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Culture

창작자들이 가고 싶은 영화 속 장소

영화 그리고 휴식의 몽상

BYBAZAAR2020.07.08

Saint-Marc, HAITI

〈윌로 씨의 휴가〉 자크 타티
어릴 적부터 지금껏 지독하게 꿈꾸는 휴양지 풍경이 있다. 〈윌로 씨의 휴가〉 속 해변은 아이티의 생마르크라고 한다. 자크 타티가 만들어낸 최고의 캐릭터인 윌로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영화 〈윌로 씨의 휴가〉는 시종 웃음이 나는 아기자기한 슬랩스틱으로 가득하다. 영화 초반, 윌로가 고물차를 몰고 해변으로 향하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사건 전개와는 그다지 맥락이 없어 보이는 쇼트들이 이어진다. 그것은 바로 바캉스를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 휴양지에서 일어날 법한 초단편의 에피소드들이 궤를 이룬다. 나는 쉬고 싶을 때는 타티의 영화를, 무슨 일이든 일어났으면 좋겠네 싶을 땐 에릭 로메르의 영화를 본다. 두 영화 모두 휴양지를 배경으로 일어나는 사건을 담고 있다. 언젠가부터 로메르의 지지부진한 연애 이야기는 별로 끌리지가 않는다. 타티의 사랑스러운 쇼트를 보는 것이 더 좋다. 아기자기한, 그러나 무수하기만 한 일상의 모양들. 복잡한 삶을 단순하고 귀엽게 만들어내는 타티만의 시선이 좋았다. 바캉스를 즐기는 사람들 속에 나도 풍덩 빠져버리고 싶다. 프랑스 남부 해변이나 바르셀로나의 강렬한 볕을 쬐면서 몇 시간이고 누워 있고 싶은 마음. 여일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한 달이든 두 달이든 머무를 생각으로 여행지에서의 시간을 보내는 것. 생마르크는 아니지만, 몇 해 전 오키나와에 한 달 정도 머무르면서 나름의 바캉스를 보낸 적이 있다. 해변 근처에 사는 사람들 특유의 나른함과 비수기 관광지의 적적함을 느끼면서, 타티의 영화 속 인물들을 몰래 따라 하기도 했다. 노을을 바라보면서 마시는 맥주, 모래사장에 발을 담그고 누워 읽던 책, 수영복을 입은 채 들어간 커피숍에서 흘러나오던 노래. 모든 것이 좋았다. 그곳에서 나는 한 노인에 관한 소설을 썼다. 휴양지에서 생을 마감하려는 노인에 대해. 윌로의 또 다른 모습이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차현지(소설가)
 

 

BERLIN, GERMANY

〈굿바이 레닌〉 볼프강 베커
독일의 통일 과정을 귀여운 블랙코미디로 그려낸 영화 〈굿바이 레닌〉에는 주인공 알렉스와 여자친구가 빈집을 점거하고 기뻐하는 장면이 나온다. 밀린 고지서가 잔뜩 꽂힌 현관문이 열리는 순간, 나는 그 집이 오래전 베를린에서 묵었던 숙소와 흡사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컴컴하고 낡은 계단과 벽, 담쟁이덩굴과 내부 정원이 내다보이는 창, 그리고 작은 욕조까지.
 
영화 속 아파트는 동독을 탈출한 주민이 버린 집이었지만 나와 친구들이 묵었던 곳은 밀린 월세 때문에 잠적한 어느 한인 청년의 집이었다. 건너건너 소개받은 터라 그런 상황을 전혀 알지 못했던 우리는 전기가 끊긴 컴컴한 집에서 영문도 모른 채 첫날을 보냈다. 그리고 이튿날 아침, 기막힌 타이밍으로 한국에서 아들을 찾으러 도착한 청년의 어머님과 마주하게 되었다. 야심찬 관광 일정을 짜 온 우리는 베를린이 추워서 싫다는 어머님과 원룸에서 열쇠 하나를 공유하는 어색한 동거를 시작했다. 숙식을 같이한 사흘째, 나는 어머님의 부탁으로 베를린 시내의 말도 안 통하는 열쇠가게에서 열쇠를 복사하고 있었다. 그 시간, 숙소에 한인교회 관계자가 나타나 어서 이 집을 비워야 한다고 호들갑을 떨고 있는 줄도 모르고 말이다. 어머님은 아들이 있을 곳으로 추정되는 다음 행선지로 떠나셨고, 우리는 겨우겨우 구한 호스텔로 짐을 옮겨 남은 투어를 시작했다. ‘베를린 천사’가 앉아 있던 전승기념탑에도 올라가보고, 되너 케밥을 먹으며 넘실대는 슈프레 강도 건너보았다. 마트에서 빈 맥주병도 되팔아보고 케테 콜비츠가 살았다는 동네에도 가보았다. 그러나 미처 몰랐던 것은 우리가 묵은 숙소와 돌아다녔던 지역의 대부분이 1990년까지 동독이었다는 사실이었다.
 
