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Culture

올해 100세를 맞이한 예술가 루치타 우르타도

올해로 100세를 맞이한 예술가 루치타 우르타도. 수십 년의 세월을 아티스트로서 살아온 그는 아직도 하지 못한 일이 너무 많다.

BYBAZAAR2020.05.17

Luchita Hurtado

루치타 우르타도 
루치타 우르타도가 로스앤젤레스 테메스칼 캐년(Temescal Canyon)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다.

루치타 우르타도가 로스앤젤레스 테메스칼 캐년(Temescal Canyon)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다.

 
사람들이 그러더군요. 저 같은 궁수자리에게는 방랑벽이 있다고요.
 
우르타도는 어린 시절부터 이사에 익숙했다. 베네수엘라 재봉사의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1928년 뉴욕으로 이민을 왔다. 어머니는 그가 학교를 다니며 재봉하는 법을 배우길 바랐지만, 그는 대신 몰래 미술 수업을 수강했다. 뉴욕 아트 스튜던트 리그(Art Students League of New York)의 수업을 들은 후 미술에 대한 우르타도의 관심은 더욱 깊어졌다. 그러면서 그는 칠레의 저널리스트 다니엘 델 솔라르(Daniel del Solar)와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결혼을 할 당시 우르타도는 18살이었고, 결혼생활을 하며 두 명의 아들을 낳았다. 하지만 1944년 남편은 가족을 버리고 떠났다. “잘못된 남자와 결혼했어요. 그는 저를 버리고 떠났어요. 전부인에게도 똑같은 행동을 했었죠.”
 
루치타 우르타도, 〈Untitled(Birthing)〉, 2019.

루치타 우르타도, 〈Untitled(Birthing)〉, 2019.

우르타도는 패션 일러스트를 그리고 백화점 설치물을 작업하며 생계를 꾸려나갔다. 동시에 조각가 이사무 노구치(Isamu Noguchi)를 포함한 예술가들과도 친해질 수 있었다. 노구치는 그에게 우르타도의 두 번째 남편 볼프강 팔렌(Wolfgang Paalen)을 소개해줬다. “그는 매우 흥미로운 사람이었어요. 지적인 해적 같았죠.” 우르타도가 팔렌에 대해 말한다. “1947년에 결혼을 한 후 치아파스(Chiapas)의 정글로 여행을 떠났어요. 아주 위대한 모험이었죠.” 멕시코에서 지내며 그들은 고대 올메크(Olmecs) 문화를 탐구하고, 레오노라 캐링턴(Leonora Carrington)을 비롯한 선구적인 초현실주의 아티스트를 만나기도 했다. 토템의 춤추는 형상을 비롯한 우르타도의 여러 작품에서 콜롬비아 도상학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점을 비추어보았을 때, 캐링턴이 우르타도에게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측된다.
 
1947년 맨 레이가 촬영한 우르타도의 모습.

1947년 맨 레이가 촬영한 우르타도의 모습.

팔렌과의 생활에 행복했던 것도 잠시, 첫 번째 결혼에서 낳은 아들의 죽음은 그를 힘들게 만들었다. “어린 아들의 죽음은 끔찍했어요.” 그의 얼굴에 당시에 겪었던 슬픔의 무게가 드리워졌다. “소아마비였어요. 너무 슬펐어요.” 1949년, 슬픔에 빠져 더 이상 멕시코에서 지내기가 어려워지자, 우르타도는 남편과 함께 캘리포니아의 밀 밸리(Mill Valley)로 떠났다. 수년 후 이혼을 결심하기 전까지 그들은 그곳에 정착했다. 팔렌은 멕시코로 돌아갔고, 우르타도는 화가 리 멀리컨(Lee Mullican)과 막 교제를 시작하고 있었다. 6년 후 결혼한 그들은 두 아들 매트(Matt)와 존(John)을 낳았고, 1998년 멀리컨이 사망하기 전까지 함께했다.
그들의 결혼은 해피 엔딩으로 끝났지만, 이마저 우르타도가 아티스트로 인정받기 한참 전의 일이었다. 젊은 시절부터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그는 늘 그림을 그렸다. 그 이후에도 멀리컨의 작업을 돕기 위해 계속해서 그림을 그렸지만, 자신의 작품이 전시되는 일은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들 매트는 아티스트예요. 남편도 아티스트였죠. 제 작품은 뛰어나지는 않아요.” 그가 겸손하게 말한다. “누구도 제 작품을 제대로 봐준 적이 없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림을 계속 그린 이유는 제가 좋아하기 때문이에요. 하나의 습관이죠.” 2015년 이후, 멀리컨의 부동산 디렉터 라이언 굿(Ryan Good) 덕분에 우르타도의 작품은 큰 빛을 보기 시작했다. “라이언이 멀리컨의 작품을 보다가 쓰여 있는 LH라는 이니셜에 관심을 가졌죠.” 우르타도가 회상한다. “그것이 제 이니셜이라고 말했어요.”
 
루치타 우르타도, 〈Untitled〉, 1950.

루치타 우르타도, 〈Untitled〉, 1950.

그렇게 1천2백 점이 넘는 우르타도의 작품은 큰 성공으로 이어졌다. 그 이후 그의 단독 전시회가 로스앤젤레스와 뉴욕, 런던에서 개최되었다.(작년 서펜타인 갤러리에서 진행된 그의 회고전은 인기가 좋아 전시 기간이 연장되었다.) 데생부터 그림, 보석, 의류까지, 그의 다양한 오브제는 특정한 장르에 속하지 않는다. 그림은 확실히 남아메리카의 주술적인 특징을 보이기도 한다. 우르타도는 선구적인 페미니스트인 동시에 환경운동가이기도 하다. 사실 최근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대상은 지구의 운명이다. 그가 최근에 작업한 작품은 가장 시급하면서도 가장 자극적인 소재를 주제로 한다. “저는 ‘공기’나 ‘물’을 사용했어요. 제가 소리 지르며 말하죠. ‘조심해, 이 모든 게 사라질 수 있을 테니까.’ 네, 그건 사실이에요. 우리 모두 위험에 처해 있어요. 우리는 다른 생명을 죽이면서 필요 이상의 것들을 소유하고 있어요. 누구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있죠.”
우르타도는 자기 자신에 대해 놀라울 정도로 낙관적이다. 그는 다가오는 자신의 100번째 생일을 생각하면서 ‘모험’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자신의 앞에 닥친 어떠한 것도 두렵지 않다. “죽음은 단순하게 말해 새로운 국경이에요. 전 죽음이 끝이라고 믿지 않죠. 단지 그 다음에 뭐가 있을지 기다리면 돼요. 그게 무엇일지 정말 궁금하네요.” 그전까지 그는 매일 아침 스튜디오로 출근을 하며 자신이 사랑하는 작품을 만들 것이다. “침대에 누울 때면 오늘 하루가 끝났다는 생각이 들지만 아직도 하지 못한 게 많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죠.” 그가 매력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그때까지 일은 저에게 일이 아니에요. 그건 삶이죠. 제가 살아 있는 이유 중 하나예요.”
 
프란시스 헤지스(Frances Hedges)는 〈하퍼스 바자〉의 영국판 에디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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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 글/ Frances Hedges
  • 사진/ Janell Shirtcliff
  • 웹디자이너/ 김유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