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싱타는 여자들>의 봄 || 하퍼스 바자 코리아 (Harper's BAZAAR Korea)
Lifestyle

<미싱타는 여자들>의 봄

누군가의 부인으로 어머니로 이름과 직책 없이 살아온 여성들. 그들의 이름과 얼굴 그리고 이야기.

BAZAAR BY BAZAAR 2022.05.07
 
싱글 재킷, 베스트는 Cos.

싱글 재킷, 베스트는 Cos.

이제는 나를 위해 시간을 쓰고 돈을 써요. 10대부터 지금까지 돌아보면 어느 한 순간 제대로 살지 않은 적이 없네요. 그건 참 기분 좋은 일이에요.

신순애 69세

“시골에서 별명이 ‘지지 껍데기’였어요.”
제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는 이미 아픈 상태였어요. 남원에서 3·1 독립만세운동이 있었을 때 무서워서 산으로 들어갔고 배가 고파서 아무거나 먹다가 그대로 위장병을 앓게 되신 거죠. 또 뭐가 문제였냐면 그 당시에는 상속 개념이 제대로 없었어요. 증조할아버지 땅에서 대대로 농사를 짓고 살았는데 식민지가 되면서 논을 다 빼앗겼대요. 그래서 학교 갈 엄두도 못 내고 포기했어요. 그나마 시골 살 때는 좋은 쌀밥을 못 먹어서 그렇지 고구마도 있고 정 배고프면 남의 밭에 가서 무라도 뽑아 먹었거든요. 삼베 짤 때 쓰는 삼 껍데기를 확 벗기면 한 3미터가 나와요. 그걸 ‘지지 껍데기’라고 하는데 제가 그 별명으로 불릴 정도로 키만 건장했어요. 열 두 살 때 가족이랑 다 같이 서울에 오고 평화시장에 들어가고 나서는 키가 1밀리도 안 컸어요. 한창 성장기에 못 먹고 계속 웅크리고 있어서요. 중랑구 뚝방 판자촌에 살았는데 그 앞에 한독약품이라는 회사가 있었어요. 거긴 최소 중학교라도 나와야 뭘 할 수 있었어요. 평화시장은 그런 거 묻지 않고 취직할 수 있는 곳이니까 저 같은 어린애들이 모여들었어요.
 
“부평 가면 손가락이 가마니로 하나씩 나와!”
가방 하나도 나한테는 사치라 보자기에 도시락을 싸서 다녔어요. 차비 10원 아낀다고 두 시간 동안 걸어서 출근했는데 넘어지기라도 하면 보자기에 싸인 도시락이 다 망가져 하루 종일 밥을 굶을 때도 있었죠. 천장이 엄청 낮은 다락방에 무릎 꿇고 앉아 다리미질을 14시간씩도 하고. 그래도 첫 월급 받았던 날이 선명하게 기억나요. 700원. 쌀 사고 연탄 사는 데 보탰어요. 저를 위해서는 10원 한 장 안 썼어요. ‘까만 밥알’이라고 부를 정도로 한여름 빼고는 울로 된 까만 옷가지 하나로 버텼어요. 힘들긴 다 마찬가지였으니까요. 형제 중에 손가락이 남아난 사람이 없었어요. 오빠는 인쇄일 하면서 잘리고, 언니는 가구공장 다니면서 세 개가 잘렸어요. 살려고 일해야 하는데 죽으려고 일하는 것 같은 시간이었어요.  “열세 살인 나는 10원을,  스물두 살 학생은 5원을.”    
옷에 달린 라벨 뒤에 번호를 써요. 옷이 조금 잘못되면 다시 고쳐야 하는데 그럴 때 누가 했는지 모르니까. 옷이 하루에 수백 개씩 쏟아지니까 자기들 편하려고 그렇게 번호를 달았어요. 그래도 집에서는 “막내야, 순애야” 이렇게 불리는데 공장에서는 ‘7번 시다’라고 불렀어요. 사창가 가면 번호로 부르는데 꼭 그런 것처럼. 처음으로 불공평하다고 느낀 건 차비 때문이었어요. 돈 아까워서 타지도 않는 버스를 가끔 타면 저보다 훨씬 큰 어른들이 반값 짜리 회수권을 내요. 남자는 군대도 다녀오니까 20대가 돼도 그렇게 다녔어요. 처음에는 노조에서 만든 교실에서 열심히 공부했어요. 음악이랑 미술을 배우는 건 노는 것 같아서 국어랑 사회만 했어요.(웃음) 그러다 불합리함에 눈뜨고 노조 활동도 열심히 했죠. 일하는 시간을 줄이고 부당한 임금이나 처우 개선을 다 이뤄냈어요. 우리가 ‘공순이’지만 함께하면 못할 게 없다고 느껴졌어요. 그런데 정부가 강제로 노조를 해산시켜요. 그 뒤로는 공장 일을 할 수가 없었죠.
 
