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이너 남노아의 <평범예찬론> | 하퍼스 바자 코리아 (Harper's BAZAAR Korea)

‘평범하다’는 말은 ‘지루하다’는 말과 일맥상통하지 않는다. | 남노아

외출 준비를 하다 옷장 속에 줄줄이 걸려 있는 그레이 톤의 후드 티셔츠들을 발견했다.“참 평범하네.”(분명 그 평범함이란 단어 속에 부정적인 뉘앙스를 담고) 혼자 중얼거려본다.아래를 내려다보니 후드와 같은 컬러의 트레이닝 팬츠도(중간중간 블랙 컬러와 섞여) 차곡차곡 쌓여 있고, 그 옆을 나뒹굴고 있는 옷 역시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다.한때 내가 즐겨 입던 갖가지 프린트와 오글거리는 소재의 화려한 옷들은 한쪽으로 밀려나고 어둡고 칙칙하기까지 한 옷들이 옷장 속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언제 이 옷들을 열광적으로 구매했는지, 왜 이렇게 쌓였는지, 그리고 이 비슷비슷한 옷들을 다 입기는 하는지 약간의 죄책감을 갖고 의문을 품어보았다.어쩌면 성큼 봄이 올 것을 직감했거나 혹은 휴대폰에 ‘New Arrival’이라는 광고성 메시지가 날아오기 시작하니 지극히 평범한 이 옷들이 새삼 지루하게 느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봄옷 쇼핑을 나가게 되거나 조만간 내가 만든 새로운 옷을 마주하게 되는 순간이 오더라도 난 이 지극히 평범한 옷에 손이 갈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평범함이 주는 편안함은 꽤나 달콤하니까.언제부터인가 특별함을 내세운 불편하고 억지스러운 옷들이 싫어질 무렵, 평범한 옷이 참 멋진 옷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우선 거추장스럽게 느껴지는 디테일이 없고, 요란한 컬러를 지니지도 않아 촐싹거리지 않으니 점잖기까지 하다.입었을 때 내가 움직이는 행동 하나하나에 불편을 주지 않고 그런 불편을 주지 않으니 예민해지지도 않을뿐더러 세탁 방법이 까다롭지 않으니 커피 한 방울 쏟았다고 호들갑을 떨 필요도 없다.나는 기본 아이템으로 불리는 흰색 티셔츠나 별다른 타이포그래피가 없는 후드 티셔츠, 스웨트셔츠 외에도 편안하게 입을 수 있는 모든 옷들을 평범하다고 생각하고 자주 입는다.이런 옷들은 무엇을 입을지에 대한 고민까지 덜어주니 삶의 질을 높여주는 도구임이 분명하다.‘평범하다’는 말은 ‘지루하다’는 말과 일맥상통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평범한 옷이 지루한 옷으로 치부되지 않았으면 한다. 간소하지만 풍요로움을 주는 옷이라 약간의 과장을 보태어 칭송하고 싶다. 그렇다면 나는 내 일상에서도 내 후드 티셔츠가 가진 그 평온한 평범함을 누리고 있는 것일까.얼마 전 패션계에 오랫동안 종사하다 지난달부터 스스로 백수를 택한 지인과 간만에 만나 커피를 마셨다. 바쁜 직장생활을 그만두니 조금은 먼 곳(판교는 차로 20분이면 출퇴근이 가능하다고 주장하지만)에서 내 사무실 근처 카페까지 방문해 사사로운 안부를 묻게 되는 순간도 왔다.오랜만에 만났으니 으레 하는 “요즘 어떻게 지내?”라는 질문에 “그냥 그래요.”(분명 딱히 바쁜 일 외엔 얘기할 거리가 없다는 대답이었다)라고 답했더니 “그냥 그렇다는 것만큼 안정적인 대답은 없네.”라고 말했다.“그런가요?” 내가 대답한 의도와는 분명히 달랐지만 요즘 극심한 두통에 시달리고 있는 내가 그 한마디에 일종의 위로를 받았던 것 같다.‘당신이 머리가 아픈 건 남들보다 더 열정적이기 때문’이라는 두통약 광고도 있었지만, 최근 열정적이라는 이유로 고통을 참기엔 헛헛하고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나보다 앞서가는 동료나 잘나가는 친구의 소식을 들었던 것일까. 아님 사촌이 땅이라도 산 것일까.불필요한 경쟁심에 조바심이 나서 평범해지지 않으려고 애쓴 것, 혹은 두 다리 뻗고 쉬어도 될 휴일을 아무 일 없이 흘려 보낸 것이 때론 죄를 지은 듯 느껴질 때가 있다.물론 상대방은 나보다 나이와 경험도 많고 매사에 감사할 줄 알며 진중한 성품을 가진 사람인지라 “그냥 그래요.”라는 대답의 잣대가 나와는 다를 것이다.하지만 그 대답을 듣는 순간 진심으로 그냥 그렇게 살고 싶어졌다. 부모님이나 주변 친구들에게 안부를 묻고 직장 동료에게 웃으며 대답하고 잠자기 전 ‘감사합니다’라고 인사할 수 있는, 그런 착하고 반듯한 생활 말이다.그런 평범함이라는 상태가 가장 이상적인 형태의 삶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하지만 이내(다시 사무실로 돌아가니) 그런 평범함에 도달하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 또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뛰어나거나 색다른 점 없이 보통인 상태, 평범해지려고 하면 할수록 대단하게 느껴지는 평범함은 단시간에 절대 완성될 수 없는 궁극의 레벨이다.평범하기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옷을 만들 때도 복잡한 디테일의 무엇을 만드는 것보다 완벽한 티셔츠 한 장이나 몸에서 촤르르 떨어지는 니트 한 벌을 만드는 것이 더 어려운 것처럼 말이다.패션계에서도 평범함을 내세우는 컨셉트의 무언가가 많아지는 반면, 여전히 평범하기보다는 비범하기를 바라는 날카로운 평가가 공존한다.물론 나 역시 평범하다라는 말이 디자이너에게 잘 어울릴까 하는 질문에는 아직도 답을 내리지 못했다. 하지만 쫓기듯 하루를 보낸 오늘, “그냥 그래요.”라는 뻔한 대답이나 그레이 컬러의 후드 티셔츠들이 가득한 옷장처럼, 평범하기 그지없는 생활을 다시금 소망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