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SHION

혼돈이 꽃피운 도시, 2026 S/S 런던 패션위크 하이라이트

누구도 예상할 수 없었던 이번 시즌. 불안한 기류는 오히려 런던을 가장 런던 답게 만들었다.

프로필 by 한지연 2025.10.10

런던 패션 위크가 위기에 처해 있다는 이야기는 오래전부터 흘러나왔다. 특히 올해 6월, 맨즈 패션 위크까지 취소되면서 위기론에 더욱 힘이 실렸다. 하지만 쏟아진 우려가 오히려 강력한 자극제가 된 것일까. 영국 패션 협회는 이미지를 쇄신하기 위해 전력을 다했으며, 새로 취임한 CEO 로라 위어(Laura Weir)는 젊은 디자이너들에게 아낌없는 지원과 변화를 약속했다.


혼돈은 런던에서 언제나 새로운 에너지의 원천이 된다. 거칠고 과감한 실험과 섬세하며 낭만적인 정서가 공존하는 도시의 양면성은 패션 위크를 더욱 입체적으로 만든다. 헤리티지 하우스부터 자신만의 세계를 꾸준히 확장하며 런던을 대표하는 디자이너, 그리고 패기와 새로움으로 자신만의 서사를 써 내려가는 신예까지. 서로 다른 언어들이 한 무대에서 교차하며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다채로운 빛깔로 채워진 2026 S/S 런던 패션 위크, 그 속에서 주목할 만한 10개의 쇼를 만나보자.



Chopova Lowena

사진/ @chopovalowena

런던 패션 씬에서 그녀들은 이미 ‘실험과 유머의 얼굴’로 불린다. 불가리아 전통과 영국 하위문화를 결합해 독창적인 세계를 구축해 온 이 듀오에게 이번 무대는 다시금 자신들의 언어를 증명하는 자리였다. 미식축구와 치어리딩, 그리고 불가리아 유목 민족 카라카차니(Karakachani)의 전통 복식에서 영감을 받은 이번 시즌은 집단 속에서도 빛나는 개성을 조명한다. 시그니처인 카라비너 스커트와 치어리더 유니폼, 폼폼 재킷, 럭비를 연상시키는 과장된 실루엣은 장난기 어린 유년기의 열정과 에너지를 떠올리게 한다. 지퍼로 길이가 변형되는 드레스, 경기장의 클리트 슈즈를 연상시키는 3D 프린트 부츠, 부적처럼 소녀들을 지켜주는 체인 갑옷까지, 실험적인 요소들 사이에서 위트를 발견하는 재미가 있다. 유쾌하고 자유분방한 에너지 속에서 “자신의 방식대로 당당하라”는 메시지가 흐른다.


Natasha Zinko

사진/ @natashazinko

소호의 한 클럽을 쇼장으로 선택한 나타샤 진코. 어둑한 조명 아래 모델들은 런웨이의 질서를 과감히 무너뜨린다. 담배를 피우거나 무대에 앉아 술에 취한 듯 무심히 관객을 응시하는 장면까지 연출된다. 전통적인 쇼의 형식은 철저히 배제되었다. 그러나 이 무질서는 이번 컬렉션을 관통하는 하나의 미학이다. 대담한 프린트, 레이어드된 데님, 과장된 실루엣은 단순한 스타일링이 아니라 ‘완벽하게 꾸민 이미지’에 대한 반발로 기능한다. 취기 어린 몸짓과 무심한 걸음은 완벽한 워킹보다 이 순간의 진짜 모습이 더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펑크 문화가 뿌리 깊이 자리 잡은 런던만이 보여줄 수 있는 장면이다. 규범을 무너뜨리고, 미숙함조차 매력으로 전환하는 에너지. 혼돈 속에서 피어난 유머와 솔직함은 어쩌면 지금 런던 패션을 가장 정확히 대변하는 장면일지도 모른다.



HARRI

사진/ @harri_ks

공기를 주입해 드라마틱한 실루엣을 연출한 의상으로 데뷔부터 이목을 끌었던 하리. 그러나 이번에는 박물관 안에서 감상하는 예술이 아니라, 실제로 입고 움직이며 도시 속을 살아가는 예술을 화두로 던진다. 그가 런던의 대표적인 복합 문화예술 단지인 바비칸 센터(Barbican Centre)를 무대로 선택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런웨이에 등장한 룩들은 여전히 초현실적이지만, 이번에는 단순히 멈춰 있는 예술 작품에 그치지 않았다. 조각 같은 실루엣은 간결하게 다듬어져 움직임 속에서 생동감을 얻었고, 색과 소재는 일상에 스며들 수 있을 만큼 절제되었다. 입는 순간, 옷은 단순한 패션을 넘어 작은 ‘이동식 미술관’이 된다. 하리는 이번 컬렉션을 통해 “왜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나요? 이제 직접 입고, 예술 속을 걸어가세요.”라며 런던의 갤러리와 거리, 그 경계를 오가며 살아가는 이들을 위한 옷이라고 말한다. 예술과 삶의 간극을 좁히는, 런던이라는 도시의 정체성과도 맞아떨어진다.


