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설인아가 조곤조곤 말하듯 노래한다. 그녀는 얼마 전 뮤지션 이찬혁이 발매한 프로젝트 리메이크 앨범에서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란 노래를 불렀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 눈빛만 보아도 알아 / 그냥 바라보면 / 마음속에 있다는 걸”. 그러니까 자신을 사랑해달라며 수줍게 고백하는 그녀의 노래를 듣다 보니 머릿속에서 단편소설 한 편이 뚝딱 완성됐다. 말하자면 목소리는 이 배우의 가장 큰 무기다. 오만 가지 서사를 연상케하는.그리고 이 오래된 가요는 그녀의 최근작 〈오아시스〉의 오정신 역할과 자연스레 겹쳐진다. 1980년대를 배경으로 한 시대극 〈오아시스〉는 지난해 〈사내맞선〉의 통통 튀는 상속녀 진영서 역할로 사랑받은 이후의 예외적 선택이었다. 이 작품에서 그녀는 극장집 딸에서 영화사 대표로 성장하는 진취적 신여성이자 꿋꿋이 첫사랑을 지켜내는 순정적 인물로 분했다. “너희 집안이 가난하긴 했는데 네 눈은 언제나 새벽별처럼 빛났어. 어둠이 짙을수록 더 빛났던 거야.” 그렁그렁한 눈동자로 내뱉는 사랑 고백의 뒤엣말은 굳이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말하지 않아도 눈빛만으로.


설인아가 배우를 꿈꾼 건 초등학생 시절 아빠와 함께 영화 〈쇼생크 탈출〉을 보고 나서부터다. 50년간 감옥에 있다가 출소한 브룩스가 끝내 삶을 포기하는 장면은 어린 그녀에게 그동안 경험해본 적 없는 인생의 그림자를 알려주었다. 그때부터 연기가 좋았다. 중학교 2학년 때부터 3년 9개월간 아이돌 연습생 시절을 거친 것도 가수가 연기를 할 수도 있고 배우가 노래를 할 수도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결국 아이돌로 데뷔하진 않았지만 험난한 연습생 기간을 거치면서 몸에 밴 습관은 지금도 배우의 성장을 지탱하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덕분에 하루를 알차게 쓰는 법을 배웠죠. 당시에도 연습하기 싫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어요. 늘 시간이 부족했고 무언가를 더 배우고 싶었죠. 그렇게 목표지향적인 사람이 된 것 같아요. 이제는 목표가 없으면 불안하고 불편해져요.”

생존에 대한 감각도 빨리 깨우쳤던 걸까. 고된 트레이닝으로 모두가 떠나고 홀로 남은 연습실에서 결심했다. 스스로 살아남아야겠다고. 입시 3개월 전이었다. 회사에 양해를 구하고 홀로 대입을 준비했다. 주변 친구들에게 무용의 기초를 배웠고 여기에 연습생 생활을 통해 익힌 안무를 접목해 연기과에 합격했다. 이후에도 증명의 연속이었다. “오디션엔 정말이지 숱하게 떨어졌어요. 떠내려가던 중에 겨우 붙잡은 기회가 〈프로듀사〉였어요.” 그렇게 2015년 단역으로 데뷔한 그녀는 2018년 〈내일도 맑음〉, 2019년 〈사랑은 뷰티풀 인생은 원더풀〉, 2020년엔 〈철인왕후〉, 2022년엔 〈사내맞선〉을 통해 한 계단 한 계단 배우로 자리매김했다.

17살 설인아는 아침 10시부터 밤 10시까지 트레이닝 스케줄이 꽉 차 있는, 그럼에도 미래가 불투명한 연습생이었다. “그때는 ‘내가 정말 배우가 될 수 있을까? 어쩌면 너무 쉽게 생각했던 걸까?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 같아요. 항상 의문형이었죠.” 하지만 27살 설인아에게 연기는 물음표가 아닌 느낌표다. “누군가는 제가 그저 운이 좋았다고 생각할지도 몰라요. 하지만 저는 알잖아요. 저는 제가 걸어온 길에 자부심을 느껴요.” 이제는 37살의 자신을 상상해본다. “한국을 빛내는 세계적인 배우가 되고 싶어요. 원래 꿈은 원대해야 한다고 하잖아요.” 쑥스러운 듯 던진 말에서 진심이 묻어났다. 이 배우의 미래는 확신에 가닿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