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Culture

최욱경, 천생 예술가

그리지 않고는 살 수 없어서 평생 동안 그렸던 화가. 최욱경을 알아야 하는 이유는 한국 모더니즘 및 포스트모더니즘의 역사를 새로 썼기 때문만이 아니다.

BYBAZAAR2020.07.01
어떤 작가를 좋아하세요?
식사 자리나 공식 미팅에서 종종 이런 질문을 받는다. 차라리 “봄날의 곰을 좋아하세요?”라는 질문이 쉽겠다. 나는 한 번도 선뜻 대답한 적이 없다. 일단 ‘어떤 특징의 작가’인지, ‘작가 중 누구’인지 번번이 헷갈린다. 물론 미술이 아니라 미술가를 좋아해서 이 일을 하는 게 아닐까 자기의심을 무시로 하는 내게 ‘좋아하는 작가 리스트’가 없을 수 없다. 하지만 이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엄마와 아빠 중 누구와 살지 결판내야 하는 아이의 심정으로, 말을 주섬주섬 삼킨다. 이 작가도 좋고, 저 작가도 좋아요. 상대 표정이 3초 만에 시큰둥해진다는 건 ‘어떤 작가’의 해석이 어긋났다는 신호이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이 작가는 이래서 좋고, 저 작가는 저래서 좋아요, 한다. 만약 내게 글 쓰는 사람으로서의 소명의식이라는 게 손톱만큼이라도 존재한다면, 거기엔 이 작가든, 저 작가든 훌륭하다는 맹목적인 양시론이 전제되어 있다.
 
고백하건대, 지금껏 최욱경이 ‘어떤 작가’에 포함된 적은 없었다. ‘한국 추상회화의 새 기법을 이끈 국내 최초의 여성작가’라는 설명에도, 여전히 그녀는 미지의 예술가다. 숱한 평론가들이 최욱경을 조지아 오키프에 빗댄 걸 보면, 학계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았던 모양이다. 원색을 썼다는 사실도 그렇거니와 최욱경 역시 오키프가 여생을 보낸 뉴멕시코에 머물며 영감받았지만, 둘은 엄연히 다르다. 오키프와 사진가 앨프리드 스티글리츠의 관계는 세기의 로맨스로 회자되지만, 최욱경의 사생활은 거의 알려진 바 없다. 오키프의 성공에는 연인의 후원이 한몫했으나, 최욱경에게는 그럴 만한 조력자가 (어쩌면 필요)없었다. 오키프는 99세까지 살며 연구거리를 남겼지만, 1940년에 태어나 1985년에 심장마비로 세상을 뜬 최욱경이 제 세계를 구축한 건 불과 25년 남짓한 시간이었다. 이미 45세를 지나버린 데다 여전히 모르는 것투성이임을 매일 각성하는 나로서는, ‘요절한 천재 화가’라는 전형적인 수식어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Wook-kyung Choi, 〈Untitled〉, c. 1960s, Ink on paper, 24x32cm, Courtesy the artist and Kukje Gallery.

Wook-kyung Choi, 〈Untitled〉, c. 1960s, Ink on paper, 24x32cm, Courtesy the artist and Kukje Gallery.

그럼에도 이 두 작가의 필연적인 공통점이 있다면, 남성들의 독무대였던 미국·한국 화단에서 ‘어떠한 사조에도 구애받지 않는 독창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 전위적인 흐름을 선도’한 운명이었다는 사실이다. 이를테면 미술학자 린다 노클린이 ‘왜 이제껏 위대한 여성 미술가들이 없었는가?(Why Have There Been No Great Women Artists?)’ 같은 글을 발표한 건 1971년의 일이지만, 그 전후는 물론 죽는 그날까지 최욱경은 주류 미술계의 헤게모니 밖에 있었다. 1963년에 도미해 1971년까지, 귀국한 지 2년 만에 미국으로 돌아가서도 그녀는 그저 ‘동양 여자화가’일 뿐이었다. 1979년 다시 찾은 한국의 미술계는 여전히 단색화가 대세인 가운데 민중미술이 태동하기 시작했으며, 전통 세력은 제 권위를 지키기 위해 고투하는 상황이었지만, 모두에게 최욱경은 이방인이었다. 이는 ‘해외 활동’을 ‘도미(渡美)’라 할 수밖에 없었던 시절의 한계이자, ‘여류작가’라는 명칭이 시사하는 태생적 문제다. 이 단어에는 “남자보다 열등한 여자가 매우 유의미한 성과를 냈으니 기꺼이 화가라 불러줄 만하다”는 옹색하고 치졸한 칭찬의 뉘앙스가 담겨 있다.
 