Pauline Dujancourt

사진/ @paulinedujancourt

2024년 LVMH 프라이즈 파이널리스트에 이름을 올린 폴린 뒤장쿠르는 뉴젠(New Gen) 프로그램의 지원을 받아 지난 시즌에 이어 두 번째 런웨이 쇼를 선보인다. ‘나는 갈매기예요… 아니, 사실은 아니죠(I am the seagull… No, that’s not it)’라는 다소 엉뚱한 제목은 앤톤 체호프(Anton Chekhov)의 희곡 <갈매기> 속 주인공 니나의 대사에서 비롯되었다. 이번 시즌은 고통 속에서도 창작의 기쁨과 회복력을 잃지 않는 니나에게 자신을 투영하는 데서 출발한다. 한 땀 한 땀 엮어낸 크로셰 니트는 손끝의 호흡을 고스란히 담아내며 공예의 힘을 전하고, 살랑이는 시폰 드레스는 갈매기 날갯짓처럼 가볍게 흔들린다. 거칠지만 따뜻한 촉감과 바람에 따라 변주되는 유연한 실루엣은 그녀가 겪은 친구의 상실과 회복의 기쁨이라는 양극의 순간을 동시에 담아낸다. 450명의 게스트에게 증정된 하얀색 크로셰 브로치는 남겨진 이들의 고통을 나누고 회복을 염원하는 상징으로 남는다.



Johanna Parv

사진/ @johannaparv_

요한나 파브의 여성은 늘 움직인다. 자전거를 세워두고 창가에 서서 잠시 숨을 고르는 순간조차 언제든 출발할 준비가 되어 있다. 이번 시즌 역시 그녀의 컬렉션은 민첩함과 보호 본능을 동시에 이야기한다. 대표작인 하이브리드 백팩에 이어, 자전거 프레임에 고정할 수 있는 새로운 프레임 백(Frame bag)이 등장했다. 스스로 자전거를 타고 프로토타입을 테스트했다는 그녀의 말처럼, 실험과 실용성은 브랜드의 DNA다. 가볍고 견고한 소재, 숨겨진 포켓과 변형 가능한 실루엣, 세련된 커팅 방식은 도시 속 여성의 니즈를 정확하게 짚어낸다. 이번 시즌에는 더스터 코트를 재해석한 커버 재킷도 눈여겨볼 만하다. 18세기 카우보이에서 20세기 주부로 이어진 기능적 의복을 미래적이고 여성적인 형태로 변주했기 때문이다. 간결한 팔레트 속 불쑥 튀어나오는 레드는 미니멀리즘 안에서도 결코 무난하지 않은 태도를 드러낸다.



Simone Rocha

사진/ @simonerocha_

시몬 로샤의 낭만은 연약함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 안에는 반항의 정신이 스며들어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번 시즌 무대는 15세기 중세 시대에 지어진 맨션 하우스(Mansion House)다. 화려한 샹들리에와 스테인드글라스, 중세풍 카펫이 풍기는 아우라는 쇼의 분위기를 장엄하게 끌어올린다. 컬렉션은 소녀 같은 순수함과 불편한 긴장이 교차하는 순간을 포착한다. 작은 데이지가 오간자 위에 피었다가 비닐에 갇힌 드레스로 변주되며 위태로운 아름다움을 드러낸다. 크리놀린, 태피터, 퀼트 코트는 부드럽게 부풀어 오르지만, 그 속에는 ‘갇혀 있다’는 뜻의 ‘트랩(trapped)’이라는 단어가 끊임없이 중첩된다. 밀폐된 소재에 달콤한 꽃을 가두며, 사랑과 속박, 유희와 억압이 얽혀 있다. 장식적인 낭만을 넘어 여성성을 더 복합적이고 현실적인 시선으로 풀어내는 시몬 로샤. 아름다움과 불편함을 동시에 안으며 오늘날 여성이 마주하는 긴장감을 섬세하게 드러낸다.


Erdem

 사진/ @erdem

올해로 브랜드 론칭 20주년을 맞이한 에르뎀은 꾸준히 쌓아온 고유의 미학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냈다. 독립적인 패션 하우스로서 변함없이 자신만의 서사를 유지해 온 그는 이번 시즌에 19세기 말 스위스의 영매 헬렌 스미스(Hélène Smith)의 환영 속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스미스는 최면 상태에서 프랑스 궁정의 귀족, 인도의 공주, 화성 여행자 등 현실과 환상의 경계에서 끊임없이 자아를 발명하고 해체한 인물이다. 서로 다른 시대와 세계가 겹쳐진 룩들 속에서 역사와 판타지, 현실과 꿈이 부드럽게 충돌한다. 섬세한 레이스와 브로케이드로 장식한 드레스는 귀족을 연상시키며, 파편 같은 디테일과 컬러는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인도풍 장식과 과감한 원단 처리는 신선하게 다가오고, 금속 디테일에서는 우주적인 요소를 엿볼 수 있다. 귀족, 신비가, 여행자, 몽상가와 같이 서로 다른 정체성이 겹치고 어긋나며 새로운 얼굴을 만들어낸다. 상상과 현실이 공존하는 무대 위에서, 에르뎀은 가장 서정적이고 지적인 순간을 창조해낸다.



