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양혜규의 윤년처럼

도달할 수 없는 미지의 그곳을 향한 상상과 실천의 도약이 이끈 양혜규의 세계. 런던에서 열리는 대규모 전시 «양혜규: 윤년»은 30여 년간의 작품을 통한 경험을 지금, 여기로 가져다 놓는다.

프로필 by 손안나 2024.11.28
«양혜규: 윤년» 전시 전경, 영국 런던 헤이워드 갤러리, 2024. 사진: Mark Blower, Courtesy of the artist and the Hayward Gallery 이미지 제공: 국제갤러리
Installation view of Haegue Yang: Leap Year at the Hayward Gallery, London, 2024, Photo: Mark Blower, Courtesy the artist and the Hayward Gallery, Image provided by Kukje Gallery

런던의 유서 깊은 미술관인 헤이워드 갤러리에서 열리는 양혜규의 서베이 전시 «윤년(Leap Year)» 자료를 준비하면서 우리는 ‘영국 내 첫 번째 대규모 전시’라는 명백한 사실을 전면에 강조했다. 하지만 나의 기대는 ‘개최되는’ 전시보다 ‘꾸려지는’ 전시를 향해 있었다. ‘전시를 꾸리다’, 소박한 데다 순진하기까지 한 이 문장에는 예컨대 ‘만들다’ ‘선보이다’ 같은 단어에는 소거된 수행의 감수성이 함축되어 있다. ‘가정/삶을 꾸리다’가 그렇듯, 한 인간으로서 존엄과 생명력을 지키며 지속하기 위한 모든 것이 있다. 즉 규모, 계획, 조직력, 의지, 책임, 결단, 열망, 주체성, 실천력, 좌절, 상처, 사연, 신뢰, 현재성…. 자신의 선택과 시공간, 그리고 사람(작품)을 부단히 돌본다는 점에서는 일편 숭고함마저 느껴진다. «윤년»이 작가의 숱한 ‘기념비적 전시’들과 달랐던 점은 그 의미가 비로소 체득되었다는 것이다. 여기, ‘(예술에) 헌신적이고도 강인한 삶’을 산 양혜규가 있다. 어느새 나는 그의 견고한 추상 세계가 향하는 바, 지각과 인식의 통찰뿐만 아니라 그 저변의 ‘절대적인 것에 대한 열망이 생성하는 멜랑콜리’와 궤적을 읽어내려 애쓰고 있었다.

«양혜규: 윤년» 전시 전경, 영국 런던 헤이워드 갤러리, 2024. 사진: Mark Blower, Courtesy of the artist and the Hayward Gallery 이미지 제공: 국제갤러리
Installation view of Haegue Yang: Leap Year at the Hayward Gallery, London, 2024, Photo: Mark Blower, Courtesy the artist and the Hayward Gallery, Image provided by Kukje Gallery

“강물에 떠내려가는 나무 조각처럼, 이 신비로운 흐름을 따라간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이번 전시 «윤년»의 도록에 수록된 헤이워드 갤러리 수석 큐레이터 융마(Yung Ma)의 글은 양혜규의 고백으로 시작된다. 내년 1월 5일까지 예정된 전시는 지난 30여 년 동안 탄생한 양혜규 작업의 다면적이며 다학제적인 면모들, 모험적인 혼종의 언어와 정신의 흐름을 조망한다. 정체성 탐구에 골몰하던 시절부터 다른 문화와 시공간의 접합 및 교류를 탐구하는 지금에 이르기까지, 작가적 시간의 현신인 작업 1백20여 점이 ‘서로 연결된 군도’를 이룬다. 보통 서베이전이 작가의 존재를 서술하거나 유추하게끔 한다면, «윤년»은 후자에 가깝다. “역사, 문화, 세계에 대한 방대한 사유를 독창적인 조형예술 언어로 구축했다” 같은, 작가를 설명해온 문장들이 낯선 전시장에 토착화되어 공명한다. 양혜규라는 땅에서 무럭무럭 자라나 서로를 이어내고 지탱해온 사유와 감각, 개념과 감성이 작품의 몸을 빌려 선 풍경은 그 자체로 누군가가 공들여 그려낸 작가의 초상이다.
이 정도 규모의 전시에 어울리지 않는 지극한 감정의 출처 중 하나는 ‘윤년’이라는 전시 제목이다. 윤년은 역법을 자연의 섭리에 맞추기 위해 끼워 넣은 여분의 하루
(윤일) 또는 한 달(윤달)이 든 해다. 우주적 시간과 인간계의 시간 사이에 생겨난 오차를 줄이기 위한 인류의 겸허한 노력인 한편 일상성 밖의 없던 시간까지 만들어낼 만큼 과감한 시도다. 윤년이 특별한 건 4년에 한 번 오기 때문이 아니다. 세상의 역법이 원활히 돌아가도록 하는 이것이 결국 우주는 이 계산법 없이도 존재한다는 지당한 사실을 일깨우는 까닭이다. 양혜규 작품의 제목은 파인 다이닝 메뉴처럼 꽤나 서술적인 반면 전시 제목은 작가가 처한 시기를 정의하는 시적인 이정표가 되는데,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다. “서베이 전시는 작가에게 자기 객관화의 순간이에요. 잠에서 깨는 것 같기도 하고, 함부로 자주 해서는 안되는 금기 같은 것이죠. 동시에 반드시 필요한 일입니다. 더구나 작가에게 객관화란 직시하는 게 아니라 눈을 흐리게 뜨는 거예요. 초점을 맞추거나 혹은 의도적으로 흐리는 행위를 자유자재로 해야 다른 초점들이 생겨나고,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니까요.”

