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네임〉의 최무진으로 ‘지천명 아이돌’이란 별명을 얻었다.
촬영장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작품 잘 봤다고 말하는 정도지 사실 코로나 시대라 실감은 안 난다. 나쁜 놈이라고 욕 먹을 줄 알았는데 이렇게 좋아해주셔서 감사하다.
그래서 팬카페에 “진작 나한테 왔어야지”라고 글을 남긴 건가?
나름대로 유머였는데 그 발언이 기사화까지 됐다. 창피하다. 당분간은 잠수를 좀 타야겠다.
이 작품 전까지 건달 역할은 일부러 피했다고.
영화 〈작전〉 같은 경우엔 건달이 주식을 한다는 설정이 있지 않나. 스토리가 있으면 괜찮은데 어떤 차별성도 없는, 우리가 늘 보아왔던 건달 역은 몇 차례 고사했다. 재미가 없으니까. 아껴두었다가 나중에 제대로 해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래서 〈마이네임〉 대본을 보자마자 생각했다. 아, 이건 해야겠구나.
조상경 의상감독이라고 영화계의 맞춤 수트 장인이 계신다. 나와는 영화 초창기부터 몇 작품 같이해서 내 한쪽 어깨가 비뚤어진 것까지 다 알고 있는 분이다. 그분 도움이 컸다. 보통은 작품에 들어가기 전에 2주 정도 운동한다면 이번엔 석 달 동안 몸을 만들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액션이니까 그럴 수밖에 없었다.
패턴 터틀넥은 Valentino Garabani.
박훈정 감독이 당신의 눈을 사슴 같다고 말한 적 있다. 누아르물이 잘 어울리는 것도 그 때문이 아닐까 싶은데.
마냥 센 게 아니라 흔들리는 느낌을 보여주어야 하니까. 그럴 땐 역시 사슴이 필요한가 보다.(웃음)
극 중 최무진은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는 확신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렇지 않으면 망설이게 되니까. 배우가 작품에 임하는 태도도 마찬가지일 거라 생각한다. 이 인물에 어떤 확신이 있었나?
어떤 악역이라도 그만의 타당성이 있고 자기 입장이 있어야 관객을 설득할 수 있다. 처음에 작가님은 최무진이 단선적으로 가길 원했다. 그러나 나는 흔들림이 있고 선을 넘을 듯 말 듯 위태로운 모습이 보여야 인물도 살고 작품도 살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여러 차례 작가님과 이야기를 나누며 설득했던 것 같다.
극 중에서 지우(한소희)도 속여야 하지만 관객도 속여야 했다. 미묘한 톤 조절이 쉽지 않았을 텐데.
어느 순간부터는 최무진 본인도 뭐가 맞는지 잘 모를 것 같더라. 재미있는 게 그런 신은 코멘트가 따로 없다. 그러니까 지우를 맡은 한소희의 본능적인 감정과 최무진을 맡은 박희순의 본능이 오가는 것이다.
마지막 화에서 지우와의 액션 장면이 인상 깊었다. 무도 고수들의 경연 같기도 하고.
그 장면에서는 나도 아이디어를 조금 보탰다. 나는 지우와 최무진이 서로를 방어하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죽이기 위한 싸움이 아니라 끝내기 위한 싸움이었으니까. 마구 칼로 베고 찔러 죽이는 개싸움이 아니라 고수들이 긴 칼로 베는 듯한 동작이 많다.
패턴 터틀넥은 Valentino Garabani.
이 작품을 택한 이유에는 여성 원 톱 주인공이라는 점이 주효했다고 들었다.
남자들만 나오는 영화가 너무 많으니 비율이 좀 맞았으면 하는 바람도 있고. 여성이 주인공인 작품을 좋아한다. 〈히치하이크〉는 그런 마음으로 진행비만 받고 출연한 작품이다. 작게나마 여성 영화인들에게 힘을 실어주고 싶다.
그렇다. 나의 역할은 아쉽지만 출연하고 싶었다. 그 현장을 경험해보고 싶었달까.
