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STYLE

어느 외지인이 마주한 한나절의 동인천

어느 외지인의 동인천 나들이. 계속해서 새것이 들어서는 도시의 섭리로부터 살짝 비켜나 있는 곳에서 제자리를 지켜온 것들을 들여다봤다.

프로필 by 안서경 2025.01.05
아벨서점 한편에 무심히 놓인 책들. 인천 출신 정치인 조봉암을 주제로 한 책들이 따로 서가에 놓여 있다 아벨서점 한편에 무심히 놓인 책들. 인천 출신 정치인 조봉암을 주제로 한 책들이 따로 서가에 놓여 있다 책방 골목 초입에 자리한 서점 집현전 애관극장 앞에는 여전히 종이 포스터가 걸려 있다. 미처 포스터를 구하지 못한 듯한 <모아나>는 A4 용지에 프린트된 채로 이제는 옆으로 터를 옮긴 아벨서점의 전신.
“요즘 어느 동네가 떠?” 피처 에디터라는 직업을 가지면 한 달에 서너 번쯤 이런 질문을 받는다. 취재차 동인천이라는 지역을 알게 된 건 6년 전쯤의 일이다. 그맘때 동인천은 이제 가좌공단으로 이전한 서핑 편집숍 ‘서프코드’와 화학 공장 전체를 탈바꿈한 복합문화공간 ‘코스모40’이 소위 힙스터들의 방문 코스로 알려져 있었다. 이후 동인천역을 중심으로 ‘개항로통닭’, 부산 초량에도 있는 카페 ‘브라운핸즈’ 등 로컬의 특성을 살린 카페나 식당이 줄지어 생겨난다는 소식이 들려왔지만 그곳까지 향하기엔 어쩐지 멀게 느껴졌다.
“○○ 동네로 가봐.” 몇 해 전만 해도 나는 꽤 자신 있게 대답했던 것 같다.(4년 전 서순라길이 마지막이었다.) 하지만 점점 답은커녕 질문을 받을 때면 머리가 새하얘졌다. 서울의 어떤 동네를 가든 새로운 광경을 볼 수 있을 거란 기대가 거의 없어졌기 때문이다. 좋아하던 카페와 식당들은 점점 지나치게 붐비거나 교외로 이전한 지 오래다. 어디든 F&B 브랜딩 회사들의 매끈한 체인점이 늘어서 있고, 간혹 가보고 싶은 새로 생긴 식당과 바는 일찍이 앱으로 예약을 해야 하는 루틴이 지겨워졌다. 처음 가보지만 미묘하게 낯설지 않은. 한 곳에서 오래 자리를 지킨 곳들이 주는 편안함이 그리워졌고, 그리하여 동인천까지 눈을 돌리게 되었다.
동인천에서 가보고 싶은 곳은 크게 두 곳이었다. 건축가와 기획자를 중심으로 예술 공간이 생겨난 싸리재길과 올해로 두 해째 북페스티벌이 열린 배다리헌책방길. 인천 전문가라면 차이나타운의 청요리 전문 식당부터 신포시장 민어골목까지 개항동을 샅샅이 훑겠지만, 초심자답게 배다리사거리에서 애관극장까지 이어지는 짧은 코스인 경동과 금곡동, 개항로 일대를 거닐기로 했다. 동인천역 공영주차장에 차를 대고 몇 걸음 걸으니 문을 연 지 40여 년이 넘은 전통생과자집 ‘인천당’이 눈에 띄었다. “말랑한 거, 딱딱한 거. 좋아하는 대로 골라보셔.” 두 노부부 사장님이 직접 만드는 생과자를 맛볼 수 있는 과자집에는 부채꼴 모양의 파래전병, 밤빵까지 각양각색의 과자들이 자리한다. 인심 좋게 갓 나온 땅콩전병 하나를 쥐어주셔서 맛보니 슴슴한 간과 담백한 것이 물리지 않을 맛. 한 근을 담아달라 요청하니 묵직한 재래식 저울 위로 묵직한 종이봉투가 오른다.
한 블록쯤 걸어 사거리에 다다르면 배다리헌책방 골목이 시작된다. 도쿄 진보초, 부산 보수동 책방 거리를 떠올리면 다소 한산한 광경. 한때 40여 곳 넘는 책방들이 있던 곳이지만 이제는 아벨서점, 집현전, 삼성서림, 한미서점까지 예닐곱 서점들이 묵묵히 단골과 문인들의 아지트로 남아 있다. 서점 집현전에는 작가를 지원하는 레지던시 공간이 마련되어 있고, 아벨서점 2층에서 비정기적으로 열리는 시낭송회는 150여 회를 훌쩍 넘겼다. 지난해 길목 끄트머리에 스페셜티 카페와 커뮤니티, 문구점을 겸하는 복합문화공간 ‘패치워크’가 새로이 자리하면서 일대는 활기를 찾고 있다. 소규모 독립출판물과 창작자들의 작업물을 볼 수 있는 행사가 열려 사람들을 모은다. 50여 년째 배다리의 터줏대감 역을 해온 아벨서점의 곽현숙 사장님께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책을 묻자 박경리 작가의 <김약국의 딸들> 초판본부터 인천에서 시를 쓴 조병화 시집과 인천 출신 정치인 조봉암 선생을 다룬 책들이 나란히 놓인 서가를 보여주신다.

