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혁이 가진 품위 | 하퍼스 바자 코리아 (Harper's BAZAAR Korea)

김주혁이 말했다. “나는 내가 너무 멋이 없어요.” 그러나 우리가 만난 김주혁은 오랜 시간 축적된 경험과 취향으로 자신만의 멋을 가지게 된 사람이다. 배우 김주혁, 남자 김주혁, 인간 김주혁이 가진 품위에 대하여. | 영화,김주혁,당신자신과당신의것

그에겐 말하지 않았지만, 사실 배우 김주혁의 화보 촬영을 준비하며 스태프들과 가진 몇 차례의 미팅에서 우리끼리는 이미 그를 ‘주혁이 형’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우리가 아는 남자 배우 중에서 드물게 옷을 좋아하는 남자, 패션이 선사하는 순수한 의미의 즐거움을 아는 남자, 그러니까 ‘뭔가 좀 아는 형’ 같은 배우 김주혁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동안 패션 화보 촬영에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고 한다. 멋있는 척하는 걸 워낙 쑥스러워하는 성격인지라 모두가 지켜보고 있는 와중에 포즈를 취하는 상황 자체를 어색해하는 그는 이러한 고통을 끝내기 위해서 촬영 전 본인이 원하는 바를 문자메시지로 전해왔다. “배우들은 어차피 연기 자체가 ‘척’이다. ‘척’하지 않는 것. ‘나 사진 찍어요’ 같은 느낌을 주지 않는 것. 그냥 무심히 있다가 찍힌 느낌. 기존에 짜여 있는 틀에서 벗어나는 느낌....”홍상수 감독의 영화 속 대사 같은 그의 말을 ‘지금의 김주혁’을 담담히 담는 것으로 해독한 우리는 그가 가진 옷 중 일부를 가져와달라고 말했다. 옷을 좋아하는 그가 옷으로 하는 화보 작업에 재미를 느꼈으면 하는 바람이 절반쯤, 실제로 그가 가진 옷을 구경하고 싶은 마음이 절반쯤 됐다. 그리하여 화보 촬영을 위해 포즈를 취하는 대신 자신의 옷을 입고 밖을 서성이거나 벤치에 앉아서 식빵을 뜯어 먹고 있는 김주혁, 마치 친한 사람이 찍어준 것처럼 풀린 얼굴로 웃고 있는 김주혁의 모습이 사진에 담겼다. 재미있는 과정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비록 그는 “이 정도면 자연스럽죠?”라는 우리의 말에 “아니, 형식적인데?”라고 답한다거나 스타일에 대한 질문에 “난 그런 거 없어요. 그게 뭔지 알았으면 옷 사는 데 돈을 덜 썼겠지.”라고 툴툴대며 대꾸했지만 말이다. “나이를 먹으니까 오히려 어떻게 스타일을 잡아야 될지 모르겠어요. 나이 먹은 사람이 지나치게 멋을 부려서 꼴사나워 보이는 건 너무 싫거든. 과한 것들은 조금씩 버리고, 없애는 방향으로 가야 할 것 같아요. 나중에는 청바지에 티셔츠 한 장만 입고도 멋스러울 수 있다면 좋겠죠. 그런데 여전히 제일 좋아하는 게 쇼핑이긴 하지.(웃음) 어떤 옷을 입었는지가 나에게는 하루의 기분이에요.” 그리고 남들을 불편하게 하는 일을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이 남자는 결국 여유 있는 농담들을 툭툭 던지며 우리를 웃게 만들었다. “누군가는 냉정하게 볼 수도 있겠지만, 사실 내 마음 자체에 누군가를 차갑게 내치는 냉정함은 없어요. 말을 툭툭 내뱉는 건 사실 다정다감한 말투가 어색해서 그러는 거예요. 진짜 속마음은 뻘쭘해서 그러는 거거든.”몇 년 전에 인터뷰로 만났던 김주혁은 그가 정말로 해보고 싶은 촬영은 새벽녘 몇몇 사람들만 모여서 술을 마시다가 ‘이거 해보자, 저거 해볼까?’ 모의하면서 즉흥적으로 진행되는 촬영이라고 말했었다. 