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하우스를 움직일 새 얼굴 4
올해 새로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들이 앞으로 바꿔 나갈 패션의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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럭셔리 하우스의 방향은 더 이상 한 명의 거장이 쥔 ‘천재성’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변화는 가속화됐고, 새로운 디렉터들은 단순히 옷을 디자인하는 자리가 아니라 브랜드 생태계 전체를 큐레이팅하는 역할을 맡는다. 새롭게 지명된 리더들은 저마다의 철학과 시도를 통해서 전례 없던 전략들을 차용한다. 신진 아티스트와 장인 네트워크를 활용하고, 디지털·리테일 전략에 힘을 쏟거나, 지역 커뮤니티를 강화하기도 한다. 결국 차기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은 패션 하우스의 지향점은 물론이고 미학적 언어, 포지셔닝, 심지어 브랜드가 근거지를 둔 도시와의 관계까지 들여다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 지금, 이토록 빠른 교체일까. 첫째, 생존 전략이다. 소비자들은 더 똑똑해졌고, 맥락 없는 화려함보다 철학과 디테일을 읽어내는 눈을 가졌다. 둘째, 세대 교체와 다양성이다. 여성 디렉터, 젊은 듀오, 서로 다른 문화적 배경의 인물들이 앞다투어 무대에 등장한다는 사실 자체가 메시지다. 마지막으로, 팬데믹 이후 달라진 가치관이다. 럭셔리는 더 이상 과시가 아니다. 장인의 손길, 지속가능한 소재, 정서적 경험 같은 ‘보이지 않는 가치’가 새로운 쿨함으로 읽힌다. 따라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의 임명은 단순한 인사 뉴스가 아니다. 단일 디자이너의 감각에 기대기 보다 전략적 시야와 문화적 비전을 겸비한 인물이 필요하다는 걸 우리 모두 알고 있다. 결국 새로운 디렉터 체제는 개인의 미학과 집단의 기술, 도시의 속성이 만나는 자리로 변모한다. 천재의 신화에서 시스템의 지성으로, 소음을 줄이고 밀도를 높이는 방향으로 말이다.
2025년, 패션하우스를 이끌어 나갈 주목해야 할, 네 얼굴을 소개한다.
1. 메종 키츠네, 아비게일 스미스