“남자랑 자면 임신한다는데 나는 왜 안 돼?
청계에서 만난 사람이랑 결혼해서 계속 미싱 일을 했어요. 나중에는 집 한편에다 미싱 놓고 돌리는데 이렇게는 도저히 애들 대학을 못 보낼 것 같은 거예요. 과감히 팔아버렸어요. 그러고 김밥 장사를 시작했어요. 어느 날은 초등학교 1학년 된 딸이 가게에 오더니 큰 소리로 “엄마 엄마, 남자랑 자면 임신한다고 들었는데 나는 왜 안 돼?”라는 거예요. 가게 밖으로 데리고 나가서 누구냐고 물어봤더니 천진난만하게 “아빠!”라고 하더라고요. 헛웃음이 나오면서 딸 둘 키우는 엄마가 이렇게 무지하게 키웠구나 반성했어요. 그때부터 성교육 센터를 찾아가 저부터 성교육을 제대로 받았어요. 그때 배운 지식으로 봉사를 다니고 나중에는 청소년 인권센터 소장까지 지냈어요. 30대는 엄마 역할, 아내 역할, 며느리 역할 하느라 최선을 다했고 40대에는 장관 상을 받을 정도로 봉사에 최선을 다했어요. 50대는 공부에 올인했고요.
 
“아주머니는 이런 데 들어오시면 안 됩니다.”  
학사는 사회학이랑 정치학, 석사는 경제학을 했어요. 학교가 시험 기간이 아닐 때는 학생들 외에도 들어올 수 있도록 개방을 하거든요. 그럼 동네 분들이 와서 산책을 해요. 어느 날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있는데 경비 아저씨가 오시더니 시험 기간에는 아무나 들어오면 안 된대요. 학생이라고 말했는데도 다음 날에 또 똑같은 소리를.(웃음) 화를 낼까 하다가 오히려 음료수를 들고 가서 확실히 말씀드렸어요. 그 다음부터는 “공부 열심히 하시네요.” 이런 인사를 주고받았죠. 과 학생들이 이모, 선생님, 어머니라고 불러서 제 호칭에 대한 토론도 있었어요. 결국 ‘왕언니’로 통일했어요.(웃음) 이런 것도 다 웃을 수 있는 에피소드죠. 나이 들어도 공부할 수 있다는 게 참 좋더라고요. 운동도 열심히 하고 있어요. 미싱하면서 척추가 다 망가졌거든요. 청소년 관련된 일을 더 하고 싶었는데 거기까지는 체력이 안 되더라고요. 그래도 좋은 인권 연구소가 잘 끌어주고 있으니까 나는 주변 사람들한테 후원하라고 소개도 시켜주고 이렇게 뒤에 있는 거죠. 이제는 나를 위해 시간을 쓰고 돈을 써요. 10대부터 지금까지 돌아보면 어느 한 순간 제대로 살지 않은 적이 없네요. 그건 참 기분 좋은 일이에요.
 
원피스는 Cos.

원피스는 Cos.

이숙희 70세

실향민의 딸
저는 인천에서 태어났고 어머니 아버지 모두 실향민이셨습니다. 아버지 사업이 실패하고 서울에 올라와 처음에는 명동에 살다 사정이 더 나빠져 신당동으로 이사했어요. 경제 활동을 못하는 아버지를 대신해 어머니는 시장에서 노점을 하셨는데 어린 저는 그게 부끄러웠어요. 아래 여동생이 둘 있었고 바로 밑의 아이와 10살이나 차이 나서 내가 이러고 있으면 안 되는구나 싶었어요. 초등학교 졸업하자마자 명동 양장점에 들어갔어요. 한 명의 미싱사한테 위 제자, 중간 제자, 밑 제자, 시다가 세 명 붙는데 일도 친절하게 가르쳐주는 게 아니라 한번 보고 그대로 해야 되는 거예요.  나중에 알고 보니 그렇게 3년을 해야 한 단계가 올라가더라고요. 이래서 언제 돈을 버나? 열여섯에 평화시장에 들어갔어요. 일 년이면 일도 다 배우고 돈도 벌 수 있다고 했어요.
 
