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나리오상 가제였던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가 최종 제목으로 확정됐다. 아홉 글자의 서술형 문장이라니 꽤 과감한 선택인데, 제목에 대한 감흥이 어떤가?
이정재: 인남(황정민)과 주변 인물들 모두 무언가로부터 구원받고 싶은 사람들이다. 캐릭터가 갖고 있는 절박함이 표현되어 있어서 잘 어울리는 제목이라고 생각했다. 요즘 영화들 대부분 제목이 두세 글자인데, 그와 비교해 더 신선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개인적으론 처음부터 이 제목이 본 영화까지 이어지길 바랐다.
시나리오를 덮고 가장 처음 든 생각은 무엇이었나?
황정민: 재미있다. 이거 100% 흥행한다! 박정민: 굉장히 재미있는 할리우드 영화를 한 편 본 느낌? 기존에 있는 이야기고 아는 이야기라 하더라도 재미있는 건 재미있는 거니까. 이정재: 절박함의 색깔이 다르다는 것. 시나리오에 등장인물들이 가지고 있는 서로 다른 절박함이 굉장히 인상 깊게 묘사되어 있었다. 한쪽이 부성애가 돋보이는 절박함이라면 한쪽은 복수를 위한 절박함이다. 무엇보다 정민 형과 다시 한 번 작품을 하고 싶다는 마음이 강했고.
박정민이 입은 재킷은 Paul Smith. 티셔츠는 John Elliott. 황정민이 입은 재킷은 Ralph Lauren Purple Label. 셔츠는 Lansmere. 이정재가 착용한 재킷, 셔츠는 모두 Louis Vuitton.
〈신세계〉가 두 사람의 티키타카가 중요한 영화였다면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는 극적인 순간에 몇 번 마주해서 에너지를 폭발시켜야 하는 작품이다. 7년 전과 비교하면 어떻게 달랐나?
황정민: 브로맨스였잖아. 뽀뽀만 안 했을 뿐이지 워낙 친하다.(웃음) 이 영화에서는 그때처럼 자주 마주치진 않는다. 사실 인남 입장에서는 레이(이정재)는 피하고 싶은 존재인데 워낙 걔가 로트와일러처럼 달려드니까. 이정재: 〈신세계〉 이후 7년이라는 시간 동안 형과 섭섭하지 않을 정도로 만났다. 워낙 친하다 보니 이번엔 친목 도모보다는 오히려 각자의 캐릭터에 집중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렇다고 자기 역할에만 몰두해 있었단 얘긴 아니고 만나면 늘 영화 얘기로 끝났다.
황정민이 입은 티셔츠는 Alexander Wang. 이정재 가 입은 재킷은 Hugo Boss.
결국엔 장르영화의 틀 안에서 어떤 신선함을 가미했느냐가 관건일 텐데.
황정민: 나와 정재가 다시 만난다는 것이 가장 큰 신선함 아닐까. 그리고 액션. 남들이 하는 건 안 하려고 하다 보니 시나리오보다 규모가 더 커졌다. 폭탄도 한 번 터뜨릴 거, 세 번 네 번 더 터뜨리고. 총격 신도 실제로 타격하면서 찍었다. 나는 가스총을 썼고, 정재가 야외에서 쓴 총은 실제 총이었다. 그래서 좋았다. 예를 들어 공포탄을 쓰면 나도 모르게 눈을 감게 돼서 재촬영 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번에는 가스총을 이용하니까 연기에 더 집중할 수 있었지. 원래 액션을 찍다 보면 ‘척’ 하게 된다. 맞는 척. 때리는 척. 카메라로 속고 속이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 영화는 진짜 때리고 맞았다. 액션보다는 싸움에 가까웠다. 결론은 다시는 안 하고 싶다는 거다.(웃음)
〈한밤의 암살자〉 〈백주의 탈출〉 〈온리 갓 포기브스〉의 주인공들과 비교하자면 인남이 조금 더 처절한 킬러다.
