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스파스 루이 비통 서울에서 전시 중인 〈4900가지 색채(4900 Colours)〉는 총 11개 중 9번째 버전이다. 리히터는 1970년대부터 〈컬러 차트〉 작업 등을 통해 자신의 주관성과 영향력을 제거해왔다. 작가는 일부 규칙을 정의할 뿐이고, 작품의 설치 또는 색상 배열 등은 전시자 혹은 작품에 달려 있다.
에스파스 루이 비통 서울에 걸린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작품 앞에 서자 괜히 조급해진다. 작가 자신은커녕 무엇도 드러내지 않은 채 수천 개의 형형한 픽셀 같은 색면 사각형으로만 존재하는 이 작품이 이토록 마음을 붙잡는 이유를, 나는 알아내야만 한다. 고백하자면 ‘생존작가 중 가장 위대한 예술가’이자 ‘현대미술의 살아 있는 전설’ 리히터는 내게 이를테면 오히려 번번이 피하게 되는, 그러면서 당연히 가봤다고 착각하는 유명 관광지 같은 존재였다. 물론 그처럼 구상과 추상을 동시에 작업하는 미술가도 흔치 않을뿐더러, 공히 독보적인 평가를 받는 이는 단연 드물다. 어쩌다 그의 작품이 아트페어의 어느 갤러리 부스에 등장하기라도 하면 정말이지 모두가 판매 여부와 작품가에 촉각을 곤두세웠고, 경매 최고가를 경신해온 스타의 활약을 소상히 기록했으며, 앞다투어 ‘리히터 전문가’를 자처했다. 미술사적 의미와 시장 장악력의 측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거장이지만, 그러나 ‘나의 사적인 예술가’로 삼기에 그의 이미지는 너무 공공연하고 방대했던 반면 실체는 복잡하고 모호해서 불가해한 존재처럼 느껴졌다. 그런 점에서 한국에서 처음 공개된 리히터의 대작 〈4900가지 색채〉(2007, 전시는 7월 18일까지)는 예술가가 제안하는 일종의 스무고개 같은 작품이다. 단서를 숨긴 채 나를 자발적이고도 능동적인 질문자로 만드는 베테랑의 솜씨다.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작업은 현대미술을 둘러싼 갖은 역설로 집대성되어 있다. 그는 1960년대부터 회화에 매진해오면서도 “회화에 대해 말하는 건 무의미하다”고 한다. “사진의 예술적 가치를 믿지 않는다”면서 “그림보다 사진이 더 진실하다”고 믿는다. 사생활이 아니라 작업을 봐달라면서도 “예술은 불완전하며 덜 객관적인 가시적 세계를 표상한다”는 점을 인정한다. 때론 제3자의 손을 빌려 작업한 사실을 스스럼없이 밝히면서, 기술을 활용한 그림은 예술과 거리가 멀다고 일침을 놓는다. 그는 추상표현주의, 팝아트, 플럭서스, 미니멀리즘, 개념미술 등 핵심적인 미술운동에 두루 영향받았지만, 특정 사조나 경향, (정치는 물론) 예술적 이데올로기마저도 불신했다. “난 위대한 전통에 관심 많은, 터무니없는 구식”이라 눙치는 이 1932년생 예술가는 수십 년 전에 무성영화나 포크댄스처럼 사망선고를 받은 회화를 소생시켰을 뿐만 아니라 구상/추상, 초상/풍경, 채색/단색 등 전통 양식의 구분을 초월하는 혁신성을 회화에 부여했다. 결국 세상에서 가장 비싸다는 리히터의 작품 값은 회화의 과거(명성)가 아니라 미래(잠재력)에 대한 비용인 셈이다.

3세기 고딕 건축 양식과 현대적 요소가 서로 조화되길 바랐던 리히터는 1974년작 〈4096가지 색채(4096 Colours)〉 이미지를 활용, 추상적인 디자인 시안을 제안했다. 그렇게 2007년 세상에 선보이며 큰 파장을 일으킨 쾰른 대성당의 〈돔 펜스터(Dom Fenster)〉는 곧 〈4900가지 색채〉의 탄생에 큰 영향을 주었다.