<소리 나는 의상 동차動車 – 우람 머리통>, 2018
《양혜규: 윤년》 전시전경 영국 런던 헤이워드 갤러리, 2024 사진: Mark Blower Courtesy of the artist and the Hayward Gallery 이미지 제공: 국제갤러리

전시작을 연대기 순이 아니라 주제별로 나눈 큐레이터의 의도는 ‘양혜규의 활약’이라는 객관적 사실 아래 표표히 깔린, 주관적 진실이라 해도 좋을 작업의 정서를 부각시킨다. 사회적인, 영적인, 조각적인, 개인적이고 공동체적인, 정치적인, 그리고 움직임을 고찰하는 작업들이 전 관을 채운다. 유독 느슨한 공간 배치법은 작가가 충돌을 피하지 않고 모순의 동시성을 어떻게 표현해왔는지, 이를 위해 어떻게 모든 종류의 신비로운 요소들을 찢고 붙이고 겹겹이 쌓아 올리는지를 은유한다. 양혜규는 미시사와 거대 역사, 이질적 전통 등을 독창적으로 엮어내는데, 이때 반드시 축약과 상징, 그리고 비약의 과정이 수반된다. ‘윤년(leap year)’에 ‘도약하다(leap)’라는 행위가 내포되어 있다는 건,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미니멀리스트 솔 르윗이 1960년대 개념미술에 대해 쓴 글의 첫 문장을 작가와 큐레이터가 주요하게 소환한 이유이기도 하다. “개념미술가들은 이성주의자라기보다는 신비주의자다. 그들은 논리(혹은 이성)가 도달하지 못하는 결론으로 도약한다.”
양혜규의 작업은 삶의 매 순간 출몰하는 의심과 신념, 의문과 답의 낙차를 동력으로 삼는다. 그런 그에게 추상은 구상의 반대말이 아니다. 경험하고 배우고 축적하는 동시에 잊어버리고(unlearning) 심지어 떠나는 과정을 무수히 반복하면서, 영혼과 살점을 샅샅이 소화하고 뼈대 즉 작품만 남기는 것이다. 수련이라 해도 좋을 지난한 과정을 거쳐 추상이라 부르는 미지의 곳으로 다음 도약을 준비하는 건 그의 오랜 루틴이다. 불가능해 보이는 사고의 전환을 시도하는 작업들은 실제 움직이든 그렇지 않든 유무형의 움직임을 품고 있다. 이를테면 초기 자기정체성에 대한 탐구는 ‘영원한 이방인’인 나와 그들의 동질감을 찾고자 하는 노력으로 이어졌고, 고대까지 거슬러 가야만 접점을 찾을 수 있음을 깨달았으며, 그 과정에서 각 문화권에서 지금껏 살아남은 것들의 생명력을 민속전통, 샤머니즘, 이교도적 문화 등을 통해 예술적으로 발굴하는 작업으로 연결한다. 그래서 언젠가부터 예술가 양혜규에게서는 인류학자의 면모가 엿보인다.