사진/ 메종 키츠네 제공
여우 로고, 파리와 도쿄라는 서구와 동양권을 대표하는 두 도시의 감성을 조화롭게 엮어낸 메종 키츠네는 ‘쿨’을 문화적으로 제안해온 브랜드다. 아비게일 스미스(Abigail Smith) 가 합류한다는 깜짝 발표는, 키츠네가 지향하는 독보적 감각이라는 방향으로 저울추를 한 칸 더 정교하게 옮기겠다는 신호처럼 읽힌다. 스미스는 20여 년 간 유수의 메종들에서 커리어를 쌓아온 베테랑으로 알려져있다. 캘빈 클라인, 셀린느, 끌로에, 버버리, 스텔라 매카트니 등에서의 경험을 두루 거친 이력은 곧 미니멀·테일러링·지속가능 소재·여성적 부드러움이라는 서로 다른 문법들을 실전에서 믹스해 온 감각을 증명한다. 영국 북부에서 자라난 성장 배경과 1990년대 레이브·클럽 컬처가 미감의 토양이었다는 한 인터뷰 답변에서 그가 걸어온 길이 ‘도시의 일상’과 ‘감각적 자유’라는 키츠네의 핵심과 자연스럽게 만난다는 걸 알 수 있다. 카페 키츠네, 뮤직 레이블과의 시너지가 강한 브랜드이기에, 옷은 곧 ‘장소·소리·취향’이 만나는 인터페이스로 자리매김 할 수 있을 것이다. 키츠네의 공동 창립자들은 그가 “키츠네 실루엣을 다시 정의할 것”이라며 기대를 표했다.
아비게일의 첫 컬렉션은 S/S 2026 시즌, 오는 파리 패션위크에서 발표될 예정이다. 그의 비전은 “파리에서 느낄 수 있는 우아함을 반영하면서 키츠네의 파리-도쿄 아이덴티티를 존중하는 현대적이고 기능적인 옷장”을 만드는 것이다. 다수의 해외 패션 전문지에 따르면 패션·뮤직·컬처를 아우르는 ‘아르 드 비브르’를 현대적으로 해석해, 파리지앵의 우아함과 도쿄 스트리트 감성을 담은 실용적인 아이템들을 선보일 예정이라고. 키츠네는 카페, 음악, 웰니스 사업까지 확장해왔기에 새 디렉터의 역할은 옷을 디자인하는 일을 넘어, 브랜드 경험 전체를 재정립하는 책임이 막중해 보인다.
2. 로에베, 잭 맥콜로 & 라자로 에르난데스
조나단 앤더슨이 지난 10여년 간 로에베를 ‘장인정신과 개념미의 교차점’으로 끌어올렸다는 점에는 그 누구도 이견이 없을 것이다. 조나단 앤더슨과 로에베의 이별 이후, 로에베는 뉴욕으로 시선을 돌렸다. 브랜드의 새로운 여정을 함께 할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는 바로 뉴욕 기반의 여성복 브랜드 프로엔자 슐러(Proenza Schouler)를 공동 설립한 듀오다. 잭 맥콜로(Jack McCollough) & 라자로 에르난데스(Lazaro Hernandez)는 2000년대 초 모던 뉴욕의 얼굴을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두 사람이 보여준 창의적 감각, 재료 탐구, 실험적인 실루엣 등을 로에베 DNA와 접목하려는 것으로 평가된다. 프로엔자 슐러를 통해 드러낸 강점은 드레이핑·절개·비례를 통한 현대적 여성성, 기능을 해치지 않는 구조적 우아함이다. 로에베의 카프스킨, 가장자리 엣지 페인팅, 토트의 체적·비례 같은 ‘손의 디테일’이 엄격하고 명료해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는 이유다. 소재와 구조에 대한 집요함과 활기 넘치고 톡톡 튀는 뉴욕 바이브는 로에베의 장인정신을 온전히 이해하는 동시에 자유롭게 해석할 것으로 기대한다.




듀오 역시 새로운 로에베의 S/S 2026 여성 컬렉션을 파리 패션위크에서 공식적으로 선보일 예정이다. 그에 앞서 티저 형태의 캠페인 이미지가 공개되어 한 차례 큰 기대감을 불러 일으켰다. 직관적이고 생생한 감각이 돋보이고, 관능적이고 위트 있는 시도라는 평을 받았다. 이전까지의 로에베가 예술적 유산, 장인 정신을 앞세웠다면 완전히 다른 방향도 고려하겠다는 선언에 가깝다. 포스터에 담긴 강렬한 시각적 메시지는 공예성과 밝은 낭만성 모두 강조하며 패션 하우스가 고수해온 정체성과 새로운 감각을 섞는 시도를 암시한다.
3. 디올, 조나단 앤더슨

사진/ 인스타그램 @dior
2025년 6월, 조나단 앤더슨(Jonathan Anderson)이 디올의 8번째 꾸뛰리에가 됐다. 지난 4월, 디올은 디올 맨의 새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앤더슨을 임명했다고 발표한 바 있다. 이제 그가 디올의 남성복을 비롯해 여성복, 오뜨 꾸뛰르 컬렉션까지 책임지게 된 것이다. 크리스챤 디올 이후 디올의 세 가지 라인을 모두 이끄는 디자이너는 앤더슨이 처음이다. 패션이라는 바운더리 안에서 절대 자신을 가두지 않는다. 영역과 분야의 한계를 구분 짓지 않고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해왔다. 수차례 ‘올해의 디자이너’로 선정되었으며, 실루엣을 통해 경계를 허물기도 하고 세우기도 하면서, 의복을 통해 삶과 태도에 대한 철학을 드러낸다. 그 태도는 로에베의 클래식을 급진적으로 재해석해 브랜드를 다시 전성기로 끌어올릴 수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진/ 디올 제공