한 번에 망라하긴 불가능할 정도로 방대한 리히터의 작업세계 중에서 끊임없이 회자되는 몇몇 작품들이 있다. 초기작이자 대표작인 ‘사진회화(신문, 잡지, 앨범에서 찾은 흑백사진을 베껴 그리고 회색톤으로 채색한 후 대상의 윤곽을 부러 흐리는 작업)’, 가없는 줄무늬로 구현된 〈Strip〉(자신의 추상회화를 촬영, 스캔하고 컴퓨터로 늘려 디지털 프린트한 작업) 연작(2011)을 비롯해 물감의 질감이 다양하게 드러나는 회색 모노크롬 페인팅(1969~), 비재현적 레이어를 쌓아 올린 추상회화(1976~), 두껍게 바른 물감 층을 스퀴즈로 밀거나 긁는 등 우연으로 완성한 작업(1980~)까지. 일련의 작업을 관통하는 리히터의 실험 및 시도는 예술가의 혼돈 어린 역설을 뚫고 나온 신개념 회화이자 세상의 케케묵은 양비론과 양시론 가운데서 길어 올린 자기만의 진실이다.
특히 〈4900가지 색채〉는 리히터가 자기 논리를 드러낸 동시에 예술가의 역할을 최소화한 흥미로운 작업이다. 4900이라는 숫자와 압도적 스케일, 그리고 색의 스펙트럼이 자아내는 역동적 풍경에 처음엔 어안이 벙벙할 수도 있는데, 여기엔 생소한 리히터만의 규칙과 시스템도 한몫한다. 각 벽면은 4가지 원색, 빨강, 노랑, 파랑, 초록으로 얻어낸 총 25가지 색의 다채로운 병합으로 완성되었다. 에나멜 스프레이로 채색된 가로세로 9.7센티미터 크기의 사각형 25개가 기본 단위인데, 이번 전시에는 총 1백96개의 패널이 설치되어 있다. 1966년 페인트 색상표를 보고는 ‘이미 완전한 페인팅’이라 판단한 리히터는 처음 〈192가지의 색채〉를 유화로 작업했다. 이후 수십 년 동안 수학공식에 버금가는 논리로 개수 및 매체를 다양하게 변주한 컬러차트 작업을 거듭하던 그는 2007년 쾰른 대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창문 디자인 작업 〈돔 펜스터〉를 내놓기에 이른다. 중세시대의 본래 창문에 쓰인 72가지의 색을 입힌 1만1천5백 장의 수공예 유리로 그려낸 체계적인 이 ‘색의 카오스’는 순교자들을 그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쾰른 대주교에게 외면받았지만 〈4900가지 색채〉의 탄생에는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순교자도, 예술가도, 모든 구체성을 지운 이 작품이 수백 년 된 유산을 인류에 돌려주기 위해서였음을, 고리타분한 대주교가 알았을 리 만무하다.

루이 비통 재단 미술관은 총 32점의 리히터 작품을 소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번에 서울에서 선보이는 〈4900가지 색채〉 9번 버전은 국내는 물론 파리 루이 비통 재단 미술관에서도 선보인 적이 없다.
어쨌든 작가의 개입은 거기까지다. “우연이 나보다 낫다”고 겸양을 떨곤 하는 리히터는 〈4900가지 색채〉에서도 〈돔 펜스터〉와 마찬가지로 우연과 무작위성이 역할을 잘 수행할 수 있도록 기준만 제시하고는 한 발 물러섰다. 페인트 가게의 색상표를 차용했다는 것 자체가 색을 작가가 아니라 누군가에게 선택된, 즉 레디메이드적 요소로 상정한 것이다. 특정한 색이 선호될 리도 없고, 모든 색에는 어떤 위계나 우위도 없으며, 따라서 모든 색은 평등하다. “(작가를 포함한) 누구도 색상 배치에 통제권을 가질 수도 없다”는 점에서 탈권위적이기까지 하다. 여기에 예술가의 재현적 의도의 개입을 원천 차단함으로써, 리히터는 팝아티스트의 태도를 견지했다. 특수하게 고안된 컴퓨터 프로그램에 무작위로 색의 배열을 일임했고, 각 패널의 설치 방식도 소장자 혹은 기획자의 판단에 맡겼다. 1백96개의 패널을 모두 전시할 필요도 없다고 공표했으니, 〈4900가지 색채〉가 작가의 품을 떠나 얼마나 독립적으로 생존할 수 있는지 두고보려는 심산이었던 게 틀림없다. 하지만 평론가 디터 슈바르츠와의 대담을 보면 리히터는 꽤 진심이다. “저는 각각의 색은 나머지 모든 색과 어울리고, 각기 나름대로 (아름다운) 무언가를 만들어낸다는 걸 깨달았어요.”