배우라면 나의 역할이 어떻게 비춰질지 먼저 생각하지 않나?
어릴 땐 그랬다. 지금도 아니라고 할 순 없지만 예전보다 내려놓았다. 내 역할이 아쉽더라도 작품이 빛날 수 있다면 나는, 한다.
애플TV+ 최초 한국 드라마로 〈닥터 브레인〉이 방영 중이다. 1화가 공개된 현재까진 베일에 싸인 탐정 이강무 역할로 살짝 등장했는데.
맡는 배역마다 스포일러다. 이강무는 전직 경찰관이었다가 현재는 개인 조사관, 그러니까 사설탐정이나 흥신소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이다.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굉장히 유머러스할 수도 신비로울 수도 있는 인물이라. 김지운 감독이 어떻게 풀어갈지, 내가 생각했던 것과 어떻게 다를지 궁금해서 참여하게 되었다.
브라운 레더 재킷, 멀티 컬러 니트, 팬츠, 로퍼는 모두 Berluti.
김지운 감독이 말하길 이 역할을 섹시한 배우가 맡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캐스팅했다던데. 요즘 여러모로 섹시의 아이콘이다.
김지운 감독은 그 옛날에 이선균과 작품을 할 때 공연 보러 놀러오고 그랬던 학교 선배다. 같이 작품을 못하다가 〈밀정〉 때 특별출연을 했다. 그후로 다시 안 불러주기에 그냥 싸게 쓰고 마는구나 했다.(웃음) 그 양반이 나를 그렇게 생각하는지는 전혀 몰랐다.
애플TV+는 한국인에겐 아직 진입장벽이 있는 플랫폼이다. 아쉬운 점은 없나?
넷플릭스의 〈옥자〉 때와 비슷한 상황이다. 제대로 론칭한 뒤에 우리 작품이 공개됐으면 훨씬 더 반향을 일으킬 수 있었을 텐데. 애플의 전략이긴 하겠지만 약간의 아쉬움은 있다.
작업하면서 OTT 플랫폼마다의 차이점을 느꼈나?
애플답게 보안이 정말 까탈스럽더라.(웃음) 제작발표회 때도 얘기했지만 매번 스케줄표에 제목이 바뀌어서 나왔다. 배우들한테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건가 싶을 정도였다.
기자간담회에서 극 중에서 그런 것처럼 뇌를 동기화할 수 있다면 팀 쿡의 머릿속을 보고싶다고 해서 좌중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그런 멘트는 항상 준비해 오는 건가? 당신의 인터뷰에는, 랩으로 치자면 일종의 펀치라인이 하나씩 들어 있더라.
신인 배우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공통적으로 “오래 연기하는 배우가 되고 싶다”고 소망한다. 당신은 그 꿈을 이룬 배우다. 후배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나?
오래 버텼지. 그런데 이 바닥이 열심히만 한다고 되는 게 아니더라. 운도 따라야 하고 인간관계도 중요하고.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기 때문에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었다. 정답이 없으니 뭐라고 얘기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앞이 안 보였다. 그런데 할 줄 아는 것도 좋아하는 것도 이거밖에 없으니까. 그렇게 시간이 지났다. 한 15년 정도 연극만 했기 때문에 영화 쪽으로 갈 수 있을까에 대한 물음표가 있었고 그래서 암울했다. 지금은 플랫폼이 다양해졌고 확실히 더 많은 기회가 생겼다. 거기에 희망을 가졌으면 한다. 자기 생활 잘하다 보면 언젠가 기회가 오지 않겠나.
최무진으로 입덕한 팬들이 박희순 필모그래피 ‘도장깨기’를 한다고 하더라. 배우로서 이 점이 가장 뿌듯할 것 같은데.
그게 가장 고맙다. 솔직히 인기 이런 건 잘 모르겠다. 뭐, 잠깐 이러다 말겠지. 그런데 전작을 봐준다는 건 배우로서 나를 인정해준다는 의미지 않나. 감사하다.