‘여류작가’와 함께 수학한 동료 작가 마이클 아크후스는 “그녀는 종종 자신에 대해 고향인 한국에서는 용납되지 못할 성난 여성상이라 말했다”고 회상했다(〈Art Review Asia〉). 지난 2016년 국제갤러리에서 열린 최욱경 개인전 초입, 나는 허공에 뜬 머리 같기도, 양떼 같기도 한 〈보시는 것이 이것입니다〉(1975) 앞에서 그리지 않고는 살 수 없었던 ‘성난 여성’의 실체를 목격했다. 최욱경의 작품이 ‘추상표현주의’인 이유는 빌럼 데 쿠닝, 로버트 머더웰, 프란츠 클라인 같은 서양 대가들의 작업에 영향받았기 때문이지만, 나는 추상주의의 가장 중요한 기조라는 ‘화가와 화면과의 끊임없는 대결’을 피하지 않았기 때문이라 봤다. 예의 대결에는 패자가 없었다. 사방이 막힌 세상 속 최욱경은 피아를 구분하지 않고 맹렬하게 열망한 자만의 내적 에너지를 부려놓았고, 그녀의 캔버스는 환희와 분노, 생을 향한 애정과 집착이 도사리는 다른 차원의 시공간이 되었다. 강렬한 선과 색의 향연, 자유로운 동시에 엄격하고, 부드러운 동시에 사나우며, 추상적인 동시에 구체적이고, 대담한 동시에 내밀하며, 더없이 불안한 동시에 공고한 세계.
 
여자이자 화가로서의 나의 경험은 내 창의력의 원천이 되었다. 내 작품에는 과거와 현재의 경험이 반영되어 있다. 각각의 작품은 내 삶의 성장이고, 내 감정을 시각 언어로 풀어놓은 것이다. 내 작품들이 나의 삶에 대한 것이기는 하나, 이를 통해 단지 이야기만 들려주려는 것은 아니다. 나는 내가 살아온 순간들을 ‘시각적으로’ 표현하고자 노력한다. 그리고 나의 작품을 보는 이들이 이러한 경험을 공유하고, 소통하며, 공감하기를 바란다. (최욱경의 글 ‘콜라주 된 시간들’ 中)
 
가장 전통적 장르인 회화가 동시에 혁명적인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너무 많은 것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현대미술계는 사적 역사나 고백 따위를 스스로 금기시하지만, 적어도 최욱경에게 그림을 그린다는 건 심리적, 정서적 행위였다. 그녀는 자기 작품에 대한 만족의 정도를 ‘함께 살 수 있다’ 혹은 ‘살 수 없다’로 구분했다. 〈나는 세 개의 눈을 가졌다〉(1966) 같은 자화상을 자주 그렸던 그녀에게는 실상 모든 작업이 자화상이자 자아였던 셈이다. 보는 이들의 감정에 강렬히 가 닿음으로써 모두를 적극적으로 자기 세계로 끌어들이는 힘도 여기서 기인한다. 화가로서의 열패감, 인간으로서의 순수함, 시대인으로서의 분노 등은 세찬 바람이 되어 내 머릿속과 폐부를 휘젓고 나를 춤추게 한다. 부딪치고, 상처하고, 고뇌한 인간만이 가능한 절규는 공감각적 감상으로 환원된다. 실제 최욱경은 ‘무무당(無無堂)’이라 이름 붙인 여의도의 시범아파트 화실 벽면에 이렇게 적어두었다고 한다. “일어나라! 좀 더 너를 불태워라!”
 
고독, 열정, 자유, 에너지, 폭풍, 속도, 날것, 격정, 탐닉, 충동, 영혼, 고통, 내면…. 최욱경 그림이 연상시키는 일련의 단어들은 시적인 작품 제목을 통해 재현된다. 대부분의 ‘무제’ 가운데 종종 상념으로 가득한 제목들은 작품만치 정직하다. ‘불합격품’ ‘생의 환희’ ‘바보놀이’ ‘친구여 잘 있거라’ ‘1974년도의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 ‘보시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죽음의 실제’ ‘흐르지 않는 강물’ ‘성난 여성’ ‘시카고에서’ ‘환원’ ‘악몽’ ‘몇 시입니까’ ‘떠 도는 산’ ‘나는 오로지 딸기 아이스크림을 좋아합니다’ ‘하늘의 연’ ‘교육을 받은 무지한 소녀’ ‘죽음과 부활의 협곡’ ‘루스터 맨의 마법에 걸려’…. 이 중 〈이 피비린내 나는 싸움에서 승자는 누구인가?〉라는 제목의 1968년작, 부상당한 채 무릎을 꿇은 군인을 묘사하는 작품은 최욱경이 인종차별이나 사회문제 같은 당대 현실에도 예민하게 반응했다는 증거다. ‘미국 추상표현주의자들의 작업처럼 비실재적이고 무한한 공간으로서의 추상이 아닌 대상의 존재를 느낄 수 있는 현실에 기반한 추상’을 구축한 화가는 언어를 두 다리 삼아 땅에 발을 붙였다.
 