Paolo Carzana

사진/ @paolocarzana

파올로 카르자나는 매번 판타지적 서사를 통해 인간이 만들어낸 위험을 비판하면서도, 그 속에 연민과 사랑의 메시지를 담아낸다. 자기 집 뒷마당이나 작은 펍 같은 친밀한 공간에서 컬렉션을 선보였던 그가 이번 시즌에는 브리티시 라이브러리를 선택했다. 그가 이번 컬렉션 리서치에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한 희귀 도서 열람실은 마치 잠수함 같은 구조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조명이 잠수함 불빛처럼 공간을 가르며 켜지자, 모델들은 심해에서 떠오른 생명체처럼 등장한다. 부드럽고 연약한 실크와 유기농 면 네트, 바람에 흔들리는 오간자와 견고한 코튼이 뒤엉켜 새로운 존재를 만들어낸다. 직접 실험해 섞어낸 천연 염료는 산호의 발색처럼 강렬했고, 사라진 생명의 흔적을 떠올리게 한다. 특히 멸종 위기 동물인 판골린에서 영감을 받은 실루엣은 그의 철학을 집약한다. 인간의 손에 위협받는 가장 연약한 존재를 동시에 가장 강인한 생명체로 표현했다. “지구는 이미 그 자체로 신비롭고 경이롭다. 이를 파괴하는 존재는 그것을 존중하지 않는 인간 자신이다.” 공공의 전당에서 울려 퍼진 파올로의 메시지는 명확하다.


Dilara Findikoglu

사진/ @dilarafindikoglu

언더컬처를 기반으로 자신만의 매니악하면서도 결속력 있는 커뮤니티를 만들어내는 힘. 그곳에서 억압된 목소리가 해방되고, 새로운 아름다움이 탄생한다. 딜라라 핀디코글루의 무대는 언제나 어둠 속에서 시작된다. 열쇠가 잠기는 소리와 쇠사슬이 끌리는 소음이 울려 퍼지며, 쇼는 ‘순수의 감옥(Cage of Innocence)’이라는 제목 그대로 긴장감을 조성한다. 딜라라 특유의 언어로 풀어낸 룩은 극단적 충돌의 미학을 보여준다. 라텍스, 체인, 금속 헤드기어 같은 하드코어 소재와 레이스, 리본, 자수 같은 섬세한 장식이 정면으로 맞서면서도 낯설 만큼 조화롭다. 체리 모티프가 달린 드레스와 가방은 순수와 유혹, 달콤함과 위태로움을 동시에 암시한다. 코르셋을 비틀어낸 구조, 찢기고 해체되는 듯한 드레스, 피부에 닿을 듯 아슬아슬한 실루엣은 ‘억압과 해방’이라는 양극의 서사를 그대로 옮겨놓는다. 지나치게 섬세한 디테일은 룩의 완성도를 높였고, 보는 이의 시선을 끝까지 붙잡는다.


Burberry

사진/ Launchmetrics

런던 패션 위크의 마지막을 장식한 버버리는 언제나 그 자체로 상징적이다. 19세기에 개발된 개버딘 소재에서 출발한 헤리티지는 여전히 중심에 있지만, 다니엘 리의 손길을 거치며 매번 새로운 표정을 얻는다. 이번 시즌 무대는 켄싱턴 가든의 흙바닥 위에 세워진 거대한 텐트였다. 천장은 런던의 흐린 여름 하늘을 닮은 구름 프린트로 덮여, 마치 축제 현장에 들어선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블랙 사바스의 음악이 울려 퍼지자 공간은 작은 록 페스티벌처럼 변했고, 모델들은 축제 참가자이자 밴드 멤버처럼 런웨이를 걸었다. 버버리 체크는 한층 대담하게 변주되었다. 옐로우, 애시드 그린, 핫핑크로 재해석된 패턴은 트렌치코트와 크로셰 드레스, 시퀸 룩 위에서 경쾌하게 춤을 춘다. 버클 벨트와 프린지 백, 광택이 돋보이는 레더 액세서리는 실용성과 장식성을 동시에 드러내며 축제 분위기를 완성한다. 헤리티지와 반항, 클래식과 청춘의 에너지가 맞부딪히는 순간, 버버리는 다시 한번 런던이라는 도시와 호흡하며 새로운 시대의 리듬을 만들어낸다.

Credit

  • 글/ 런던통신원 한지연
  • 사진/ 각 이미지 하단 표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