사진/ 디올 제공
디올이 가진 브랜드 코드는 명확하다. 바 재킷, 뉴 룩의 허리선, 토일 드 주이와 카나주(깃발 모티프 퀼팅), 정원·꽃·부적 같은 크리스찬 디올의 개인적 상징들. 앤더슨은 브랜드가 지켜온 모든 상징들을 존중하되, 현대적 지성과 위트를 입히는 데 강점이 있는 인물이기에 적임자가 아니었을까. 로에베에서 그는 가죽을 종이처럼 접고, 트롱프뢰유(눈속임) 프린트를 옷으로 끌어와, 손으로 만든 세계의 아름다움을 냉정할 만큼 또렷하게 보여주는 데에 성공했다. 디올에서의 첫 무대는 지난 6월에 공개한 남성복 S/S 2026 컬렉션이었다. 18세기 일상의 미학을 포착한 화가 장 시메옹 샤르댕의 작품 사이로, 소년들이 나온다. 쇼 중간에는 위트와 언발란스, 러블리한 무드가 튀어나온다. 디올의 아카이브와 앤더슨 특유의 빈티지 감각을 섞은 스타일이 두드러졌고, 프레피 감성과 현대적 터치를 결합한 룩으로 호평을 받았다.
이어 내달 파리 패션 위크에서 선보일 첫 여성복 레디 투 웨어 컬렉션 티저를 2일 소셜 네트워크를 통해 과감히 선보였다. 플리츠 디테일부터 오리가미 형태의 입체적인 햇, 포인트를 더한 리본 디테일까지. 첨예하게 벼린 미학과 확장된 젠더 감성을 디올 여성복에 반영했다. 앤더슨이 새 자리에서 할 일은 디올을 디올 답게 ‘살아 있도록’ 만드는 일일 것이다. 디올이 내세운 “변화는 불가피하다”는 메시지처럼, ‘새로운 아름다움’의 기준을 재정립하는 작업은 앤더슨이라면 충분히 가능하다.
4. 발렌시아가, 피에르파올로 피촐리

사진/ 인스타그램@balenciaga
지난 7월, 발렌시아가에 합류한 피에르파올로 피촐리(Pierpaolo Piccioli)는 발렌티노에서 ‘낭만의 현대어’를 만든 디자이너다. 1999년 발렌티노에 합류해 마리아 그라치아 키우리와 함께 액세서리 디자이너로 활동하고 2008년부터 공동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임명되었다. 쿠튀르의 엄격함 위에 따뜻한 인본주의와 우아함을 얹으며, 단 한 벌의 드레스로 압도감을 줄 수 있는 디자이너다. 아쌈블라주와 디컨스트럭션, 과장된 어깨, 디스토피아적 유머로 오늘의 기호를 만든 피촐리가 보여주는 세계는 침묵과 색, 면적과 리듬의 힘에 가깝다. 이는 긴장에서 오는 아름다움이다. 발렌시아가가 전임 디렉터 뎀나 바잘리아가 구축한 반골적이고 실험적인 태도와는 달리, 로맨틱하고 단정한 방향으로 선회할 거라는 예측 또한 조심스럽게 해볼 수 있다. 런웨이의 태도 역시 달라질 것이다. 냉소 대신 품위를, 아이러니 대신 감정의 밀도를 강조하는 피촐리의 방식으로. “충분히 쉬었으니 시작할 준비가 됐습니다. 발렌시아가의 과거를 포용하고 싶어요. 니콜라 제스키에르, 뎀나가 만들어온 이야기 속에 나만의 챕터를 더하고 싶습니다.” 라는 담백하고 단단한 포부가 기대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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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각 이미지 하단 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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