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SHION

발렌시아가를 이끈 뎀나의 피날레

10년간 발렌시아가를 이끈 혁명가, 뎀나 바잘리아의 마지막 컬렉션 다시보기

프로필 by 윤혜영 2025.04.26

LEGENDARY REVOLUTION


10년간 발렌시아가를 이끈 혁명가, 뎀나의 화려한 피날레가 펼쳐졌다.


파리 한복판, 나폴레옹 1세가 잠들어 있는 역사적인 장소 앵발리드(Des Invalides). 이 엄숙한 공간이 발렌시아가 2025 F/W 컬렉션 무대로 탈바꿈했다. 웅장한 돔 아래 여러 갈래로 나뉜 입구(뎀나는 이를 ‘창조의 과정’에 비유한다)에 들어서자 검은 장막이 만들어낸 촘촘한 미로를 맞닥뜨린다. 쇼 시작 전, 발렌시아가는 게스트들에게 작은 ‘장난’을 준비했다. 모든 좌석이 자유석이라 공지했고, 이는 예측 불가능함과 (일부에게는) 당혹스러움을 선사했다. 이윽고 게스트들은 미로 같은 벽에 줄지어 놓인 의자에 앉기 시작했다. 모든 이들이 프런트로에서, 심지어 부피가 큰 옷이 지나갈 땐 발끝에 스칠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쇼를 감상할 수 있었다.

뎀나는 다시 본질로 돌아갔다. 쇼의 테마는 ‘표준(Standard)’. “저는 ‘코스튬’이라는 단어를 싫어합니다. 저로 하여금 꿈을 꾸지 않게 하기 때문이죠. 저를 꿈꾸게 하는 건 ‘수트’예요. 가장 어렵고, 동시에 제가 가장 잘하고 싶은 영역이기도 합니다.” 그의 말처럼 쇼의 오프닝은 가장 기본적인 블랙 수트였다. 그 뒤를 이은 건 화이트 셔츠, 피케 폴로, 초경량 푸퍼 재킷, 웨트수트 소재의 가죽 재킷 등 전형적인 사무직 회사원의 모습이다. 물론 뒤틀고 변형시키는 지극히 ‘뎀나다운’ 디테일도 빠지지 않는다. 손으로 구긴 듯한 디테일의 수트, ‘좀먹은’ 듯 구멍이 뚫린 핀스트라이프 수트, 재킷과 맥시스커트를 매치한 언밸런스한 조합이 바로 그것. ‘발렌시아가 회사원’들은 한 손에 휴대폰을 들거나 접착식 메모지가 붙은 A4 용지를 담은 서류가방을 든 채 런웨이를 걸으며 현실감 있는 모습을 더했다.

데이 웨어라 명명된 아이템들 역시 특유의 반항적인 뉘앙스를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부서진 단추를 단 코트부터 바닥에 질질 끌리는 길이의 메디치 칼라 카디건, 모래시계 형태로 조여진 벨티드 패딩, 소매가 댕강 잘린 티셔츠, 영구적으로 주름지게 만든 데님, 수영복과 결합한 스윔 드레스를 보라. 여기에 하우스의 1951년 세미 피티드 라인에서 영감을 얻은 시어링 파카와 1967년 웨딩드레스의 웅장한 볼륨감을 그대로 재현한 몰튼 맥시 후드로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가 남긴 위대한 유산을 오마주하기도.

쇼 중반부엔 발렌시아가 팬이라면 열광할 협업 라인이 줄지어 등장했다. 아디다스에 이은 새로운 스포츠 브랜드, 푸마가 그 주인공. 시어링 재킷, 보머 재킷, 후디, 트랙수트, 목욕 가운까지 선보였는데, 아마도 가장 인기를 끌 아이템은 예상컨대 ‘울트라 소프트 스피드 캣’! 1988년 출시된 푸마의 대표 모델 ‘스피드캣 OG’를 재해석했는데, 찢겨지고 닳은 모습이 마치 10년은 거뜬히 신은 듯 거친 모습이었다. 또 비닐봉지를 닮은 ‘플라스틱 백’ 쇼퍼도 놓치지 말 것. 강철보다 15배 강한 내구성을 지닌 다이니마(Dyneema) 소재로 제작해 눈길을 끈다. 피어싱을 단 장갑과 헬멧, 얼굴 대부분을 가린 ‘베니스 비치 마스크’ 아이웨어는 꾸준히 관계를 이어온 모터사이클 브랜드 알파인스타즈(Alpinestars)와의 합작품이라고.

발렌시아가는 언제나 그랬듯 성별, 나이, 인종을 초월한 런웨이를 완성했다. 오피스에 출근하는 중년 여성과 장미꽃을 들고 데이트에 나선 근육질 남성, 친구를 만나러, 농구를 하러, 혹은 클럽에서 춤을 추러 가는 등 ‘무엇인가를 향해 가는 중’인 모델들의 개성 넘치는 런웨이는 일관된 규칙 대신 우리가 사는 이 세계를 그대로 옮겨 온 듯했다. 이것이 뎀나의 방식이다. 패션과 현실, 포용성과 반전, 유머와 메시지를 오롯이 담은 이번 컬렉션은 그의 마지막 발렌시아가 쇼이기도 하다. 지난 10년간 발렌시아가를 이끌며 거대한 족적을 남긴 그는 다음 챕터를 향해 떠나기로 했다. 그의 빈자리를 채울 후임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발렌시아가의 다음 혁명을 누가 쓸 것인지, 우리는 이제 새로운 발렌시아가를 기다릴 차례다.

Credit

  • 사진/ © Balenciaga, Launchmetrics(런웨이)
  • 디자인/ 이진미
  • 디지털 디자인/ GRAFIKS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