〈굿바이 레닌〉에 나오는 동독의 풍경과 오늘날 ‘DDR(Deutsche Demokratische Republik, 독일민주공화국) 디자인’으로 남은 주인공들의 집을 뚫어지게 보며 나는 언젠가 베를린에 다시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특히 여행 마지막 날 프랑스행 기차표를 잘못 끊어 몰래 하루 더 묵을 수밖에 없었던 그 빈집이 다시금 궁금해졌다. 
-김목인(음악가)
 

 

Los Angeles, USA

〈탠저린〉 션 베이커
〈탠저린〉은 트랜스젠더 신디가 감옥에 갔다 온 사이 바람난 남자친구 체스터를 추적하는 이야기다. 로스앤젤레스 외곽을 배경으로 흑인 트랜스젠더, 길거리 여성, 이민자, 마약 딜러들의 특별할 것 없는 크리스마스 이브를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보여주는 블랙코미디이자 막장드라마인데, 감독은 이들을 동정 어린 시선이나 사회운동의 관점으로 대상화하지 않고 오늘을 살아가는 평범한 이웃으로 친밀하게 그린다. 주로 보여지는 L.A 풍경도 중심가에서 벗어난 어느 동네의 뒷골목이나 바, 모텔, 도넛 가게 등 사소한 곳들이다. 영화는 아이폰 5S로 촬영되었다. 넓은 화각이 담아낸 L.A의 풍경과 인물들은 어딘지 친숙하고 아름다우며 쓸쓸하다. 맥락 없이 깔리는 음악들도 주옥같다. 독특한 연출 스타일이 〈굿타임〉 〈언컷 젬스〉등으로 주목 받고 있는 사프디 형제를 떠올리게 하는데, 이런 유의 감각적이고 새로운 스타일의 미국 영화를 뭐라고 부르는지? 뉴 아메리칸 시네마? 아무튼 영화 속 어딘가로 갈 수 있다면, 〈탠저린〉 속 L.A 외곽 뒷골목을 거닐다 도넛 가게에서 허기를 때우며 하릴없는 시간을 보내고 싶다. 버스에 앉아 이어폰을 귀에 걸고 차창 밖으로 노을 지는 선셋대로를 바라보고 싶다. 어느 이민자의 집에서 싱거운 저녁을 먹고 텐션 터지는 흑인 트랜스젠더들과 거리나 바에서 수다를 떨어도 좋을 것 같다. 너무 평범하고 일상적이며 사적이어서 더 낯선, 그런 곳에 가보고 싶다. 
-이강혁(사진가)
 

 

Aionia

〈환송대(La Jet´ee)〉 크리스 마커
밤과 낮. 시간은 흐른다. 폐허를 선회하며 낮게 날아가는 재건. 크로노스의 주름진 파장 아래 밀사의 얼굴이 반복적으로 떠오른다. 확실히 꿈은 아니었다. 그의 밀정은 적에 의해 일방적으로 감행된 시간 여행의 한 종류였다. 그의 무의식보다 광활한 아이오니아의 평면 위로 갓 지은 도시가 솟아난다. 가공할 표식들은 폐허 혹은 재건 이후에도 자생하고 있었다. 기억할 수는 없지만 알아볼 수 있는 도시. 그는 여전히 이곳을 파리라고 불렀지만, 파리의 밤과 낮은 그의 목걸이에 적힌 날짜를 읽어내기에 턱없이 늙었거나 알아볼 수 없는 풍경 다발들로 얽혀 있었다. “이곳은 나의 고향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문장을 읽어내듯 그녀는 그가 모르는 이름들을 읊조린다. “그들은 기억도 없고 계획도 없다. 시간은 그들 주위에서 고통 없이 스스로를 구성한다. 열흘째 되던 날, 이미지들이 고백처럼 일어서기 시작한다.” 그와 그녀는 얼어붙은 지평에 펼쳐진 기억의 박물관을 거닐고 있다. 박물관, 자연사, 혹은 자연사 박물관, 무엇도 꿈은 아니었다. 그러나 밤과 낮. 그녀가 돌연 얼음이 되었을 때 그는 유령의 이름으로 평행하고 있었다. 그의 밀정이 중단될 때마다 그녀는 이미 옛날에 죽은 사람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정확한 시간 속에 던져진 그는 거기에 머물며 노력 없이 움직일 것이다.” 그들의 그림자는 저공비행하는 부엉이의 허기처럼 도시를 그늘지게 한다. 그들은 그늘의 가장자리에 머물며 노력 없이 부유할 것이다. 그녀가 죽은 새의 부리를 가리킨다. 죽은 새의 팔백서른한 번째 날을 들어 올리는 그녀의 손끝에 낮이 파문처럼 고여 있었다. 그와 그녀는 방부 처리된 죽은 동물들의 지켜봄 가운데 그들을 소환한 마지막 과거로 격리된다. 노력 없이. 낮의 소용돌이를 해제한 그들이 진공에 불가능한 시야를 포개기 시작한다. 이제 시간은 흐르지 않을 것이다. 아이오니아가 그들을 추방하지 않듯이. 영원은 막다른 곳에서 고통 없이 스스로를 구제한다. “사랑은 시간에 대한 유일한 승리이므로.” 위지영(소설가, 뮤지션)
 

