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Culture

아티스트 박진아의 작은 이야기

회화작가 박진아의 작업은, 삶이란 높은 탑을 쌓는 것이 아니라 미완성의 그림을 그리는 것임을, 그렇게 과도기적 태도로 살던 숱한 나를 인정하게 한다.

BY손안나2021.09.15
박진아(b. 1974), 〈노란 바닥 01〉, 2015, Oil on canvas, 170x194cm. Photo by 김상태

박진아(b. 1974), 〈노란 바닥 01〉, 2015, Oil on canvas, 170x194cm. Photo by 김상태

요즘 MZ세대의 혁명적인 활약을 목격하며, 한때 X세대라 불리던 나를 떠올린다. 이상한 건 죄다 ‘포스트 모더니즘’이라 명명하던 시대에 어른이 된 90년대 중반 학번들은 엉겁결에 ‘신세대’라는 집단적 ‘부캐’를 얻게 되었다. 하지만 내가 X세대라는 사실에 흥분했던 유일한 순간은 낭만적이고, 야만적이며, 치기 어린 에너지로 가득한 책 〈미메시스: 신세대, 네 멋대로 해라〉를 읽을 때였다. 페이지 밖 현실은 달랐기 때문이다. 삼풍백화점과 성수대교가 ‘나은 세상’의 허상과 함께 붕괴된 그라운드 제로에서 잿빛 성인식을 치른 자는 주역이 될 수 없었다. 공동체와 이념에 도취된 386의 후일담을 들으며 집회에 갔다가, 소개팅 자리에 들렀다가, 〈중경삼림〉 같은 영화 장면에 탐닉하며 진정한 개인주의와 개성 있는 무질서로 점철된 일상을 열망하며 집에 돌아오는 식으로, 나는 완벽하게 애매했다. 그래서일까, 마흔 중반인 지금도 내가 여전히 어설프게 ‘낀 세대’ 같다. 어디서 무엇을 하든, 내내 이렇게 과도기적 존재일 것 같은 예감이 내 삶을 정의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얼마 전 박진아 작가의 작업실에 방문했을 때, 크지 않은 벽에 기댄 작지 않은 그림 앞에서 나는 이른바 ‘과도기적 태도’로 숱한 오늘을 살던 여러 명의 나를 발견했다. 박진아는 일상의 면면을 포착해 캔버스에 옮기는 회화작가다. 다채로운 풍경 중에서 특히 전시장, 공연장, 촬영현장 등을 그린 작품에 시선이 닿았다. 전시이든 공연이든, 보통 주·조연 내지는 주인공과 스태프의 역할이 나뉘어 있다. 하지만 박진아가 그려낸 이곳은 주역을 위한 무대가 아니라 일터로서의 공간이다. 빛나는 순간으로 완결된 시간이 아니라 여전히 만들어지고 있는 미완의 시간이다. 박진아는 이른바 ‘비하인드 신’의 이런 공간을 ‘뒤’가 아니라 ‘사이’라 표현했다. 
 
사람들이 뭔가를 하고 있는 장면을 많이 그려요. ‘사이’에 있는 시간이죠. 어떤 상태에서 또 다른 상태로 옮아가거나 바뀌는 과정 중의 시간을 그리는 겁니다.
 
 대단히 중요한 사건을 예정할지언정 아직은 일어나지 않은 상태이니, 지금은 그저 한 순간일 뿐이거나 결과로 가는 과정의 일부다. 우리 대부분이 살고 있는, 이렇게 지나가버린 그런 순간들이다.
 
