수 있었던 것도 자신이 이뤄낸 업적 안에서 산 게 아니라 끝내 자신이 만들지 못하는 그림을, 작품을, 미술을 몸소 살았기 때문이다.
당대 숱한 평론가들이 진솔하고 과묵한 화가로 기억하는 권영우가 만약 살아 있었다면 후대의 찬사에 어떻게 반응했을까 상상해본다. 81세에 서울시립미술관에 대작 70여 점을 기증한 후 회고전을 개최하면서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리움미술관(전 호암갤러리), 서울시립미술관 등 국내 3대 메이저 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연 (당시로서는) 유일한 작가가 된 그는 “그야말로 도깨비처럼 살았다”고 본인 삶을 돌아보았다. 무려 52세의 나이에 화단에서의 위치와 교수직을 내려놓고 “오로지 그림만 그리겠다”며 파리로 떠난 것도 ‘둑을 지키는 포플러 나무’가 아니라 ‘바다를 향해 흘러가는 강물’이 되기를 열망했고, 영원한 이방인을 자처했기 때문이다. 자기 작품을 오래 남기는 것보다, 거장으로 평가받는 것보다, 자신이 하고 싶은 작업을 하는 것이 무엇보다 우선이고 중요했던 미술가다운 선택, 훗날 “본연의 무로 돌아왔다”고 말할 수 있었던 힘이다.
권영우는 세상의 규범과 정통성에 얽매이길 거부하고, 스스로 만든 규칙을 파괴하며, 삶 안팎의 질서를 깨뜨리면서도 작가적 확신을 놓지 않았고, 그렇게 자신으로서 존재했다. 그의 고아한 삶을 지탱한 ‘실존적 예술관’은 온갖 명분과 가치 판단에 치여 밀려나거나 잊어버린, 그러나 모든 것에 앞선 가장 본질적인 행위를 상기시킨다. 작가에게 그것은 ‘작업하다’일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나에게는 무엇일까. 임인년 새해, 세상에서 가장 ‘젊은 작가’ 권영우가 묻는다. 답을 찾지도 못한 채, 그처럼 순수하고 진지한 열정과 가벼움의 태도로 살아내는 것이 실로 대단한 일임을, 반면 (그가 아무런 계산 없이 파리로 갔을 때보다도 젊은) 나는 무작정 커진 몸집과 무거운 마음을 부여안고 있음을 깨달으며 또 한 살 더 먹었다.
 
참고 문헌/ 〈권영우〉(서울: 이미지연구소, 2007), 권영우 구술, 박계리 채록, 〈2007년도 한국근현대예술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101: 권영우〉(한국문화예술위원회,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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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글/ 윤혜정(국제갤러리 이사, <나의 사적인 예술가들> 저자)
    에디터/ 손안나
    사진/ 국제갤러리 제공
    디지털 디자인/ GRAFIKS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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