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사람'의 직업은 사실 서너개다 || 하퍼스 바자 코리아 (Harper's BAZAAR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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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사람'의 직업은 사실 서너개다

누군가의 부인으로 어머니로 이름과 직책 없이 살아온 여성들. 그들의 이름과 얼굴 그리고 이야기.

BAZAAR BY BAZAAR 2022.05.06
 
셔츠는 Cos.

셔츠는 Cos.

10년 동안을 수면제를 먹어도 못 잘 정도로 불면에 시달렸어요. 차차 치료가 되니 그래도 귀한 경험이었다 싶더라고요. 내 사업도 해보고 번 돈으로 주변 사람들 용돈도 주고 챙겨줄 수 있다는 게. 불법이거나 남한테 폐 끼치는 일 아니면 뭐든지 해보자. 그때 남은 교훈이에요.
 

인화정 65세

피천득의 〈청춘예찬〉
충남 여산 농촌에서 8남매 막내로 태어난 저는 저절로 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학교 갔다 오면 책가방부터 던지고 물에 풍덩 빠져서 하루 종일 놀았어요. 참외를 따다 다리 밑으로 먼저 던진 다음에 다이빙해서 그걸 주워 먹고 겨울에는 얼음 썰매를 타고요. 언니들이 돌봐주고 항상 예쁜 옷을 입혀줘서 어려움 없이 자랐어요. 무탈하고 무던하게 어린 시절을 보내다 고등학교 때 꿈이 생겼어요. 환경미화 때 담임 선생님이 족자에 피천득의 〈청춘예찬〉 한 부분을 써 걸어둔 걸 보고 그냥 미쳤어요. 너무 좋아서 뭔지도 모르고 해야겠다 생각했어요. 그렇게 한눈에 반한 서예를 배우려고 찾아봤는데 고향에는 마땅한 곳이 없더라고요.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서울에 있는 언니네 집으로 상경했어요.
 
집안일의 가치
서울에서 살려면 돈을 벌어야 해서 대우통신에 사무직으로 들어갔어요. 5년 넘게 낮에는 회사 다니고 저녁에는 학원을 다니며 서예를 배웠어요. 사무실에서 차 타는 건 여자들 담당이었는데 그게 내 할 일이라면 열심히 하자 싶었어요. 맛있는 결명자차를 사 보기도 하고. 그러다 스물일곱에 결혼을 했어요. 경제 관념도 없고 철도 없어서 버는 대로 다 썼어요. 결혼 자금이 없어서 오빠가 보태줬어요.(웃음) 언니네 살 때 조카랑 가족들의 행복한 모습을 보면서 은연 중에 그런 가정을 꾸리자는 결심을 했던 것 같아요. 가족이 나갈 때 배웅해주고 돌아올 때 환대해주고. 내가 희생한다는 억울함은 없었어요. 결혼 전에도 하고 싶은 걸 하고 살았고 결혼 후에도 완전하게 가족만을 위해 산 건 아니니까요. 집안일의 가치는 돈으로 환산할 수 있지만 대체할 수 없는 정신적인 안정감 같은 가치가 있다는 걸 깨달았죠.
 
내 인생의 황금기
아이들이 어느 정도 크고 나니 서예가 하고 싶어지더라고요. 30대 후반에 다시 붓을 잡았고 하다 보니 한문을 쓰고 싶은 욕심도 생겼어요. 우연히 신문 광고를 보고 성균관대학교에서 하는 고전연구반에 2년 동안 다녔어요. 일주일에 세 번, 네 시간씩 했어요. 아이들 학교 보내고 집안일 하면서 다닌 건데 하나도 안 힘들었어요. 내 인생에서 가장 좋은 추억을 떠올려보라고 하면 마흔한 살인 그때예요. 거실에서 TV를 치우고 열심히 글씨를 써내려가니 아이들도 알아서 책상 앞에 앉았어요. 어릴 때 느꼈던 그 아름다운 충격을 오랫동안 고스란히 품고 있었는데 뒤늦게라도 그걸 발산할 수 있게 되니 참 소중했던 것 같아요.
 