저는 찰나를 그리고 싶어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박진아의 작품에는 ‘사이의 행성’에 머물며 찰나를 들여다본 사람들이 발견할 수 있는 미묘한 공기가 감돈다. 특유의 헐겁고 느슨한 붓질은 이 순간이 이어지다 사라짐을 반복할 거라고, 지금 이 장면이 영원한 게 아니라 흐르는 시간 가운데의 한 순간이라고 말한다. 본래 회화는 캔버스에 시공간을 박제하고 다른 차원으로의 이동을 유예함으로써 생명력을 담보해왔지만, 박진아의 회화는 움직임과 가벼움, 시간성과 순간성을 택함으로써 살아 있다. 그녀의 작품이 일깨운 것도 당시 내가 어떤 일을, 얼마나 훌륭하게 해냈는지 여부보다 그때의 감각과 뉘앙스였다. 박진아의 그림에 가만히 귀를 갖다 댔다. 다수의 목소리가 충돌해 공명하던 촬영장의 일사불란한 긴장감, 유난히 생생하던 공기의 습도, 피로감과 허기로 지친 몸에 날카롭게 파고들던 계절의 냄새…. 회화의 시각성은 공감각적으로 확장되고, 엄연히 존재했던 그 순간, 부지불식간에 내 몸과 마음에 깊숙이 각인된 기억과 느낌을 은밀하게 일깨운다. 
 
박진아의 회화는 하나의 장면으로도 그 전후의 시간을 유추하게 하는 동시에 나의 시간까지도 자신의 것으로 품는다.
 
누군가의 회화에 나의 감정을 이입하는, 당연하나 흔치 않은 경험은 박진아의 그림 속 인물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다. 거의 모든 그림에 개별적 행동을 하는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하나같이 자기 행위를 의식하거나 일의 경중에 연연하지 않은 채 몰두하고 있다. 전시장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무언가를 들여다보고, 피아노를 들어 옮기고 있으며, 화면 밖으로 미끄러지는 시선으로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다. 일을 하다 보면, 지금 여기, 오직 나만 존재한다고 착각하는 순간이 있기 마련인데, 누구든 그 완벽한 고립의 순간에 비로소 가장 독립된 개체, 나다운 존재로 거듭난다는 데 착안한 게 아닐까 싶다. 물론 이들의 움직임은 전통적인 노동 현장의 그것에 비해 훨씬 나이브하다. 애초에 숭고한 노동을 피력하는 작품이 아닌 데다가, 모든 걸 재현해 드러낼 의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인물들의 실루엣은 뚜렷하지만 이목구비는 흐릿하고, 표정은 특징적이되 감정은 모호하며, 상황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도 없다. 박진아의 그림은 소실되거나 아예 존재하지 않는 정보들의 간극을, 보는 이의 경험과 감각, 내러티브로 적극 메워보길 권하고 있다.
 
2010년 에르메스 미술상의 후보였던 박진아는 수십 명의 ‘재능 있는 미술가’를 호명해온 해당 행사가 10여 년 만에 처음 선정한 회화작가라는 사실로도 회자되었다. 이는 숱한 신생 매체와 신종 개념으로 포화 상태가 된 현대미술계에서 회화를 그리기도, 평가하기도, 인정받기도 쉽지 않다는 사실의 방증이었으며, 지금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30대 중반이었던 박진아는 ‘회화적 회화’를 위해 스냅사진을 활용했다. 로모 카메라로 찍은 사진에서 작업이 출발하기도 했기에, 이런 기법 자체가 젊은 작가의 시도로 해석되기도 했다. 하지만 회화의 역사에 잠식당하지 않겠다는 포부로 포장하지 않더라도, 리히터를 비롯한 작가들의 사진활용법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여전히 박진아에게 사진은 맨눈으로 포착하기 힘든 풍경을 보고 그릴 수 있도록 돕는 조력자다. 하지만 그보다 흥미로운 건 셔터를 누르는 순간 얻을 수 있는 사진과 그런 사진에 작가가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절대적인 시간과 노동을 들여야 얻을 수 있는 회화, 각기 다른 시간성이 야기하는 대비의 효과 혹은 불균형의 미학 그 자체다.
 