그리고 11월 개봉을 앞두고 있는 홍상수 감독의 영화 촬영이 이런 식으로 흘러갔을 거라는 데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한 인터뷰에서 배우 정재영은 “홍상수 감독과의 작업은 어떤 배우들에게는 전환점이 된다. 작업 방식 자체가 어떻게 보면 배우에게는 큰 용기를 내야 것이고, 한계를 만들어놓고 자신을 던지는 일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많은 것이 즉흥적으로 결정되고, 날씨에 따라 스토리가 바뀌기도 하고, 당일 아침에 시나리오가 나오는 촬영 현장에서 배우 김주혁도 어떤 전환점을 맞이했을까? “좋던데요, 굉장히. 즉흥 연기와 그냥 연기의 중간 정도랄까? 대본을 빠르게 인지하고 그 다음은 교감을 하면서 상대 배우만 믿고 가는 거죠. 연기에 대한 큰 틀은 가지고 가지만 기본적으로는 지금 이렇게 얘기를 나누는 것과 똑같이 귀를 열고 눈만 보고 있으면 돼요. 고통스러운 건 대사가 너무 많다는 정도죠. 한 신이 거의 10분이니까. 어쨌든 나에겐 아주 신선한 작업이었어요. 큰 도움이 됐어요. 그 이후로는 일부러 대사를 안 외우기도 해요. 그 ‘필’이 좋아서. 기억하고 만들어지는 것보다 상대 배우와 교감하고 싶은 거지. 원래 나는 그런 걸 원하는 스타일이에요. 준비를 하되 현장에 가면 다 비워놓고 연기하는 스타일. 나 역시 그걸 원하는데 감독님은 더 그러니까, 마치 연극 한 편을 한 것 같은 기분도 들었어요.”반면에 자신이 그려놓은 목적지를 향해 돌진하는 외골수 타입의 이경미 감독은 딱 정반대의 작업 스타일을 가졌는데, 나는 영화 를 보며 김주혁이 좋은 배우임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여자들의 영화 안에서 자신이 연기하는 캐릭터의 의미를 알고 딱 제 몫의 존재감을 보여주는 남자 배우는 매우 드문 존재다. “영화에는 편집이 돼서 일부만 나갔지만, 실제로는 ‘뒤지게’ 맞았지.(웃음) 한겨울에 밖에서 사흘 동안 팬티만 입고 누워 있었으니까. 나중에는 몸이 굳어버렸어요. 나는 기본적으로 내가 돋보이려고 남을 죽이는 연기는 절대 안 해요. 같이 연기해서 상대 배우한테 욕 먹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어요. 그거 하나는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어요. 내가 최대한 주려고 노력을 하니까, 그래야 내가 받지. 내가 안 주면서 뭘 어떻게 받을 수 있겠어요. 그리고 워낙 그런 분위기를 싫어해요. 가끔 촬영 현장에서 남녀 배우가 사이가 안 좋았다는 이야기가 들려오면 ‘무슨 일이래?’라는 생각이 먼저 들어요. 같이 촬영을 해야 될 사이이면서 사이가 안 좋다니, 대부분 남자 쪽이 잘못한 게 아닐까? 여배우에게는 원래 차갑거나 도도한 면도 필요하니까요.”‘본업’을 위해 의 정든 동생들을 떠난 배우 김주혁은 정말로 본업에 충실했고, 올 한 해는 스크린에서 김주혁의 모습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우리가 사랑하는 김주혁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긴 영화 와 끔찍할 정도로 ‘끝까지’ 갔던 영화 를 거쳐, 과 , 등 장르와 색깔이 다른 세 편의 영화가 개봉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탈북 범죄 조직의 리더 역할을 맡은 영화 와 미스터리 스릴러물 에서 김주혁은 모두 악역을 연기한다.) 