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톱, 스커트는 Eenk, 귀고리는 Leyie.
수묵처럼 옅은 웃음을 짓고 자분자분 말을 잇는 김새벽은 자신의 연기가 그 시 같다는 걸 알까? 중학생 은희와 은희의 시절을 가슴에 품고 사는 이들의 무너진 마음을 세워준 〈벌새〉의 ‘영지’도, 지난한 삶의 잡음 속에서도 제 리듬을 지키는 〈얼굴들〉의 ‘혜진’도, 〈국경의 왕〉의 ‘유진’과 〈풀잎들〉의 ‘지영’도 그런 삶을 살아본 적은 없지만 어떤 순간의 기분과 마음을 떠올리게 한다. 그들의 삶 안에 여성의 마음을 만지는 서사가 있고 김새벽은 그 인물의 대사를 꼭 자기 말처럼 읊었다. 영지일 땐 영지가, 혜진일 땐 온전히 혜진으로만 보이는 건 ‘연기력’이라는 단어로 매길 수 없는 재능이다. 어떻게 그 사람이 될 수 있는지 살피려 던진 질문에 답 대신 부정이 돌아왔다. “아뇨. 안 돼요. 그냥 애쓰는 거예요.(웃음) 뭐라도 해보려고요. 만약 제가 정말 그 인물로 비춰졌다면 작품 속 상대가 나를 그런 눈으로 바라봐줘서, 내가 그 사람으로 보일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준 감독과 스태프가 있어서 된 걸 거예요.”
좀처럼 입을 열지 않으며 자기 안에만 머물 것 같은 김새벽은 의외로 그 주의가 바깥을 향해 있다. 배우가 된 것도 ‘사랑받고 싶어서’였고, 일을 계속하고 싶다고 느낀 것도 함께 작업하는 동료와 감독, 스태프가 만드는 현장의 에너지 때문이라고 말한다.

톱, 스커트는 Eenk, 귀고리는 Leyie.
그 뒤로 김새벽은 30여 편의 영화와 두 편의 단막극을 찍으며 인상 깊은 연기를 펼친 배우에게 주는 다섯 개의 트로피를 받았다. 사랑은 받고 싶지만 칭찬엔 익숙하지 않은 그녀는 단단한 필모그래피를 앞세우고도 한동안 ‘배우를 계속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과 부딪혔다고 고백했다.
그 물음과 연결된 두 개의 답이 관객과 만날 준비를 마쳤다. 베를린 국제영화제 은곰상을 탄 〈도망친 여자〉와 〈킹 메이커〉가 적당한 개봉일을 찾는 중이다. 관객이 할 일이란 그가 찾을 더 많은 답들을 기다리는 것뿐. 김새벽은 10여 년, 3천6백50일 동안 고작 1백50일 정도만 현장에 있었다고, 앞으론 더 자주, 많이 촬영장에 나가고 싶다고, 약속 같은 의지를 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