캔버스 앞에서 박진아는 기꺼이 전지전능하다. 여러 장의 사진을 합쳐 한 점의 회화로 구현해내는데, 즉 캔버스라는 세상에서 인물을 재배치하고 상황을 재구성한다. 그래서 한 인물이 여러 작품에 반복 등장하기도 하고, 한 작품에 같은 인물이 쌍둥이처럼 나란히 놓이기도 한다. 회색이었을 바닥이 샛노랗게 바뀌어 있고, 흰색 벽이 붉은색으로 대치되기도 한다. 분명 이 벽은 여기 있지 않았을 테고, 저 사람은 저기 없었을 것이다. 박진아의 회화 속 상황은 현실이되 실재하지 않는다. 내가 사는 현실과 있을 수 없는 현실, 그 중간 어딘가 존재할 것 같은 또 다른 현실이 중첩되어 있다. 캔버스는 고작 2차원의 평면 물체일 뿐이고, 회화의 제스처가 제아무리 크다 한들 팔 길이만큼이다. 그러나 박진아의 캔버스는 현실과 비현실 사이의 혼돈을 모두 끌어안을 만큼 깊고 넓은데, 이 사실은 물감이 흘러내린 흔적이나 반복된 붓질로 얻은 오묘한 색을 통해 각성된다. 
 
만약 그녀의 작업이 ‘무심하다’ 느껴진다면 친근함과 냉랭함, 명확함과 모호함이 공존하기 때문이며, 이는 현실에서 초현실을 도출해내는 솜씨에 힘입은 바 크다.
 
저는 ‘회화는 이미지이자 물질이다’라고 자주 얘기해요. 회화는 이미지의 다양한 역할을 할 수 있죠. 이야기를 담을 수도 있고, 사건을 기록할 수도 있고, 장식성을 드러낼 수도 있어요. 동시에 평면 위에 물감이 발린 어떤 상태가 회화를 이루고 있으니 물질이기도 하죠. 
 
 
국제갤러리 개인전(9월 12일까지)의 제목 ‘휴먼 라이트’는 인간이 만들어낸 빛을 시사한다. 한 해의 마지막 날, 공원에서 불꽃놀이 하는 이들의 손끝에서 피어났다 스러지는 빛이 인상적인 〈공원의 새밤〉 연작, 어느 밤 카메라 플래시의 순간적인 빛을 담은 〈문탠〉(2007) 등을 보고 있자면, 조명을 단순히 흰색 덩어리 이상으로 표현하고, 투명한 검정과 무겁지 않은 밤을 구현하고자 한 순수한 회화적 시도가 느껴진다. 따라서 이 제목은 그림으로 삶과 예술, 시선과 행위를 꿰어내려는 작가의 시대착오적인 노력, 그리고 이로써 시대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미술가의 ‘권리’를 은유한다. 박진아의 작업에 내재된 강렬한 ‘회화적 사건’은 주된 면모라고는 없는 사소한 서사와 강한 대조를 이루며 오히려 이를 고유한 대상으로 기억하게 만든다.
 
“하지만 관객들이 더 특별한 소재와 기법의 작품을 보고 싶어하지 않을까?”라는 식의 의도가 엿보이는 질문들도 기자간담회 중간 등장했다. 젠체하지 않는 박진아의 담백한 답을 들으며, 나는 영화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책 〈작은 이야기를 계속하겠습니다〉의 한 구절을 떠올렸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큰 이야기’에 맞서 그 이야기를 상대화할 ‘작은 이야기’를 계속 내놓는 것이며, 그것이 결과적으로 문화를 풍요롭게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동감이다. 삶이란 탑을 쌓는 게 아니라 바로 그림을 그리는 것이고, 특정 세대가 아니라 내가 만드는 것이다. 일상은, 별로 중대하지 않거나, 지겹게 반복되거나, 기억조차 못할 정도로 전형적인 순간에 힘입어 앞으로 나아간다. 명분과 이론이 제아무리 웅장해도 일상을 견뎌내지 못하면 빛을 잃기 마련이고, 혁명을 의도한 혁명은 실패하지 않기가 더 힘들다. 스스로를 신화로 격상시키지 않은 채, 일상과 접속하고 가능성과 저항, 변화의 경로를 탐색하는 것, 바로 ‘작은 이야기’를 해온 자들의 몫이다. 특별하고자 애쓰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특별한 박진아의 작품 앞에서, 가끔은 쿨했고, 간혹 상실감에 시달렸지만, 딱히 아쉬운 적 없이 당당했다는 사실이야말로 ‘별거 없는’ 나의 가장 신세대적인 면모였음을 뒤늦게 깨닫고는, 혼자서 기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