우연과 반복, 즉 최소의 통제와 최대의 방임이 완성한 〈4900가지 색채〉는 이러한 미덕들을 동력 삼아 살아 있는 개체 같은, 작품이 스스로 만들어진 듯한 생명력을 획득한다. 특별할 것도 없는 색과 그리드가 서로 관계 맺고, 캔버스 밖으로, 공간 밖으로, 세상 밖으로 무한히 확장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내재하는 건 이런 이유 때문이다. “설명이 가능하고 의미가 담긴 그림은 나쁜 그림”이라 주장하는 그는 작가가 작품의 중심이라는 오래된 정의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르네상스 시대 이후 예술은 공예와 차별화하기 위해 작가의 주체성, 주관성, 개성 등을 절대시해왔지만, 반대로 리히터는 작가 자신을 지움으로써 더 광대한 가능성을 도모한 것이다. 그러므로 제목 ‘4900가지 색채’는 곧 4천9백 가지의 색이 구현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어떤 색이 다른 색과 나란히 놓이고, 만나고, 어우러지는 4천9백 가지의 우연과 그 이상의 가능성을 의미하고 있다. 혹자의 말대로 다른 대상과 충돌을 하든 조화를 이루든, ‘자기만의 몸’이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미술세계와 현실에 공히 적용되는 일종의 우화가 된다.

이번에 서울에서 소개된 네 가지의 〈4900가지 색채〉 구성 중 가장 작은 사이즈의 작품은 9개의 패널로 이루어져 있다.
“나에게 무작위성이 중요한 주제인 이유는 삶도 그렇기 때문이에요. 만일 한 남자가 한 여자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 둘은 어떻게 되었을까요?”(〈예술과 풍경〉 中) 리히터의 질문에 저자 마틴 게이퍼드는 기다렸다는 듯, 그렇다면 과연 리히터는 어떻게 되었을까 반문한다. 그가 근대와 현대, 그리고 초현대에 이르는 한 세기 동안 나치즘과 사회주의라는 전체주의부터 자본주의까지 모두 경험하고, 모더니즘과 포스트 모더니즘을 흡수해 도로 뱉어내길 반복하며 세상을 보는 미술 공식을 만들어냈다는 사실은 익히 알려져 있다. 세상의 질서가 격변할 때마다 예술가의 대의와 결심이 일순에 휴지조각이 되어버리거나 뒤집히는 상황을 번번이 겪었을 것이다. “시작은 쉽지만 끝에 도달하긴 어렵다”는 걸 체득한 그에게는 ‘이 훌륭한 작품을 내가 그렸다’가 아니라 ‘나는 그린다’가 더 절실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질문과 답의 중간 정도로 읽히는 위의 평범한 의문문은 우연과 무작위성, 그리고 가능성의 삼위일체가 삶 면면을, 역사의 순간순간을 어떻게 담담하게, 아름답게 그려낼 수 있는지를 경험으로 잘 알고 있는 자만이 던질 수 있는 질문이다.
리히터의 자전적 영화 〈작가 미상〉은 이러한 과정들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그가 어떤 우연을 맞닥뜨렸고, 얼마나 이를 존중했으며, 무엇을 선택하며 삶과 예술의 필연적 관계를 꾸려왔는지 등등. 물론 사생활을 공개하지 않기로 유명한 당사자는 자기 인생을 너무 내밀하게 보여준다는 이유로 좋아하지 않았다지만, 이만큼 리히터를 명료히 그려낸 텍스트는 보지 못했다. 영화 속에서 현대미술계에 처음 발을 들인 리히터는 고유의 언어를 찾으려 이런저런 시도를 하지만 모두 의미 없다. 결국 이모와 찍은 사진을 모사하는 (훗날의) ‘사진 회화’를 그리면서, 자기 이야기에서 자신을 지움으로써 실마리를 찾는다. 하지만 이때조차 포기 혹은 고투한다는 느낌이라기보다는 원대한 목표도, 체계도, 강령도, 일관된 삶도 앞세우지 않은 채 ‘할 수 있는 걸 한다’는 태세로 느린 속도로 달린다. 불확실성을 벗삼아, 진지하고 자유롭게. 삶을 대하는 군더더기 없는 태도가 어찌나 포스트모던한지, 그 반대편에서 삶의 안녕과 안정, 쥐꼬리만 한 명예와 허세를 사수하고자 제 존재를 각인하려 악다구니 쓰는 나라는 인간을 발견하곤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런 경험들이 ‘푼크툰(경험에서 오는 강한 인상과 감정)’이 아니면 대체 무엇인가. 이 역설의 예술가는 실은 우연까지도 계획이었다고 딴소리할지도 모르지만 실망하지 않을 작정이다. 비워내는 것이야말로 리히터의 힘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