개봉 전 떠돌아다니고 있는 의 영상 클립 속에서 김주혁은 이렇게 술주정을 하고 있었다. “사랑, 좋은 거야, 형. 인생 뭐 있어? 다 ‘척‘이야, ‘척’! 다 똥 싸고, 밥 먹고. 진짜 사랑하는 것. 사랑만이 가치가 있어. 나머지는 다 요식 행위야, 다 수작이야!” 이 말을 듣고 있던 상대 배우 김의성은 이렇게 대꾸한다. “다 필요한 거야. 인생에 하나도 안 필요한 것 없어. 과장한 거야, 니가. 살짝 미쳐 가지고.” 실제의 김주혁은 어느 쪽에 가까운 생각을 하는 사람인지 궁금했다. “나는 어느 한쪽에 극단적으로 치우치는 사람이 아니에요. 항상 중간이지. 인생 자체가 중립이야. 별자리가 천칭자리여서 그런지....(웃음) 그래서 여자들이 오히려 안 좋아할 수도 있어요. 가끔은 편드는 척이라도 해야 되는데 말이지. 그런데 내가 요즘 느끼는 건, 오로지 남들만을 위해서 좋은 사람이 되는 건 의미가 없는 것 같아요. 적어도 나는 즐거워야 될 거 아니야. 원래 나보다는 남을 더 많이 신경 쓰는 스타일이었어요. 그런데 이제는 나를 없애면서까지는 그러고 싶지 않은 거예요.”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품위는 애쓰지 않아도 자연스레 드러난다. 그것이 오랜 시간 동안 축적된 취향과 경험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더욱 그렇다. 우리가 아는 김주혁은 자신만의 멋이 있는 사람이다. 삶에서 누릴 수 있는 좋은 것들을 알아보는 안목, 무뚝뚝한 말투에서 묻어나는 타인에 대한 배려와 간결한 매너, 지나치게 가볍거나 지나치게 심각하지 않게, 모든 상황을 세련되게 중화시키는 능력은 인터뷰나 예능 프로그램에서뿐만 아니라 그의 연기에서도 드러난다. 김주혁의 연기는 단 한 번도 지나치거나 부담스럽다고 느껴본 적이 없다. 남들이 하면 오그라들 만한 대사나 감정에 질식할 것 같은 상황도 김주혁이 하면 적당히 무덤덤하고 적당히 진심으로 들리며, 결과적으로 그가 연기하는 캐릭터는 현실과 충분히 밀착된다. 그래서 김주혁은 억지스럽게 웃기다가 울리려고 드는 영화 앞에서 다소 시니컬한 반응을 보이는 관객까지 사로잡을 수 있는 힘을 가진 배우다. 그런데 그는 지금 이렇게 말하고 있다. “아니, 나는 멋이 없어요. 내 삶이나 나는 진짜 너무 멋이 없는 것 같아요. 나는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보다는 차라리 ‘저 사람, 참 삶을 멋있게 살았다’라는 말을 듣고 싶거든. 요즘엔 나 이외의 모든 사람들이 다 멋져 보여요. 이를테면 여기 바로 앞에 있는 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 사람들도 멋져 보여요. 그냥, 즐기고 있는 모습이 좋아 보이거든. 나는 촬영장에 가는 게 제일 재밌는 일이에요. 내 삶은 진짜 재미가 없죠. 그런 점에서 우리나라 배우들이 참 불쌍하다는 생각을 많이 해요. 몸 사리며 집에만 있으니까. 그런 삶을 살면서 무슨 좋은 연기를 하겠어요.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 싶어서, 이제부터는 조금 다르게 살아보려고 하는 거죠.”그가 지금부터 시도해보려고 하는 ‘삶의 변화’는 이렇다. 우선, 다음 달에 시도할 것은 집 안 인테리어. “이제 혼자 사는 법을 터득해야 돼요. 밥도 할 줄 모르고 세탁기 돌리는 법도 모르고 아무것도 할 줄 몰라요. 이렇게 한심스럽게 살면 안 되지. 제일 먼저 알고 싶은 게, 도대체 음식물 쓰레기는 어떻게 버리는 걸까?” 그 다음으로는 새벽 1시에는 잠들어서 아침 8시경에는 일어나기. 