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STYLE

영화인들이 가고 싶은 영화 속 장소

영화 그리고 휴식의 몽상

프로필 by BAZAAR 2020.07.05

 DAKAR, SENEGAL

<애틀랜틱스> 마티 디옵
이제는 가까운 이웃 나라도 쉽게 갈 수 없는 시대. 영화 속이라면 아주 멀리 가도 되겠지. 작년 칸 영화제에서 흑인 여성 최초로 심사위원대상을 받은 마티 디옵 감독의 <애틀랜틱스>는 서아프리카 세네갈이 배경이다. 임금 체불로 힘들어하는 남자와 딴 남자와 결혼해야 하는 여자의 사랑이야기는 현실적이지만 신비롭고, 용감하지만 서글프다. 멀디먼 나라의 러브스토리에는 대서양으로 뻗은 세네갈의 바다가 여러 모습으로 등장한다. 남자를 집어삼킬 것 같은 두려움의 밤바다, 여자의 상실감이 가득한 새벽바다, 망령들이 깨어나기 시작하는 해가 지는 바다, 아름다운 사랑의 속삭임이 들리는 아침바다, 차분하지만 강렬한 영상과 사운드로 영화에 담겨진 세네갈의 바다들은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촬영했던 클레르 마통 촬영감독이 촬영했다. 영화를 보고 나서 홀린 듯 세네갈의 바다를 검색해보니 영화와는 조금 다르게 꽤 휴양지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그래서 더 가보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박혜진(‘아트나인’ 프로그래머)
 

 

BUENOS AIRES, ARGENTINA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사랑에 빠질 확률> 구스타보 타레토
친구가 지구 반대편으로 출장을 간다고 했다. 숙소가 나올 거라고 했다.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춘광사설>의 아휘와 보영, 보르헤스의 도서관 그리고 탱고.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대해 알고 있는 건 그게 전부였다. 모르는 채로 무작정 가는 것도 어쩐지 그곳과 어울리는 것 같았다. 두 번의 비행기 환승을 거쳐 만 하루 만에 다른 계절에 도착했다. 친구는 낮이고 밤이고 일 때문에 바빴고, 나는 혼자 있는 그 시간 동안 열심히 걸어 다녔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점 랭킹에 늘 오른다는 곳에 갔다. 오페라 극장을 개조한 인테리어가 눈길을 끌었지만 그게 다였다. 문학 코너의 보르헤스 섹션에는 몇 권 되지 않는 책들이 듬성듬성 놓여 있을 뿐이었다. 보르헤스가 말년을 관장으로 지냈던 국립도서관에 갔다. 외국인 관광객이 들어갈 수 있는 곳들은 한정적이었고, 서가를 복도에서만 바라보며 혼자 상상했다. 그래, 보르헤스가 이 바닥을 한 번쯤은 밟았을 거야. 그 외에도 꼭 가야만 한다는 장소들을 이리저리 걸어 다녔다. 산 텔모의 상인들은 아무리 봐도 바가지를 씌우고 있었고, 라 보카의 반도네온 연주자들은 사무실에서 일하는 회사원의 표정을 하고 있었다. 정열과 낭만은 지구에서 멸종한 게 틀림없다고,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생각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사랑에 빠질 확률>을 봤다. 뻔한 제목의 로맨틱코미디라 생각해 코웃음도 쳤던 것 같다. 하지만 짐작했던 그런 영화가 아니었다. 버스도 택시도 지하철도 타지 않고 걸어만 다니는 마틴은 ‘실패한 도시계획’의 산물 안에 틀어박혀 모든 것을 인터넷으로 해결하고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탈 수 없는 마리아나는 실패한 지난 연애, 실패한 지난 꿈이 힘겨워 종종 울며 버티고 있었다. 이후로도 실패와 실패를 거듭한 뒤 그들이 갇혀 있던 ‘측벽'(영화의 원제. 사랑도 리콜이 되냐고 묻는 부류의 제목은 언제까지 이어질는지!)에 창문을 내고, 마침내 두 사람은 마주하게 된다. 사랑은 결과 중 하나였을 뿐, 목적은 아닌 영화였다.
 