황정민: 살인청부업자라는 직업을 갖고 있지만 항상 죄책감을 지니고 살고 있는 인물이다. 인남이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일을 하는 킬러라면 레이는 그저 무자비한 암살자다. 굳이 비교하자면 인남이 좀 낫지 않나? 그나마 고쳐 쓸 수 있는 인간이잖아. 희망 없는 인생을 살던 남자가 세상에 존재하는 줄도 몰랐던 자기 아이에 대해 알게 된다. 인남에겐 그 아이가 한 줄기 빛이다. 그 빛을 따라가다가 이 인물이 결국 끝을 장식하는 방식이 충분히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다.
재킷은 Tom Ford. 니트는 Fendi. 팬츠는 Dries Van Noten by BOONTHESHOP. 신발은 Saint Laurent by Anthony Vaccarello. 벨트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이정재가 악역을 하면 그 영화는 성공한다”라는 속설이 있다. 그런데 이번 역은 〈하녀〉 〈도둑들〉 〈암살〉 〈신세계〉 〈관상〉 등 지금까지 연기한 악역들과는 사뭇 결이 다르다. 조커 같은 ‘혼돈악’ 유형이랄까.
이정재: 난 레이가 악역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복수를 해야겠다는 절대적인 이유가 있기 때문에 끝까지 쫓아가는 거지. 사실 레이가 왜 이렇게까지 집요하게 구는가에 대한 정보가 영화상에 거의 나오지 않는다. 때문에 첫 신부터 관객에게 믿음을 줘야 했다. 아무 설명 없이 레이의 눈을 본 관객들이 ‘아, 쟤는 그럴 것 같아.’라고 생각할 수 있도록. 그래서 이번 영화에서 내가 기댈 곳이라곤 비주얼밖에 없었다.(웃음)
현란한 프린트의 셔츠부터 목을 타고 올라온 타투까지. 필모 사상 가장 화려한 스타일링이다.
이정재: 보통 영화 속 스타일링은 영화 스태프에게 맡기는 편이다. 내 생각이나 취향이 너무 많이 들어가면 인물에 완벽하게 들어갈 수 없다고 생각하거든. 이번에는 좀 어려울 것 같더라. 타투만 하더라도 여러 디자인이 있었고 그걸 조합해내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스태프들이 고생 많았지.
베스트, 팬츠는 모두 Alexander McQeen. 셔츠는 Dolce & Gabbana.
“당신은 왜 총을 갖고 있습니까?” 〈한밤의 암살자〉에 나오는 이 질문을 레이에게 던져보자. 레이는 왜 총을 가지고 있을까? 총이란 그에게 어떤 의미일까?
이정재: 사람을 좀 더 빨리 죽이기 위한 도구?(웃음) 이 인물이 그 정도로 단순하다니까. 정서를 읽을 만한 단서가 없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알 수 없고. 그래서 더 공포가 커지는 것 같다. 정보가 없다는 것, 그게 오히려 레이라는 캐릭터를 강렬하게 만든 것 같다.
전체 분량의 80% 이상을 태국과 일본에서 촬영했다. 지금으로선 마음대로 해외로 나갈 수 없기 때문인지, 이 영화의 이국적인 분위기가 유독 와 닿더라.
황정민: 이런 상황이 될 줄은 몰랐다. 해외에서 촬영을 끝내고 한국에 들어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코로나가 터졌으니까. 기존 한국 영화에서 주 무대가 완전히 외국인 경우는 없었다. 확실히 국내 촬영과는 색감이나 질감 자체가 다르다. 외국 영화 보는 느낌이 들 것이다. 박정민: 사실 해외에서 찍은 한국 영화들을 보면 때론 괴리감을 느끼기도 한다. 이번 영화에선 전혀 그런 느낌을 받지 못했다. 배경, 캐릭터 그리고 그것을 담는 앵글에서 개연성도 충분했다. 현장에서 모니터를 할 때마다 놀랐던 기억이 난다.
수트는 Dunhill. 셔츠는 Kimseoryong.
〈전설의 주먹〉과 〈댄싱퀸〉에서 함께하긴 했지만 ‘두 정민’이 이렇게 오랫동안 호흡을 맞춘 건 처음이다.