카페 싸리재에는 오랜 동인지와 LP, 카메라가 가득 놓여 있다. 잉글랜드 돈까스의 생선 반, 돈까스 반 반반까스. 고소한 땅콩 씹는 맛이 일품인 인천당의 전병. 싸리재 재개발 지역에 자리한 문화공간 ‘부연’. 오랜 한옥을 그대로 살린 이곳에선 최근 이민지 작가의 사진전이 열렸다.
나들이의 백미인 점심을 위해 잉글랜드 돈까스로 향했다. 훌륭한 양장피를 먹을 수 있다는 용화반점, 스지탕이 유명한 다복집 등 노포가 줄을 선 동네에서 미리 추천받은 선택지는 여럿이었으나, 이곳을 고집한 데는 명분이 있다. 경양식 레스토랑다운 분위기를 제대로 느끼고 싶었다. 서울에도 몇 십 년 역사를 지닌 한국식 돈까스집은 많지만 임대료 문제 등 내부를 그대로 유지한 곳은 거의 없으므로. 오픈한 지 30분 후 방문했는데 이미 테이블이 꽉 찼다. 동네 사람, 외지인,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가득한 것도 가게가 문을 연 1980년대 정서 같다. 얇지도 두껍지도 않은 튀김옷, 고소하고 부드러운 완두콩 수프. 익숙한 맛을 음미하며 매장 안에 놓인 동양적인 분수대와 이집트 벽화 같은 타일을 보면 대체 이곳이 어디인지 알 수 없는 착각이 든다.
싸리재길에서 건축재생공방의 이의중 소장과 만나기 전, 애관극장에 잠시 들렀다. 한국전쟁 당시 전소되어 새 건물을 올리긴 했으나 1895년 최초의 극장으로 지어진 곳. 당시 공연 무대로 활용한 이곳은 일제강점기 일본 영화를 상영하기 시작해 지금까지 상영을 이어오고 있다. 극장 앞에는 이젠 자취를 감춘 종이 포스터들이 ‘Now Showing’, ‘Coming Soon’ 두 섹션으로 나뉘어 쪼르륵 걸려 있다. 정문 옆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애관극장 부근 경동거리는 시네마 천국이었다. <무영의 악마>(인천건설영화사), <복지강화>(합동영화사), <날개 없는 천사>(국보영화사) 등이 제작, 보급될 만큼 영화예술의 꽃을 피운 토양 역할을 하기도 했다.” 단관 극장 미림극장을 제외하고 동인천의 또다른 극장인 인천·오성·인형극장이 차례대로 문을 닫았지만 이곳은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관람을 놓치고 싶지 않은 영화를 보고 싶다 생각하며 건물을 나섰다. 상영관이 무려 5관이나 되니 확률이 나쁘지 않다.