최욱경의 삶은 ‘시화일률(詩畵一律)’의 정신으로 구축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국 체류 시절 동료 작가와 출간한 시집 〈Small Stones〉에서 그녀는 “언젠가 나는 바다의 조약돌이 되고 싶다”고 썼다. 작고 후에도 재발간된 시집 〈낯설은 얼굴들처럼〉에서 발견한 시 ‘나의 이름은’은 인간 그리고 예술가로서 정체성을 찾고자 한 절박함, 온 생을 지배한 그녀만의 질문을 우리 모두에게 적용시킨다. “(…) 한 때에 / 나의 이름은/ 낯설은 얼굴들 중에서 / 말을 잊어버린 〈벙어리 아이〉였습니다. / 타향에서 이별이 가져다주는 / 기약 없을 해후의 슬픔을 맛본 채 / 성난 짐승들의 동물원에서 / 무지개 꿈 쫓다가 / 〈길 잃은 아이〉였습니다 / 결국은 / 생활이란 굴레에서 / 아주 조그마한 채 / 아픔마저 잊어버린 〈이름 없는 아이〉랍니다 / 나의 이름은 /  〈이름 없는 아이〉랍니다.”
 
1976년 〈공간〉지에 실린 최욱경의 대담 기사 제목은 ‘방황과 고뇌, 그리고 몰두하는 순간의 최대의 환희’였다. 이는 예술가뿐 아니라 일과 삶에 일말의 소명의식을 가진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바다. 그러나 특히 예술가라는 자들은 우리가 모르거나, 모르는 척하거나, 알고 싶지 않거나, 몰라도 되는 세상을 향한 통찰력을 발휘하기 위해 두 발 끝으로 감정의 가장자리에 서길 자처한 이들이다. 이 고단한 일을 심지어 온몸으로, 온 마음으로 실천하는 이들을 두고 우리는 ‘천생 예술가’라 부른다. 최욱경은 자신이 대면한 인간적, 작가적 시급성을 새로운 조형언어를 탄생시키는 데 썼고, 그 우직한 소명의식 덕에 끝끝내 외로웠다. 이제야 나는 허공을 향한 그녀의 선언 같은 독백에 귀 기울이고, 고통의 정체를 들여다보고자 한 용기를 지지하며, 세상과의 상처받은 로맨스를 감수한 삶을 응원한다. 이 예술가를 재발견 혹은 재평가하는 게 다름아닌 우리여야 하는 건 그녀가 그토록 꿈꾸던 앞서간 시대를 오늘로 살고 있는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당신을 어제 밤 꿈 속에서 만났습니다. 낯 익은 황금미소와 익숙한 친절임에도 격리된 채 닿을 수 없는 먼 사람이외다. 나 차라리 꿈 속에서나마 만나지 않았다면…… 이전처럼 꿈 속에서 당신은 다시 한번 날 슬프게 했습니다. 1992년 11월 8일 최욱경’. 그녀는 그림인지 서예인지 모를, 붓으로 써 내려간 작업을 남겼다. 1992년까지 살지도 못했으니 시적 상상력으로 상정한 미래 어느 날일 것이다. 앞으로도 만나지 못할 최욱경을, 나는 어느 날에라도 꼭 만나보고 싶다. ‘산이 너무 아름다워서, 나는 슬프다’라는 제목을 지을 수밖에 없었고, 죽기 직전까지 본연을 찾았으며, 그래서 그림을 그릴 수밖에 없었던 작은 거인은 그렇게 나의 ‘어떤 작가’에 합류했다.
 
※ 최욱경의 개인전은 오는 6월 18일부터 7월 31일까지 국제갤러리 K1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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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 글/ 윤혜정(국제갤러리 디렉터)
  • 에디터/ 손안나
  • 사진/ 국제갤러리 제공
  • 웹디자이너/ 김유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