<솔 르윗 동차動車 – 입방체 하나 빠진 입방체 위에 6 단위 입방체>, 2018 배경: <이모저모 토템>, 2013
《양혜규: 윤년》 전시전경 영국 런던 헤이워드 갤러리, 2024 사진: Mark Blower Courtesy of the artist and the Hayward Gallery 이미지 제공: 국제갤러리

나는 입구에 드리워진 방울 작업 <농담濃淡진 소리 나는 물방울―수성 장막>
(2024)을 열어젖히며 전시장에 들어서는 순간을 좋아한다. 제의와도 같은 그 찰나, 청각과 촉각이 나를 환대하는 동시에 까무룩한 작품들을 깨우며 공간을 유기적으로 활성화시킨다. 빨래건조대를 활용한 광원조각 <비非―접힐 수 없는 것들, 누드>
(2010/2020)의 가사성 내지는 일상성과 ‘소리 나는 아치형 동아줄’의 절박함이 자연스레 조우한다. 뒤편에서는 입방체를 쌓아 바퀴를 장착한 <솔 르윗 동차動車―입방체 하나 빠진 입방체 위에 6 단위 입방체>(2018)와 천천히 회전하는, 브라질 예술가 실두 메이렐르스(Cildo Meireles)에 영감받은 블라인드 작품 <Stacked Corner―Ventilating Orange and Blue Square>(2022)가 모더니즘에 관한 무언의 대화를 나눈다. 필리핀 전통 수공예로 직조된 <엮는 중간 유형―이면의 외계 이인조>
(2020)가 그 사이에서 중심과 주변부, 외계와 내계를 연결하며 이주와 이동의 필연적인 유동성을 시사한다. 서구 역사와 등을 맞댄 지역적인 것, 소외된 것, 섬약한 것들을 불러들이되 이를 타자화하지 않고 대등하게 끌어안는 작가의 예술적 성향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풍경이다.
‘몰인정한 무더위’가 실존을 위협한 올여름, 양혜규가 말했다. “융마의 큐레이팅을 꼭 받아보고 싶었어요.” 몇 달 후 미술관의 대담 자리에서 그는 협업으로 만든 이 전시가 ‘윤년’처럼 드물지만 귀한 기회라 부연했다. “비유하자면 걷잡을 수 없이 무성해진 숲에 길을 내기 위해, 저에게 익숙한 작업과 방법론을 잊어야 했어요. 큐레이터의 시선과 비전을 빌리면서, 어느 정도는 의지하고, 또 스스로 놀랄 수 있는 상태에 뒀죠.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더라도 삼키려고 했고요. 나 자신에게 부여한 과제나 챌린지였어요. 저 아닌 다른 누군가가 저의 불안함을 행하고, 관찰하고, 제어해줄 수 있도록 자리를 허용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지난 2018년 쾰른 루트비히 미술관의 대규모 전시 «도착 예정 시간(ETA) 1994-2018»을 준비할 무렵, 가뜩이나 괄괄한 작가가 선반 높이까지 정확히 구현해 보이겠다는 열정에 더 동분서주했던 기억이 난다. 이번에는 달랐다. 덕분에 기존 미술사에서 호명되지 못하거나 심지어 작가가 기억조차 못한 작품들이 빛을 보게 되었다.

《양혜규: 윤년》 전시전경 영국 런던 헤이워드 갤러리, 2024 사진: Mark Blower Courtesy of the artist and the Hayward Gallery 이미지 제공: 국제갤러리

심지어 큐레이터는 덩그러니 캡션으로만 표현된 <제한적으로 확대된 초대―다다익선>(2001)이 ‘가장 양혜규답다’라는 의외의 의견을 내놓았다. 2001년 에든버러의 작가 그룹에 초대받은 양혜규는 전시 예산을 몽땅 친구들을 초대하는 데 쓰는 이상한 작업을 했고, 이후 거의 잊고 살았다. 그 후 아이 웨이웨이와 루앙그루파가 카셀 도큐멘타에서 비슷한 시도를 한 바 있다. 어쨌든 당시 미술기관에 대한 도전이었던 이 비물질적 작업은 23년 후 런던에서 기관의 역할을 확장하는 식으로 진화했다. 다양한 커뮤니티, 즉 미술관 혹은 현대미술에의 접근이 용이하지 않거나 기회조차 없는 이들을 초대하는 것이다. 그들이 발음도 어려운 낯선 이름의 한국 작가 작업과 만나는 흥미진진한 풍경이라니. 더욱이 제3자의 시선으로 어떤 작품을 과거에서 꺼낸다는 건 곧 새로운 내러티브와 해석, 그리고 사건이 생겨날 여지 혹은 가능성을 만드는 일이다. “현대미술 씬에 있는 우리의 미션 중 하나는 작품을 통한 경험을 ‘여기 그리고 지금(here and now)’으로 가져다두는 거라 생각합니다. 이번에 나는 길지도, 그렇다고 짧지도 않은 지난 궤적을 압축하는 데에 굉장히 열중했어요. 그래야만 우리 모두가, 현재, 지금, 여기, 당장으로 느낄 수 있을 테니까요.”