박정민: 덕분에 영화 외적으로도 정민이 형과 깊이 있는 대화를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아, 깊이는 있지만 건조한(웃음) 남자들의 대화랄까.
‘깊이 있고 건조한’ 칭찬도 꽤 들었을 텐데.
박정민: 황정민 선배는 소속사 대표이기도 하고, 칭찬에 인색한 분이다. 그런데 이번엔 본인 촬영이 아닌데도 모니터 해주시고 아이디어도 주시고 도움을 많이 받았다. 촬영이 끝나고, 같이 연기해서 좋았다고 말씀해주셔서 감격했다.
셔츠, 재킷, 팬츠는 모두 Lemaire by 10 Corso Como. 신발은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이정재-박정민 조합 역시 〈사바하〉 이후 두 번째다.
박정민: 〈사바하〉 때 그랬듯 이번에도 같이 붙는 장면은 없다. 잠깐 만나긴 하지만 이번에도 바로 도망간다. 정재 선배님은 궁금한 걸 물어보면 자세히, 그리고 정답게 답을 주는 선배다. 캐스팅이 확정되고 어느 날 밤에 선배님이 이 작품을 같이 하게 되었다고 전화를 주셔서 감동받았던 기억이 난다. 이정재: 정민이 캐릭터가 꽤 난이도가 있다고 생각했고 관객에게 어떤 평가를 받을지 연기자로서 고민이 많았을 법한데 흔쾌히 하겠다고 했다는 게 기특했다. 어려운 결정이었을 텐데, 심지어 그 결정 이후에 캐릭터를 아주 훌륭하게 소화했다. 아마 홍보팀에서는 나중을 위해 ‘박정민’이라는 카드를 숨겨둔 모양인데, 기대할 필요가 있다.
유이(박정민)는 정체 자체가 스포일러인 인물이다. 연기하기 까다로운 캐릭터다.
박정민: 나도 기존의 스릴러 추격 영화에는 잘 등장하지 않는, 흔하지 않은 캐릭터여서 분량을 떠나 욕심이 났다. 처음엔 캐스팅 제안을 받고 조금 의아하기도 했다. 감독님께선 오히려 나 같은 배우가 맡아야 다양하고 풍부한 감정이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하신 것 같다. 연구도 많이 하고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황정민이 입은 니트는 Maison Margiela. 박정민이 입은 재킷은 Ann Demeulemeester by Adekuver.
8월 초 개봉을 확정 지으면서 코로나 이후 첫 번째 CJ의 텐트폴 영화가 됐다. 여러모로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
이정재: 부담이라고 할 순 없지만 보통은 영화 제작이 끝나면 관객들이 잘 봐주셨으면 하는 바람만 있었는데, 지금은 그 외에 다른 무언가가 얹혀진 느낌이랄까. 사회 모든 측면에서 마찬가지지만 영화계 종사자들이 하루빨리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었으면 좋겠다. 박정민: 관객이 찾지 않아서 영화가 개봉하지 않은 것도 있지만 영화가 개봉하지 않아서 관객이 찾지 않은 면도 있지 않을까. 이 영화가 역할을 잘 해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황정민: 영화를 만드는 사람의 입장에서도 영화관에서 영화를 상영하는 건 시기상조라고 생각한 때가 있었다. 그러다 보니 관객들에겐 한동안 영화를 고를 선택지 자체가 줄어들었고. 그래도 우리나라가 대처를 잘하고 있고 이제는 국민들도 조금씩 자기 페이스를 찾는 과정에 있는 것 같다. 선두에 선 느낌이다. 우리 영화를 필두로 앞으로 개봉하는 영화들도 다 잘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사실 나는 선봉장이 되는 거 싫어한다. 부담스러워서.(웃음) 하지만 우리 영화가 이 시기에 어떤 돌파구 역할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
아우터는 Dries Van Noten. 티셔츠는 Alexander Wang. 팬츠는 Wooyoungmi. 신발은 Jalan Sriwijaya by Unipai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