육중한 문 안의 차별
외벽이 타일로 바뀌긴 했지만 지금 있는 건물 그대로예요. 처음 평화시장 건물 앞에 섰을 때 무척 커서 ‘와, 여기는 노동조합이 있을 거야.’라는 생각을 했어요. 초등학교 사회 시간에 선생님이 조합의 종류에 대해 가르치면서 노동조합이 있다고 말씀하셨거든요. 1층은 전부 옷가게이고 2층이 공장이었는데 복도가 쭉 이어져 있고 어두침침했어요. 양쪽으로 난 공장의 무거운 미닫이 문을 밀고 들어가면서 퍼뜩 이런 생각이 들었죠. ‘어? 이거 내가 생각했던 거랑 다르네.’ 그렇지만 일 년이면 된다고, 그러니까 하자고 들어갔습니다. 많은 재단사가 시다에게 함부로 했어요. 옷은 조각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재단사가 잘라서 일감을 나눠줘요. 그걸 받을 때 작은 조각을 잃어버리기라도 하면 욕이나 손찌검을 했어요. 재단사에게 잘 보이는 미싱사들에게는 일하기 편한 일감을 주고 아니면 더 궂은 일을 맡아야 했지요. 저는 그런 일들이 싫었지만 말이 없는 편이었어요. 노동조합을 만나기 전까지는요.
 
빵과 우유
전태일 씨가 돌아가셨을 때 “사람이 하나 죽었대”라기에 그런가 보다 했어요. 사장님들이 “깡패가 일하기 싫어서 자살한 거야. 폐병에 걸렸는데 치료가 안 돼서 죽었어.”라고 얘기하니까 믿었어요. 그때는 사장이나 공장장이 말하면 당연히 믿는 분위기가 있었습니다. 노동조합이 만들어지고 나서 깡패들이 만들었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어릴 때 학교에서 배운 말과는 달랐죠. 왜 나쁜 사람들이라고 욕을 하지? 잊고 살았던 것들이 한 순간 떠올랐어요. 빵이랑 우유를 준대서 기웃거리다가(웃음) 등산도 가고 야간 종합과정으로 공부도 배울 수 있다기에 노조에 가입해야겠다고 결심을 굳혔어요. 접수를 하러 평화시장 옥상까지는 올라갔는데 문 앞까지 고작 몇 걸음이 안 떼어지는 거예요. 일 잘한다고 우리 집 며느릿감이라고 창찬을 하던 사장님이 월급을 올려달라고 하자 깡통 차고 거지 되기 싫으면 주는 대로 받으라고 폭언해서 일을 그만둔 적도 있었어요. 망설여지기도 했지만 큰 뜻보다는 필요에 의해서 드디어 그 문을 열었습니다.  
 
청계피복노동조합원 이숙희
1980년까지 노조 활동을 했어요. 그때 당시 평화시장은 사장이 갯공으로 옷별로 돈을 매겨줬어요. 그 안에 시다 임금까지 들어있어서 시다들은 미싱사에게 돈을 받아야만 하는 거죠. 노동조합을 하면서 잘못된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 시다임금직불제 싸움을 시작했고 승리했어요. 그리고 나서 노동교실을 만들었는데 개관식을 하자마자 강제로 문을 닫게 됐어요. 상가 대표와 근로감독관청에 편지도 써보고 점심 시간마다 상가를 돌며 노동교실을 돌려달라고 구호도 외쳤지만 잘 안 됐어요. 결국 옥상에서 농성을 하고 교실을 되찾게 됩니다. 몇 년 동안 노동자들이 모여 공부도 하고 많은 시간을 보낸 곳이었는데 전태일 씨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의 구속에 항의했다는 이유로 교실은 폐쇄되고 저는 실형을 받았습니다.
 