《양혜규: 윤년》 전시전경 영국 런던 헤이워드 갤러리, 2024 사진: Mark Blower Courtesy of the artist and the Hayward Gallery 이미지 제공: 국제갤러리

예기치 못한 전작들은 양혜규가 떠나온 세계마저 현재로 돌려놓는데, 이를 목격하는 즐거움이 있다. 팔리지 않는 작품을 그러모아 만든 <창고 피스>(2004)는 가난한 예술가의 자기 풍자와 제도 비판의 원형으로 회자된다. 작가만큼 유명하지만, 각주 같은 사진 <Practicing Profession, minus 2002>(2002) 작업과 함께 놓인 건 처음이다. 휘청거리며 자전거를 타거나 목발을 짚은 채 절뚝거리며 미술관 주변을 배회하는 젊은 양혜규. 아르테 포베라와 플럭서스 사이, 웃기고도 자조적인 퍼포먼스는 예술가라는 사회적 정체성과 미술 규범을 주관적으로 비판한다. 아무도 주시하지 않는 상황에서 스스로에게 도전했던 시절의 절박한 열망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이는 <창고 피스>의 전신이자 심정적 뿌리로 읽힌다. 이제 그는 개인의 딜레마를 공적 문제로 전환하기 위해 감정을 드러내지 않아도 된다. 그럼에도 작가로서 생생히 살아 있고자 파키스탄 라호르 같은 비미술적 도시의 비엔날레에 부지런히 참여하는 양혜규가 ‘전업작가’를 ‘연기’하는 사진 속 예술가와 겹쳐졌다.
특히 이창동 감독의 영화를 좋아한다는 융마의 예술적 서정성은 2층 공간에서 만개한다. 블라인드는 불투명과 투명, 노출과 단절, 고립과 소통의 양가성을 통해 진화해온 상징적 재료지만, 융마는 이를 가벽으로 활용해 위계를 없앴다. 블라인드 사이와 너머로 다채로운 빛과 그림자, 소리와 향이 자유롭게 넘나드는데, 이는 불투명하더라도 있는 그대로 존재하길 열망하는 양혜규의 공동체적 의식을 반영한다. 공간의 테마 ‘개인적인 & 공동체적인’ 역시 결국 두 가지가 다를 수 없음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꽤 절묘한 구성이다. 보편적인 감각의 요소를 도입한 첫 블라인드 작품 <일련의 다치기 쉬운 배열―위트레흐트 편篇>(2006), 경계인으로서의 목소리를 담은 비디오 에세이 <비디오 삼부작>(2004-2006), 그리고 폐가에서 선보인 한국 첫 개인전 «사동 30번지»(2006), 즉 ‘부재의 정체성’과 ‘부재의 공동체’를 다룬 작업들이 모두 비슷한 시기에 선보인 건 우연이 아니다. 그리고 2년 후 내밀한 일상의 증인 격인 가전제품을 모티프로, 집이라는 사적 장소가 정치적 공간으로 변모하는 잠재력을 탐구한 <생 브누아 가街 5번지>(2008)가 탄생했다. 양혜규에게 ‘개인적인 것’은 창의적일 뿐 아니라 정치적이고, 혁명적이며, 어쩌면 ‘모든 것’이다.