그전에는 취침 시간이 아침 8시였다고 한다. “밤 시간에는 혼자 있어서 심심하다거나 외롭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음악을 듣거나 영화를 볼 때 안에서 뭔가 좀 끓어오르는 게 있잖아요. 그 상태에서 참는 게 아니라 조금 더 가보는 거지. 어차피 혼자 있으니까. 최근에? 가장 최근에는 를 보면서 울었는데....(웃음) 어찌 됐든 이제 밤에는 자고 낮에 움직이려고 해요. 하루가 짧아지는 것도 싫고, 자연의 이치대로 살아야 되는 것 같아서요.” 그럼, 연애는? “예전에는 연애를 하면 계속 잘해주려고만 하고, 매너를 지키려고 애썼던 것 같아요. 이제는 확 내려놓고 선을 넘어가는 연애를 하고 싶어요. 결론은 이거예요. 사람은 피해를 좀 주기도 하고, 피해를 받기도 하면서 살아야 되는 것 같아요. 너무 남에게 피해 주지 않으려는 개인주의적인 삶을 살다 보니까, 결국 그것은 나를 위한 것도, 남을 위한 것도 아니더라고. 그래서 좀 짜증이 나더라고요. 어쨌든 이제 나는 계산적으로 살고 싶지는 않아요. 좀 더 감정적으로 살고 싶어요. 난 이게 싫어. 이게 좋아. 오케이? 그럼 받아들일게. 이러고 살고 싶어요.”본인은 ‘최악’이라거나 ‘이렇게 한심스럽게 살다 죽으면 안 된다’는 말까지 하면서 지금 자신의 삶에 불만을 표했지만, 나로서는 그가 이런 고민을 하고 있는 것이 슬쩍 반갑기까지 했다. 김주혁은 혼자 보내는 시간의 가치와 개인주의적 삶의 의미를 아는 한국의 첫 세대가 아니었나 싶다. 누군가를 위한 삶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아가는, 예민하고 섬세해서 오히려 조금 외로워 보이기도 하는 한국 남자의 모습은 그의 이전 세대에서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 그에게 적당한 롤모델이 없는 것도 당연하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아재’가 되지 않고 멋지게 나이 들어가는 한국 남자의 모습을 보고 싶은 마음이 있다. 농담을 늘어놓다가도 어른 대 어른으로 진지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성인 남자. 전형적인 아버지나 남편이 아닌, 시니컬한 애인, 위트 있는 아버지, 동지 같은 남편을 연기할 수 있는 배우가 한 명쯤 있어줬으면 한다. 이것이 전 국민의 입에 ‘주혁이 형’이라는 호칭이 착 달라붙은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마지막으로 을 통해 그와 깊숙한 인연을 맺게 된 유호진 PD가 배우 김주혁, 남자 김주혁, 인간 김주혁에게 묻고 싶었다는 두 가지 질문을 전해왔다. 첫 번째는 ‘당신이 생각하는 죽음의 의미’. 그리고 두 번째는, ‘형이 생각하는 여자의 진짜 매력’. 이를 대신 전하자 ‘주혁이 형’은 투덜거리며 이렇게 답했다. “그런 질문을 도대체 왜 해? 이해할 수가 없네.(웃음) 죽음을 두려워하니까 이렇게 잘 살려고 노력을 하는 거예요. 무섭죠. 아무리 후회 없는 삶을 살았다고 해도 조금은 무서울 거예요. 당연한 거지. 어찌 됐든 지금은 전혀 죽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어요. 더 잘 살기 위해서 노력하는 거지. 그리고 여자의 진짜 매력은 사랑을 하거나 받을 때 나오는 것 같아요. 좋은 남자가 좋은 여자를 만들고, 반대로 괜찮은 여자가 남자를 쓸 만하게 만드는 거죠.”https://instagram.com/p/BMYW1-3ga4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