불면의 나날
아직 젊은 분들은 모를, 여자 인생에 아주 큰 시련이 있어요. 바로 갱년기인데 전 남들보다 좀 호되게 겪었어요. 딸이 대학생이고 아들이 수능 보는 날부터 갱년기가 왔어요. 아침에 도시락 잘 싸서 보냈는데 그날 저녁 갑자기 저녁 설거지가 하기 싫은 거예요. 50살, 그때를 기점으로 모든 게 풀어졌어요. 처음으로 햇반을 사고 주방을 폐쇄했어요. 서예도 귀찮을 정도로 몸과 정신이 피폐해졌어요. 보다 못한 딸이 마사지 숍에 보내줬는데 사람들이 막 모여 있고 너무 좋더라고요. 어쩌다보니 숍을 인수받았어요. 갱년기 우울증에 판단력도 흐려지고 제정신이 아니었던 거죠.(웃음) 힘든 상황에서 가게까지 꾸려나가느라 말이 아니었어요. 겉으로는 웃으면서 사람들을 응대해도 돌아서면 모든 게 불안하고 불만이었죠. 10년 동안을 수면제를 먹어도 못 잘 정도로 불면에 시달렸어요. 차차 치료가 되니 그래도 귀한 경험이었다 싶더라고요. 내 사업도 해보고 번 돈으로 주변 사람들 용돈도 주고 챙겨줄 수 있다는 게. 불법이거나 남한테 폐 끼치는 일 아니면 뭐든지 해보자. 그때 남은 교훈이에요.
 
“나더러 멋있대.”
요즘엔 캘리그래피를 배우러 다니는데 재미있는 일이 많아요. 같이 수업 듣는 어떤 분이 저랑 가까운 분한테 제가 어떤 사람인지 묻더래요. 그래서 서예 하는 사람이라고 했더니 “멋있던데요?”라고 말한 걸 전해들었어요. 너무 기분이 좋아가지고 “나더러 멋있대”라는 글씨를 쓰게 된 거예요. ‘예쁘다’보다도 멋있다는 말이 얼마나 좋아요. 단번에 ‘나보고’도 아닌 ‘나더러’라는 말이 나왔어요. 제가 생각해도 참 잘 나온 것 같아요.(웃음) 이번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나서 제가 쓴 글씨로 만든 엽서가 〈우리가 명함이 없지 일을 안 했냐〉에 들어가게 됐어요. 오랫동안 해온 서예가 이렇게 열매를 맺었어요. 두 가지를 썼는데 한번 보실래요? ‘말도 안 되게 설렘과 벅참이 찾아올 거예요 당신에게’ 그리고 ‘우리가 명함이 없지 놀았냐’!
 
니트 원피스는 Cos.

니트 원피스는 Cos.

장희자 63세

든든한 맏딸
위로 오빠가 있고 남동생이랑 여동생이 있는 5남매의 맏딸이었어요. 공주에서 아빠는 쌀장사를 하고 엄마는 도로 옆에서 차표랑 이것저것 파는 가게를 하셨어요. 너무 바쁘니까 일곱 살 때부터 동생들 기저귀 빨고 엄마 노릇을 했어요. 참 의젓하고 자기주도적인 어린이였죠.(웃음) 풍족하게 살다가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어요. 오빠는 오토바이 타고 놀러 다니고 대학을 가네 군대를 가네 이러는데 저는 동생들을 돌봐야 하니까 야간 고등학교 다니면서 돈을 벌었어요. 바쁜 와중에도 학교 가는 길에 빌려서 읽고 끝나고 집에 가는 길에 갖다 놓을 정도로 책을 좋아했어요. 선생님이라는 꿈도 가졌었는데….
 