 

LAPLAND

〈북극의 연인들〉 훌리오 메뎀
‘거꾸로 읽어도 똑같은 말’을 뜻하는 회문. 감독 메뎀(Medem)과 주인공 아나(Ana), 오토(Otto)는 모두 회문식 이름을 가지고 있다. 영화는 이들의 이름처럼 반복과 순환이 계속되는 ‘백야의 땅’ 라플란드에서 전개된다. 유럽의 최북단인 이곳은 백야와 극야가 극명하게 나타나 여름에는 해가 지지 않고 겨울에는 해가 뜨지 않는다. 수평선을 따라 흐르는 자정의 태양. 이처럼 시작과 끝의 경계가 모호한 풍광은 윤회의 흐름을 떠오르게 한다. 언젠가 찾아올 삶의 마지막 순간을 인적이 드문 라플란드 호숫가에서 정리하고 싶다.
-정다혜(사진 집단 ‘filed’)
 

 

IZTACCIHUATL, MEXICO

〈홀리 마운틴〉 알레한드로 조도로프스키
이국적인 거리와 고대 아즈텍의 흔적들을 가로질러 성산의 꼭대기로 오르는 여정 내내 눈이 즐겁다. 산의 정상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며 감독한다는 불멸자를 찾아 나서는 수행자들 틈에 섞여 날것의 배낭여행을 하는 기분이다. 반복해서 등장하는 풍화된 바위와 피라미드 사원들은 자꾸만 고대의 삶, 과거의 인류를 생각나게 한다. 미디어에서 흔히 접하는 국경지대의 카르텔 얘기가 아닌 본연의 멕시코 그 자체를 담고 있다.
-이민주(사진 집단 ‘filed’)
 

 

CREMA, ITALY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루카 구아다니노
비일상을 경험할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 여행지가 될 수 있다. 한창 정신없고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을 무렵 마주한 비일상의 형태는 영화 한 편이었다. 이탈리아 크레마를 배경으로 펼쳐진 장면들에서 과거에 떠났던 유럽 여행의 잔상이 스쳤다. 맑은 하늘에 투명한 햇빛 사이로 흰구름 떼가 흘렀고, 도처에 널린 공원은 일광욕을 즐기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한없이 여유로운 일상들. 필름 몇 롤과 카메라 한 대를 들고 다니며 가슴 뛰는 순간 앞에서 셔터를 눌렀던 기억은 이제는 지나간 시간만큼 미화되어 다시 경험할 수 없을 것 같은 환상에 가까운 추억이 되었다. 눈부시고 흐릿했던 회상도 잠시, 스크린과 사운드에 몰입되어 부풀었던 간접 여행의 설렘은 영화관을 나서는 순간 시끄러운 거리의 소음과 북적거리는 인파와 함께 빠른 속도로 흩어져버렸다.
-강경희(사진 집단 ‘filed’)
 

 

SATTE, JAPAN

〈사쿠란〉 니나가와 미카
사진작가인 니나가와 미카 감독의 강렬한 색감이 감각적인 영화. 어수선하면서 몽롱한 상태라는 뜻의 '사쿠란', 영화는 초반부터 끝까지 강한 색감과 연출을 보여주며, 보고 난 후에는 붉은 잔상이 신기하도록 오래 남는다. 화려하면서도 정갈한 실내 구조와 유채꽃밭에 벚꽃이 휘날리며 시이나 링고의 음악으로 끝나는 장면은 이맘때쯤 항상 가곤 했던 교토와 많이 닮았다. 온전히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러 갔던 그곳의 초여름은 낮엔 살짝 후덥지근하고 저녁엔 기분 좋게 선선한 바람이 불었었다. 지금 교토를 갈 수 있다면 좋아하는 편의점 당고와 커피숍의 시원한 커피 하나를 사서 푸른 카모 강을 바라보며 아무 고민 없이 누워 시간을 보내고 싶다. 가까운 거리도 떠날 수 없게 된 일상 속에서 가장 그리운 여행자다운 생활.
-이소정(사진 집단 ‘filed’)
 

 

FAKE CITY

〈플레이타임〉 자크 타티
〈플레이타임〉은 영화를 위해 설계한 거대한 세트장으로 유명하다. 촬영을 위해서 도시 하나를 통째로 제작했다. 타티빌(Tativille)이라고도 불리는 이 세트장은 공항, 사무실, 아파트 등 도시를 구성하는 공간을 절제되고 균일한 미감으로 아주 ‘도시답게’ 보여준다. 싸이월드 미니룸에 당시에 꽤 많은 돈을 써가며 원하는 공간을 꾸며내는 것에서부터 포토샵 도장 툴을 사용하여 원본과는 꽤나 다른 사진을 만들어내는 것까지 항상 모든 요소를 마음대로 통제하고자 하는 욕망이 있었다. 물론 금전적인 이유로 컴퓨터그래픽에 의존한 시각적 만족에 그쳐야 했지만. 그 욕망을 물리적으로 실현한 타티빌은 가보고 싶은 장소로 남아 있다.
-유현선(사진 집단 ‘fi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