학업의 꿈
초등학교밖에 안 나왔지만 나름 공부도 잘하고 교회도 열심히 다녔었어요. 성경암송대회에서 1등도 해보고 여름성경학교에 가 아침부터 밤까지 활동할 정도로 열정적이었죠. 기자가 되거나 선생님이 되는 게 꿈이었는데 학교를 못 다녀서 진작에 포기했어요. 그렇지만 공장에 다니면서 학벌로 직업을 갖는 사람들도 있지만 우리 같은 사람들도 있다는 거, 우리 같은 직업이 있어야만 세상이 돌아간다는 걸 알고 나서는 학벌에 연연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하고 싶은 공부를 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가치가 있다는 걸 노동교실에 다니면서 깊이 깨닫게 되었죠.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리고도 생활을 위해 계속 미싱일을 하다 09학번으로 한신대학교 사회학과에 들어갔어요. 졸업하고 대학원에 들어갈 생각을 한 게 60살 정도인데 학비가 모자라서.(웃음) 여전히 공부가 필요하면 더 늦은 나이에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미싱타는 여자들
김정영 감독님과는 서울시에서 하는 봉제역사관 인터뷰를 하러 오시면서 연을 맺었어요. 이후에 인터뷰 때 한 이야기를 바탕으로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하셨고요. 처음에는 망설였어요. 우리의 무거운 이야기가 잘 그려질 수 있을까? 하지만 우리는 어리고 힘없이 주변인들의 돌봄을 받아야 했던 존재에서 노동하는 자아에 눈뜨고 주도적인 삶을 살려고 나아가는 사람들이었어요. 저뿐만 아니라 정말 많은 여성들이 그러했기 때문에 지워진 사람들을 대신해서 제가 이야기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 거죠. 시사회에서 영화를 본 다음 안심했어요. 힘들고 우울한 이야기만으로 그려지지 않고 그때도 지금도 나름의 위치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우리의 삶을 제대로 그린 게 보였거든요. 청계피복노동조합뿐 아니라 1970년대 여성 노동자들의 현실을 요즘 사람들이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는 결과물이 된 것 같아 뿌듯했어요.
 
‘우리’의 변화
혹시라도 우리의 이야기를 보고 듣고 40~50년 전에 이런 일이 있었는데도 세상이 많이 안 바뀌었다고 생각할까봐 조금 걱정이 되기도 해요. 그럼에도 노동이라는 얘기를 자연스럽게 입 밖으로 말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고, 또 여러 노동조합이 생기고 제도들도 조금씩은 변해왔어요. 작지만 서서히 변한 것이 지금까지 여러 외침과 활동에서 있었기에 한데 모여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닐까요? 요즘은 너무 뛰어난 개성시대라 ‘우리’보다는 ‘나’ 위주잖아요. 그 오래전 또래 여성들이 모여 알게 된 건 작은 하나라도 바꾸려면 ‘내’가 아니라 ‘우리’를 만들어 같이 가야 된다는 것.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거라고 말하고 싶어요.
 
재킷,과 튜브 톱은 Zara.

재킷,과 튜브 톱은 Zara.

세월이 지나도 좋은 부모 만난 사람들이 더 지름길로 가는 건 변하지 않은 것 같아요. ‘개천에서 용 나는’  게 더 어려워지는 것 같고요. 그래도요, 자신을 잃지 마세요. 아직 할 것들이, 해봐야 될 게 너무 많아요.

임미경 61세

미경, 태어나다
자두랑 능금이랑 앵두밭이 펼쳐진 세검정에서 1남 7녀의 막내딸로 태어났어요. 물난리가 나면 텔레비전이랑 냉장고, 돼지들까지 떠내려오던 기억이 나요. 어머니는 일찍 돌아가셨고 언니 세 명은 결혼해서 바로 위 언니들 두 명과 오빠, 아빠랑 살았어요. 다섯째 언니는 살림을 도맡아 했어요. 형편이 어려운 건 아니었는데 아버지는 아들은 공부시키고 딸들은 결혼하거나 돈을 벌어야 한다고 생각하셨던 거죠. 저는 막내라 그런 거 상관 안 하고 어린 시절을 보냈어요. 욕심이 많아서 달리기를 하면 달리기 1등을 해야 하고 글짓기를 하면 그것도 꼭 1등 받아야 하고. 반공 방첩에 대한 그림을 그려도 꼭 1등을 했어요. 엄마가 안 계시니까 〈엄마 찾아 삼만리〉를 읽고 나서 작가가 되고 싶었어요. 〈죄와 벌〉부터 탐정소설까지 닥치는 대로 많이 읽었어요. 공부도 꽤 잘해서 큰 걱정 없는 유년 시절을 보냈다고 할 수 있어요.
 