어떤 작품을 봐줬으면 좋겠나? 개인적으로는 〈세븐데이즈〉를 꼽고 싶은데.
나는 아픈 손가락이 많은 배우다. 흥행에 성공한 작품이 적어서.(웃음) 〈세븐데이즈〉 〈1987〉 〈용의자〉 이런 작품에게는 미안하지 않은데 〈맨발의 꿈〉에게는 좀 미안하다. 고생도 고생이었고, 완전히 쏟아부으면서 했던 작품이다.
당신의 필모그래피를 보며 전작과 다른 캐릭터, 다른 재미를 추구하는 것이 작품을 고르는 제1의 기준인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렇게 살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나? 배우가 지치지 않으려면 새로운 캐릭터를 만나야 하고 그러다 보면 새로운 무언가가 나오는 거다. 관객도 지치지 않고.
그럴 수도 있겠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 경계가 무너졌다. 개봉 시기가 섞여버리니까 내 생각대로 되진 않더라고. 이제는 내려놓았다.
어느 인터뷰에서 직장인이 월화수목금 출근하듯이 연기한다고 말한 것이 인상 깊었다.
나에게 왜 안 쉬냐고 묻는데, 당신들도 안 쉬지 않나?(웃음) 연기도 감정노동이다. 비정규직 감정노동. 영화 개봉 주기에 맞춰 조금 쉬면 충전된다. 따지고 보면 그냥 쉼 없이 하고 싶은 것 같다.
젊은 남자 배우들이 종종 그런 얘기를 하더라. 빨리 40대, 50대가 되고 싶다고.
자기들이 40대, 50대까지 연기를 계속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다는 건가? 이게 얼마나 빡빡 기어서 올라온 건데.(웃음)
여유가 생길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더 여유가 없어졌고 자신감이 떨어졌다. 20대 때의 내가 최고였던 건 아니지만 누구든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그게 없어지니 받아들이게 되고 고집도 꺾게 되고 소통하게 된다. 장단점이 있는 것 같다.
윤여정 선생님은 60세부터 연기가 재미있었다고 하던데.
나는 20대부터 재미있었다.(웃음) 현장이 너무 좋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현장에 대한 두려움이 생겼다. 어떻게 풀어나가지? 어떻게 잘해나가지? 매너리즘에 빠진 건 아닌가? 디렉션이 없어지니까 내가 맞는지 틀리는지에 대한 확신이 흐려지는 거다. 그래서 〈마이네임〉이 행복한 작업이었다. 김진민 감독은 배우들의 가슴 밑바닥에 있는 걸 끄집어내는 데 탁월하다. 신인 배우들에게 꼭 한번 권해주고 싶은 연출가다. 그의 디렉션은 “여기 두 발짝 앞으로 걸어가서 세 발짝에 빵 터뜨려.” 이런 게 아니다. “최무진이 이런 상황이면 어땠을까?” 하며 내가 분석해온 것과 정반대의 상황을 만들어준다. 배우에게 ‘한번 놀아봐’ 하고 창의적인 판을 깔아주니까 신이 나서 연기했다.
이번 부산국제영화제 때 〈마이네임〉을 극장에서 상영했다. OTT용으로 만들었지만 전부 영화 쪽 스태프였기 때문에 극장에 올려도 상관이 없는 퀄리티였는데 확실히 휴대폰이나 TV로 볼 때와 다르더라. 액션이나 감정 신에서 스케일의 파워를 당해낼 수가 없더라. 아주 셌다. 3회까지 상영했는데 언젠가 끝까지 다 볼 날이 왔으면 좋겠다.
작년 겨울부터 세 작품째 소처럼 일만 하고 있다. 올해가 가기 전에 성과로 돌아오니 기쁘고 행복하다. 항상 그랬던 것 같다. 좋은 평가를 받으면 흥행에 아쉬움이 있었고, 흥행이 되면 개인적인 충족감이 조금 모자랐다. 이번 작품은 흥행도 되고 평가도 좋았다. 내게는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는 한 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