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녀 공용의 시대 | 하퍼스 바자 코리아 (Harper's BAZAAR Korea)

2017년, 가장 동시대적인 유니섹스 룩이란 무엇일까? | 남노아,유니섹스

지금으로부터 10여년 전, 내가 근무하던 회사 1층에는 작은 테라스가 딸린 아담한 카페가 있었다. 커피잔을 들고 차도로 내몰린 듯한 자그마한 테라스에서 커피를 마실 때면 마치 지나가는 행인 사이에 앉아 있는 듯한 느낌이 들곤 했다. 당시 이웃에는 이름만 대면 알 만한 광고회사가 자리하고 있었는데, 점심 시간 그 테라스에서 목격했던 직장인들의 옷차림을 대략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었다. 첫 번째는 수트를 아래위로 말쑥하게 차려입은 신입사원 또는 부장님 스타일, 두 번째는 슬랙스에 보머 재킷만 간단하게 걸쳐 입은 만년 과장님 스타일, 마지막은 블라우스에 H라인 스커트를 입은 오피스 레이디들로, 컬러와 소재만 다를 뿐 내 눈엔 다 똑같은 옷을 입은 듯 보였다.그것이 그 당시의 메가 트렌드였는지(물론 아니다) 아니면 큰 회사를 다니는 여성들에게 주어지는 강압적인 룰이었는지, 테라스에 앉아 비슷한 복장을 한 여성들이 떼 지어 걸어오는 모습을 마주하고 있노라면 지나가던 차가 나를 덮칠 것 같은 상상과 맞먹는 공포가 되곤 했다. 이와 반대로, 헐렁한 후드 티셔츠에 와이드 팬츠를 입고 하이힐을 신은, 혹은 바이커 재킷에 하이 웨이스트 팬츠를 한껏 추켜 입고 오피스 군단 속을 당당하게 걸어 나오던 나의 ‘여자사람’ 친구들이 그렇게 자랑스러울 수 없었다.디자이너로서 고전적인 여성미나 글래머스한 실루엣을 향한 애정도 분명 존재하나 오피스 레이디들의 천편일률적인 패션에 숨이 막혔던 건 사실이다. 물론 그럴 일은 없겠지만 “복장 규정이 있는 회사는 다닐 수 없겠다”고 단정 짓기도 했다. 어여쁜 블라우스에 스커트를 입은 그녀들보다 헐렁한 캠퍼스 후드 티셔츠처럼 성별에 구애 받지 않는 옷을 즐겨 입는 내 친구들이 더 사랑스럽게 느껴졌고, 무엇보다 ‘여성스러운 옷차림’에 대한 무언의 순종이 싫었다. 고백하건대 내가 유니섹스 브랜드를 시작하게 된것에는 그런 삐딱한 심리도 한몫을 했다. 유니섹스는 단일이라는 의미를 가진 ‘유니(Uni)’와 성(性)이라는 의미를 가진 ‘섹스(Sex)’의 합성어로 모노섹스(Monosex)라고도 부른다. 1960년대에 미국에서 사용되기 시작했고 고도로 문명화된 사회를 혐오하는 자연 지향적인 히피족이 유니섹스의 선구자격이다. 패션에서는 남녀가 공용으로 입는 옷으로 의복으로 입는 사람의 성을 구별할 수 없고, 더 나아가 복식이 더 이상 유혹의 수단으로 사용되지 않길 바라는 사회적 메시지까지 담고 있다. 유니섹스의 사전적, 시대적 의미를 찾아보며 유니섹스라는 것이 이렇게 거창한 것이었나 새삼 감탄했는데 그도 그럴 것이 현재 유니섹스는 무척이나 일상적인 것으로 둔갑해 있기 때문이다. 그 의미가 퇴색했는지 변질됐는지, 아님 진화했는지 묻는다면 분명 진화했다고 답할 것이다. 아니 변천했다고 해야 할까. 여성도 입기 힘든 슬림한 팬츠수트가 남성 컬렉션에 등장하고, 광활한 어깨의 오버사이즈 재킷과 펄럭이는 팬츠가 한 벌인 룩이 여성 컬렉션에 등장하는 시대. 그리고 이 모두가 주목해야 할 매력적인 룩으로 추앙 받는 시대다. 어디 그뿐인가. 가장 캐주얼한 유니섹스 아이템인 스웨트셔츠와 낙낙한 팬츠는 누구나 옷장 속에 하나쯤 가지고 있는 기본 중의 기본 아이템이 되었다.곧 선보일 2017 F/W 패션쇼에서는 진화한 동시대의 유니섹스 룩이란 무언인가에 대한 고민을 담았다. 캣워크에는 같은 옷을 입은 남녀가 등장할 것이다. 같은 스웨트셔츠를 입은 남녀가 어떻게 달라 보이는지, 같은 싱글 재킷을 입은 남녀가 각각 어떤 실루엣을 드러내는지, 무겁지 않은 경쾌한 스토리로 풀어낼 생각이다. 오래전 기성세대와 사회에 반항하던 청춘들처럼, 이 사회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확신에 찬 사상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건 과거의 방식이다. 그저 우리가 함께 입을 수 있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 그런 범인간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다. 남녀가 같은 옷을 입을 수 있는 영역이 넓어졌고, 딱히 사이즈를 나눌 필요가 없으며, 누가 입든지 다른 느낌으로 오롯이 빛날 수 있는 옷, 21세기의 유니섹스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이따금씩 브랜드를 시작하게 된 계기에 대한 질문을 받을 때면 나의 기억은 대개 그 시절 그 카페로 이동한다. 그리고 복제인간 같았던 오피스 레이디 군단 사이에서 형형히 빛났던 내 친구들을 떠올린다. 유니섹스란 모토 아래 남성과 여성이 자유롭게 서로의 것을 공유할 수 있는 옷을 만들자고 마음먹은 것. 그것이 대단히 신선하다는 생각을 해본 적도 없고 남들보다 앞서는 트렌드를 제시하고자 했던 것도 아니다.(나는 그다지 혁명적인 사람이 아니기에.) 그저 남성과 여성의 경계를 구분 짓지 않는 옷이 필요했을 뿐이다. 내가 생각하는 유니섹스는 커플 룩이나 패밀리 룩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나는 옷에서 그런 경계 없는 편안함을 원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