10대, 이른 노동자가 되다
호시절도 초등학교를 졸업하자 끝났어요.(웃음) 옆집 언니가 기술을 배우러 평화시장에 다녔는데 미싱을 타려면 시다가 필요했던 모양이에요. 우리 아버지를 ‘꼬셔’ 가지고 저를 평화시장으로 데려갔어요. 조금 원망스럽긴 해요. 엄마가 계셨으면 계속 공부하라고 하지 않았을까? 형편이 어려운 것도 아닌데. 아빠가 홀아비라 애들을 어떻게 키워야 하는지 몰랐던 것 같아요. 그렇게 얼떨결에 공장에서 일을 시작했어요. 옷 하나가 완성되려면 수많은 천 조각을 붙여야 하는데 당시 미싱사들은 정말 끝내주는 기술자였어요. 어떤 천을 갖다 줘도 뭐든지 척척 만들었어요. 숙녀복, 아동복, 청바지, 티셔츠. 어른 옷은 스몰, 미디엄, 라지 이렇게 몇 단계로, 아동복은 3세부터 12세까지 여섯 단계인가를 오차도 없이 만들어냈죠. 저는 견습공이라 적어도 계절별로 세 번씩은 만드는 과정을 도와야 옷을 맡아서 만들 수 있었어요. 정말 힘들었지요. 잠도 못 자고 종일 일하느라 늘 수면부족에 시달렸어요. 다림질하다 손이 타들어가도 모르도록 일했고요. 자고 싶어서 도망친 적도 있어요. 단지 자고 싶어서 그냥 뛰쳐나갔어요.(웃음) 무엇보다 속상했던 건 교복 입고 학교 가야 할 나이에 내 또래 아이들 옷을 만들고 있는 상황이었죠. 공장으로 출근하는 우리는 그 앳된 얼굴로 편한 옷에 도시락 가방 메고 일반 요금을 내고 버스를 타고 다녔어요. 단지 교복을 안 입고 사복을 입었다는 이유로요. 여름에 선풍기를 틀면 한두 시간 만에 날개가 안 돌아갈 정도로 먼지가 많던 그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어요. 그래도 거기서 좋은 동료들을 만났어요. 우리에게도 태양은 매일 똑같이 떠오른다고 해서 ‘태양클럽’이라고 이름도 지었고요. 동창도 없고 고향도 일찍 떠나온 비슷한 처지라 서로 힘이 많이 됐어요. 그리고 우리는 옷을 만드는 사람들이었잖아요. 곤색 마이랑 바지랑 세트로, 청카바에 청바지, 이렇게 맞춰 입고 다니는 걸 좋아했어요. 지금도 어디 가면 멋쟁이라는 소리 들을 정도로 옷에는 정통하죠.(웃음)
 
30대, 가정을 꾸리다
결국 미싱사까지는 못 됐어요. 이곳저곳에서 미싱 일을 하다가 평화시장을 떠나 언니가 하는 분식집 일을 도왔어요. 동료들이 맨날 찾아왔어요. 여자고 남자고 다들 오는데 그 중에 맨날 오는 남자가 하나 있었어요. 그렇게 얼굴을 익히다 그 사람이랑 결혼했죠. 같은 일을 했던 터라 청바지 공장을 했어요. 엎치락뒤치락 하면서 살았어요. 딸 하나, 아들 하나 낳아서 열심히 키웠어요. 그 아이들이 잘 커서 이번에 영화를 보고 많이 공감을 해주더라고요. 아들은 한없이 울고 딸은 “엄마가 가끔 얘기하던 조각들이 모여 퍼즐이 다 맞춰진 것 같았어.”라고 했어요. 제 삶에 항상 자신이 있었지만 이번에는 정말 ‘나 잘 살았다’ 싶었어요.        
 
50대, 중년을 누리다
제가 1등을 참 좋아하잖아요.(웃음) 뭘 시작하면 꼭 위를 찍고 내려오고 싶어요. 운동도 마스터하고 기타는 잘 배우다가 손을 수술하는 바람에 쉬고 있어요. 부동산 자격증도 따고 싶었는데 법대에 합격하면서 뒤로 미뤄놨어요. 학교는 졸업했는데 이걸로 이렇다 할 건 못하겠더라고요. 그래서 다시 사회복지학과를 다니면서 공부했어요. 지금은 전공을 살려서 어르신들 모시는 데이케어센터를 하고 있어요. 어릴 때 힘들고 창피한 기억들도 있지만 주눅 들지 않고 지금 나이가 되어도 여전히 새로운 걸 추구하고 있어요. 세월이 지나도 좋은 부모 만난 사람들이 더 지름길로 가는 건 변하지 않은 것 같아요. ‘개천에서 용 나는’ 게 더 어려워지는 거 같고요. 그래도요, 자신을 잃지 마세요. 아직 할 것들이, 해봐야 될 게 너무 많아요. 지금 하는 일도 정점에 올려야죠. 그러고 나면 또 다음이 올 거라고 지금도 믿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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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에디터/ 박의령
    사진/ 주영균
    사진/ 영화사 진진 제공
    스타일리스트/ 윤지빈
    어 & 메이크업/ 정지은
    어시스턴트/ 백세리
    디지털 디자인/ GRAFIKS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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