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STYLE
어느 외지인이 마주한 한나절의 동인천
어느 외지인의 동인천 나들이. 계속해서 새것이 들어서는 도시의 섭리로부터 살짝 비켜나 있는 곳에서 제자리를 지켜온 것들을 들여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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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네로 가봐.” 몇 해 전만 해도 나는 꽤 자신 있게 대답했던 것 같다.(4년 전 서순라길이 마지막이었다.) 하지만 점점 답은커녕 질문을 받을 때면 머리가 새하얘졌다. 서울의 어떤 동네를 가든 새로운 광경을 볼 수 있을 거란 기대가 거의 없어졌기 때문이다. 좋아하던 카페와 식당들은 점점 지나치게 붐비거나 교외로 이전한 지 오래다. 어디든 F&B 브랜딩 회사들의 매끈한 체인점이 늘어서 있고, 간혹 가보고 싶은 새로 생긴 식당과 바는 일찍이 앱으로 예약을 해야 하는 루틴이 지겨워졌다. 처음 가보지만 미묘하게 낯설지 않은. 한 곳에서 오래 자리를 지킨 곳들이 주는 편안함이 그리워졌고, 그리하여 동인천까지 눈을 돌리게 되었다.
동인천에서 가보고 싶은 곳은 크게 두 곳이었다. 건축가와 기획자를 중심으로 예술 공간이 생겨난 싸리재길과 올해로 두 해째 북페스티벌이 열린 배다리헌책방길. 인천 전문가라면 차이나타운의 청요리 전문 식당부터 신포시장 민어골목까지 개항동을 샅샅이 훑겠지만, 초심자답게 배다리사거리에서 애관극장까지 이어지는 짧은 코스인 경동과 금곡동, 개항로 일대를 거닐기로 했다. 동인천역 공영주차장에 차를 대고 몇 걸음 걸으니 문을 연 지 40여 년이 넘은 전통생과자집 ‘인천당’이 눈에 띄었다. “말랑한 거, 딱딱한 거. 좋아하는 대로 골라보셔.” 두 노부부 사장님이 직접 만드는 생과자를 맛볼 수 있는 과자집에는 부채꼴 모양의 파래전병, 밤빵까지 각양각색의 과자들이 자리한다. 인심 좋게 갓 나온 땅콩전병 하나를 쥐어주셔서 맛보니 슴슴한 간과 담백한 것이 물리지 않을 맛. 한 근을 담아달라 요청하니 묵직한 재래식 저울 위로 묵직한 종이봉투가 오른다.
한 블록쯤 걸어 사거리에 다다르면 배다리헌책방 골목이 시작된다. 도쿄 진보초, 부산 보수동 책방 거리를 떠올리면 다소 한산한 광경. 한때 40여 곳 넘는 책방들이 있던 곳이지만 이제는 아벨서점, 집현전, 삼성서림, 한미서점까지 예닐곱 서점들이 묵묵히 단골과 문인들의 아지트로 남아 있다. 서점 집현전에는 작가를 지원하는 레지던시 공간이 마련되어 있고, 아벨서점 2층에서 비정기적으로 열리는 시낭송회는 150여 회를 훌쩍 넘겼다. 지난해 길목 끄트머리에 스페셜티 카페와 커뮤니티, 문구점을 겸하는 복합문화공간 ‘패치워크’가 새로이 자리하면서 일대는 활기를 찾고 있다. 소규모 독립출판물과 창작자들의 작업물을 볼 수 있는 행사가 열려 사람들을 모은다. 50여 년째 배다리의 터줏대감 역을 해온 아벨서점의 곽현숙 사장님께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책을 묻자 박경리 작가의 <김약국의 딸들> 초판본부터 인천에서 시를 쓴 조병화 시집과 인천 출신 정치인 조봉암 선생을 다룬 책들이 나란히 놓인 서가를 보여주신다.




싸리재길에서 건축재생공방의 이의중 소장과 만나기 전, 애관극장에 잠시 들렀다. 한국전쟁 당시 전소되어 새 건물을 올리긴 했으나 1895년 최초의 극장으로 지어진 곳. 당시 공연 무대로 활용한 이곳은 일제강점기 일본 영화를 상영하기 시작해 지금까지 상영을 이어오고 있다. 극장 앞에는 이젠 자취를 감춘 종이 포스터들이 ‘Now Showing’, ‘Coming Soon’ 두 섹션으로 나뉘어 쪼르륵 걸려 있다. 정문 옆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애관극장 부근 경동거리는 시네마 천국이었다. <무영의 악마>(인천건설영화사), <복지강화>(합동영화사), <날개 없는 천사>(국보영화사) 등이 제작, 보급될 만큼 영화예술의 꽃을 피운 토양 역할을 하기도 했다.” 단관 극장 미림극장을 제외하고 동인천의 또다른 극장인 인천·오성·인형극장이 차례대로 문을 닫았지만 이곳은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관람을 놓치고 싶지 않은 영화를 보고 싶다 생각하며 건물을 나섰다. 상영관이 무려 5관이나 되니 확률이 나쁘지 않다.



대로에서 보면 상가 건물 같아도 뒷면은 한옥인 구조를 지닌 곳은 카페 싸리재도 마찬가지. 박력 있는 서까래 지붕 아래에서 LP 음반을 들으며 연유와 에스프레소, 우유 거품을 얹은 대표 메뉴 ‘카페봉봉’을 한 잔 하고 자유공원으로 향했다. 개항 후 러시아, 미국, 청이 공원의 부지를 나눠 만국 공원으로 불렸던 곳, 그 아래 장교들과 부인회의 사교 모임장이 되었던 제물포구락부가 있던 언덕이 보인다. 이제는 인천 주민들의 필수 산책로가 된 이곳의 독특한 역사를 말하려면 몇 단락으로도 부족하다. 맥아더 동상 앞에서 어르신들이 에어로빅 수업을 여는 걸 한참 보다가, 그저 공원을 누비는 고양이의 꽁무니를 쫓다가 인천을 사랑하는 어느 부호가 기증한 석정루에 올랐다. 맞은편으로는 월미도의 석양을, 아래로 차이나타운을 보며 생각했다. 동인천에 다시 오리. 그땐 꼭 재즈 바 ‘버텀라인’에서 공연을 봐야지. 서울로 돌아오는 길 나는 꽤 들떴던 것 같다. 오래된 것들이 모여 있지만 마냥 소박하거나 고즈넉하지 않고, 그 자체로 활기를 띠거나 그대로의 우아함을 존중하는 이들이 모인. 하루아침에 철거되고 새것이 세워지는 도시의 섭리에서 조금 비켜나 있지만 실타래처럼 시간이 쌓여 있는 곳. 이토록 궁금증을 남기는 동네는 당분간 이곳이 유일할 것 같다.
Credit
- 사진/ 표기식
- 디자인/ 진문주
- 디지털 디자인/ GRAFIKS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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