자유공원에서 보이는 항구 일몰. 서로 인사하고 있는 공원 안 고양이들. 문화공간 ‘공소’에는 건축재생공방 이의중 소장이 주물공장과 철거된 건물에서 모은 자재가 모여 있다.
“한옥에는 암수 기와가 올라가 있는 게 일반적인데 이 집은 일본식 평기와가 올라가 있어요. 시대가 하나씩 레이어되어 있는 거죠.” 이의중 소장이 말했다. 인천의 사라져가는 주거 단지나 공단을 아카이빙하고 연구해온 그는 비정기적으로 모임 플랫폼을 통해 이 일대를 산책하며 건축적인 특성을 전해왔다. 싸리재 일대가 한옥마을이었다는 사실, 이후 일제시대를 거치고 다세대 빌라들이 생기면서 한옥 위로 새로운 양식이 증축되었다는 이야기들을 골목골목 걸으며 듣다 보면 낡은 주거촌이 새삼 달리 보인다. 예스러운 창살과 유리의 디자인, 콘크리트 벽의 질감에도 다종다양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최근 몇 년간 인천시와 공사가 매입한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건축물과는 꽤 거리가 있는 모습이다. 항만과 신흥동 일대에는 인천일본은행이었던 개항박물관, 대불호텔, 청 조계지 등 이국적인 건물이 곳곳에 많지만, 이 소장은 과거부터 지금까지 실제 거주민들의 생활을 엿볼 수 있는 이곳이 가장 흥미롭다고 말한다. 재개발 구역이라 빈집이 수두룩한 곳을 매일 살펴보고 몇몇을 임대해 전시 공간인 ‘옹노’, ‘부연’, ‘공소’로 탈바꿈시켰다. 여관과 창고로, 누군가의 집으로 쓰인 건물 안에서는 이 소장이 일대의 공장이나 철거 주거 지역에서 모은 재료를 전시하기도 하고, 젊은 예술가들의 사운드와 회화 전시가 열린다.
대로에서 보면 상가 건물 같아도 뒷면은 한옥인 구조를 지닌 곳은 카페 싸리재도 마찬가지. 박력 있는 서까래 지붕 아래에서 LP 음반을 들으며 연유와 에스프레소, 우유 거품을 얹은 대표 메뉴 ‘카페봉봉’을 한 잔 하고 자유공원으로 향했다. 개항 후 러시아, 미국, 청이 공원의 부지를 나눠 만국 공원으로 불렸던 곳, 그 아래 장교들과 부인회의 사교 모임장이 되었던 제물포구락부가 있던 언덕이 보인다. 이제는 인천 주민들의 필수 산책로가 된 이곳의 독특한 역사를 말하려면 몇 단락으로도 부족하다. 맥아더 동상 앞에서 어르신들이 에어로빅 수업을 여는 걸 한참 보다가, 그저 공원을 누비는 고양이의 꽁무니를 쫓다가 인천을 사랑하는 어느 부호가 기증한 석정루에 올랐다. 맞은편으로는 월미도의 석양을, 아래로 차이나타운을 보며 생각했다. 동인천에 다시 오리. 그땐 꼭 재즈 바 ‘버텀라인’에서 공연을 봐야지. 서울로 돌아오는 길 나는 꽤 들떴던 것 같다. 오래된 것들이 모여 있지만 마냥 소박하거나 고즈넉하지 않고, 그 자체로 활기를 띠거나 그대로의 우아함을 존중하는 이들이 모인. 하루아침에 철거되고 새것이 세워지는 도시의 섭리에서 조금 비켜나 있지만 실타래처럼 시간이 쌓여 있는 곳. 이토록 궁금증을 남기는 동네는 당분간 이곳이 유일할 것 같다.

Credit

  • 사진/ 표기식
  • 디자인/ 진문주
  • 디지털 디자인/ GRAFIKS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