이 영화를 보고 겨우 생각할 수 있었다. 시작을 잘못했구나. 부에노스아이레스는 관광지로 바라봐선 안 되는 곳이었다. 가야만 하는 곳을 가야 하는 곳이 아니었다. 여행의 기본을 새삼 깨우친 느낌이었다. 측벽에 창문을 내지 않으면 만날 수 없듯 틀에서 벗어나야 볼 수 있는 것들이 있는 법이니까. 다시 가보고 싶어졌다. 관광지가 아닌 도시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보고 싶어졌다. 한때 영화를 누렸던 흔적이 남은 도시를, 마르티나가 오르내리던 나선형의 계단을, 마틴이 어쩔 수 없이 걷던 길을 가보고 싶어졌다. 실패한 과거가 전부가 아닐 거라 기대하면서. 그러다 그 틈에서 무언가를 발견해도 좋고, 아니어도 좋을 거다. 어쨌든 남들이 가야 한다고 했던 곳들은 다 가본 셈이니, 이번엔 더 즐길 수 있겠지. 물론 그곳에서 사랑에 빠질 확률은 여전히 제로에 가깝겠지만. 
-정미은(번역가)
 

 

OHTARU, JAPAN

<윤희에게> 임대형
겨울 풍경은 마음 깊숙이 자리한 그리움과 외로움을 소환해낸다. 20여 년 전 가족의 억압으로 헤어져야 했던 윤희와 쥰이 편지 한 통으로 다시 연결되기에 이보다 맞춤인 계절은 없다. <윤희에게>의 카메라는 한국 지방 소도시의 스산한 풍경과 일본 오타루의 눈 쌓인 풍경을 넘나든다. 바다 건너 이어지는 그 연결이 가슴 시리게 애틋했다. 다 떠나서, 첫 장면부터 나는 이 영화에 이미 지고 말았다. 삿포로에서 오타루로 넘어가는 기차 안에서 보게 되는 바다의 풍경들. 덜컹거리는 기차 소리가 오타루의 추억을 소환했다.
 
일본 홋카이도 지역을 여러 번 갔지만 번번이 오타루의 여름만 보았다. 기온이 낮은 지역이라 여름이 되면 피신하듯 찾았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에 담긴 곳들은 분명히 내가 지나치거나 머물렀던 곳인데, 계절이 다르다는 이유로 생경하고 또 훨씬 아름다웠다. “겨울 오타루에 가고 싶다.” 나도 모르게 영화를 보며 중얼거렸다. 물론 지금은 세계를 휩쓰는 전염병으로 발이 묶였다. 게다가 일본은 정치외교적인 문제까지 얽혀 있는지라 여행지로 선뜻 고르기 더 어려워졌다. 다만 이런 상상은 한다. 다시 간다면, 그리고 계절이 겨울이라면. 더위로 몸이 녹아내릴 것 같은 계절에 상상하는 겨울 여행은 산뜻하다.
 
윤희와 딸 새봄이 여행 중 머무는 오타루의 고급 온천은 고라쿠엔이다. 이곳에 머문 적이 있기에 금세 알아보았다. 예산을 무리해서까지 하룻밤 묵었던 건 지금도 잘한 결정이었다고 생각한다. 개별 온천이 딸린 다다미방은 미리 예약해야 하고, 숲에 둘러싸인 듯한 기분을 선사했던 공용 노천탕은 숙박객 모두가 이용할 수 있다. 따뜻한 물에 한껏 노곤해진 몸으로 방에 들어오면 차려지는 연회용 코스 요리인 가이세키의 맛과 차림새도 훌륭했다. 겨울에는 한층 더 좋을 것이다. 오타루 기차역 뒤쪽에 있는 조용한 마을인 도미카와는 극 중 쥰의 집이 있는 곳이다. 파스텔 톤의 지붕들이 인상적이다. 이곳에서 마사코 고모가 운영하는 카페 ‘오버로드’로 등장했던 초비차까지는 충분히 걸어서 이동할 수 있다. 팬케이크가 맛있는 곳이다. 밤이 되면 운하에 도착할 것이다. 윤희와 쥰이 재회했던 곳, 억지로 끊어졌던 두 사람의 시간이 다시 이어져 흐르기 시작한 그곳에.
 
임대형 감독을 인터뷰하며 알게 된 사실 중 하나는, 오타루 사람들은 겨울에 패딩을 입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윤희는 쥰이 있는 곳에 더 어울리는 사람이기에, 오타루 여행 내내 패딩을 입은 딸과는 달리 코트에 머플러 차림이다. 가까이 가면 겨울의 냄새가 날 것 같은 윤희의 뒷모습이 떠오른다. 그 뒤를 따라, 눈 쌓인 겨울 오타루의 길에 발자국을 남기는 상상을 한다. 
-이은선(영화 저널리스트)

Credit

  • 에디터/ 박의령
  • 사진/ 리틀빅픽처스,영화사 진진
  • 웹디자이너/ 김유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