<윤에 따른 엇갈린 랑데부>, 2024
《양혜규: 윤년》 전시전경 영국 런던 헤이워드 갤러리, 2024 사진: Mark Blower Courtesy of the artist and the Hayward Gallery 이미지 제공: 국제갤러리

이번 전시를 위해 만든 <윤에 따른 엇갈린 랑데부>(2024)는 태생적으로 이미 대표작이 될 운명이었다. 현대음악가이자 굴곡진 한국 현대사의 상징인 故 윤이상은 마르그리트 뒤라스, 이브 클랭 등과 함께 작가의 오랜 연구 대상이었지만, 그를 블라인드 작업으로 표현한 적은 없었다. 엄두조차 내지 못한 작업을 드디어 감행한 양혜규는 <견우직녀>를 모티프로 한 윤이상의 <더블 콘체르토(Double Concerto)>
(1977)를 작업의 주요한 일부로 가져왔다. 그간 블라인드 작업은 총체적 환경으로 탈바꿈하거나 완벽한 조각으로 빚어졌지만, 이번엔 오작교 혹은 오선지 역할을 한다. 주인공은 빛과 그림자, 그리고 음악이다. 빛은 견우와 직녀처럼 양쪽에서 서서히 떠돌다 음악의 출현과 함께 잠깐의 재회와 긴 이별을 반복한다. 사실상 공연 같은 이 작품을 즐기기 위해서 침묵과 기다림이 필요한 것처럼, 남북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윤이상의 희망도, 연인의 헤어짐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이를 계기로 도약할수록 풍성해지는 추상 개념의 진화가 발아했다. 작가는 추상과 서사를 샴 쌍둥이처럼 분리할 수 없다는 의미로 ‘추상서사(abstraction narration)’라 이름 붙였다.
“성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삶을 사는 것이고, 많은 예술작품들이 이런 시도에서 탄생합니다. 그것이 실패로 끝날 걸 알더라도 말이지요.” 다다를 수 없는(beyond reach) ‘절대적인 것’ 앞에서도 취약하고 불완전한 서로에게 마음을 열고, ‘감각적인 나눔’를 실천하며, 상상의 도약을 시도하고자 하는 열망. 그래서 내게 <Windy Terrace Beyond Reach>(2024)는 전시의 마침표가 되어주었다. 브루탈리즘의 육중한 미술관 테라스에 연못이 지어졌고, 손이 닿지 않는 그곳에서 1백 개의 금속 바람개비가 ‘에어로 다이내믹’을 만들어낸다. 바람개비의 존재는 바람을 증거한다. 물론 양혜규가 의도하는 움직임은 유려하지 않다. 느리거나, 원시적이고, 수동적이며 심지어 부재하기까지 하지만, 실패한 움직임을 통해 세상이 종용하는 움직임에서 해방될 수 있다. 템스강의 거센 바람을, 어떤 건 온몸으로 받아내며 돌고 있고 또 어떤 건 멈춰 있지만, 설사 돌아가지 않는다 해도 바람이 없는 건 아니다. 과대평가나 과소평가, 무관심이나 과도한 관심, 오해나 곡해에도 바람개비는 돌 것이다. “사랑이 실제 일어나기 전의 사랑을 사랑하는” 양혜규의 고독한 용기는 돌거나 돌지 않아도 괜찮은 바람개비 혹은 한 번씩 도래하는 윤년만큼이나 엄연하다.

<Windy Terrace Beyond Reach>, 2024
《양혜규: 윤년》 전시전경 영국 런던 헤이워드 갤러리, 2024 사진: Mark Blower Courtesy of the artist and the Hayward Gallery 이미지 제공: 국제갤러리

미술관을 나오는 길, 런던의 밤바람이 유난히 차가웠다. 예전에 읽은 텍스트 작업 <스피커스 코너>(2004)의 한 대목이 다시 선명히 떠올랐다. 양혜규는 변함이 없고, 지금도 이 문장은 내내 내 머릿속을 맴돌고 있다. “소통의 기본은 이해가 아니라 무지, 무시, 무관심, 낯섦과 간극이라고 생각합니다. 비관적으로만 들리는 이 모든 소통의 출발점이, 새로운 미술적 ‘수사학’을 통해 개인들에게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일말의 느낌 정도를 제공할 수 있다면 매우 의미 있는 일일 겁니다.”

Credit

  • 글/ 윤혜정(국제갤러리 이사, <나의 사적인 예술가들> <인생, 예술> 저자)
  • 사진/ 헤이워드 갤러리, 국제갤러리 제공
  • 디자인/ 진문주
  • 디지털 디자인/ GRAFIKS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