운수회사 미스 장
야간 학교 다니면서 아주대학교에서 일했어요. 5년 넘게 일하면 학과장님 추천으로 행정실 정식 직원이 될 수 있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참 좋은 조건이죠. 그때는 고등학교 졸업하고 나니 막 어른이 된 것 같았어요. 근데 일하던 곳에서는 계속 애기 취급을 받으니까.(웃음) 지금도 있는 수원여객은 그때도 큰 회사였어요. 합격했더니 교수님이랑 과 과장님들이 사나운 곳이라고 가지 말라고 말리더라고요. 그런데도 덜컥 독립해버린 거죠. 운수 회사 여직원들은 안내원 아니면 회수권이나 토큰을 돈으로 바꾸는 수금 일을 했어요. 저는 사무실에서 일했는데 직원들은 버스비가 공짜라 점심 시간에 동료들을 집에 데리고 가 밥을 먹을 정도로 분위기가 좋았어요. 여직원이 대부분이었는데 높은 사람들은 전부 남자였어요. 어떤 언니는 능력이 있는데도 직책을 안 줬어요. 지금은 카페를 운영하면 사장님이지만 옛날에는 여자 혼자 가게를 차리면 마담이라고 생각했어요. 클래식 좋아하는 똑똑하고 능력 있는 언니였는데, 사회 인식 때문에 낮에는 회사 사원으로 일하고 저녁에는 카페를 열었어요. 또 여자는 결혼하면 무조건 그만두는 분위기라 저도 결혼하면서 회사를 그만두었죠.
 
베스트 드라이버
30대가 되고 얼마 안 있어서 운전면허를 땄어요. 안 믿겨질 수도 있겠지만 90년대 초에는 운전하는 여자가 별로 없었어요. 시댁이 화성에서 농사를 짓는데 집이랑 논이 멀었어요. 남편이 경운기로 운전해서 시부모님을 논에 데려다주고는 했어요. 남편 일이 바쁠 때는 제가 모셔야 하고 멀리 병원에도 가야 하니 면허를 따야겠다 싶었어요. 당신들 모시는 일인데도 어머니는 여자가 무슨 운전이냐고 걱정을 하셨어요. 차가 생기고 나니 자연스럽게 활동이 넓어지더라고요. 동생이 사진 현상소를 했는데 같이 해보지 않겠느냐고 해서 저는 운전을 맡아 영업이랑 배달을 했어요. 매일 무지무지 바빴어요. 아침에 큰애 학교 보내고 한 바퀴 돌고 작은 애 점심 챙겨주고 나와서 또 돌고 저녁이면 집에 가 집안일을 했어요. 그렇게 10년을 일해서 집안 살림에 보태 집도 넓히고 차도 사고 애들도 키웠죠.   
 
일등 요양보호사
제가 또 맏며느리지 않겠어요?(웃음) 제사가 네 번인데 시부모님 뿐 아니라 시아버님 형제분들까지 기본 20명은 오셨어요. 제사며 생일이며 수십 년을 하다 2000년대가 되니 연로하신 시부모님께서 아예 서울로 올라오셨어요. 같은 아파트 다른 동에 사셨는데 한 달에 두어 번 가던 병원을 90세가 되고부터는 투석을 하러 일주일에 세 번씩 가게 됐어요. 그러다 어머님이 아프면 또 어머님 모시고 이 병원 저 병원에 다니고요. 2년 전까지 그 생활을 했어요. 작년 7월부터는 친정어머니가 저희 집으로 들어오셨어요. 다친 곳이 잘 안 나아서 3차 수술까지 갔어요. 요즘도 병원에 왔다갔다하시는데 보호자 역할은 제 몫이죠. 안 힘들다면 거짓말이지만 저한테는 익숙한 일이에요. 맏딸에 맏며느리. 힘없는 어르신들을 모시고 제 존재가 도움이 되는 일이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아요.
 
성실한 여행 가이드
우리 신랑이 결혼할 무렵 저를 한 달 동안 쫓아다니면서 뭐가 제일 하고 싶냐 물었던 적이 있어요. 〈노트르담의 꼽추〉를 좋아해서 노트르담 성당도 보고 싶고 파리 뒷골목이랑 센 강변도 걸어보고 싶다고 얘기했었거든요. 아이들이 좀 크고 나서 그 꿈을 이뤘어요. 초등학생 남자애 두 명을 데리고 20일 동안 배낭여행을 했어요. 동생이 있는 스페인에 도착해서 시차 적응한 다음에 유레일 패스를 끊어 로마랑 파리, 독일을 둘러봤어요. 비행기도 처음인데 환승 때문에 골치 아팠던 기억이 나요. 환승을 해도 짐은 도착지에 간다는 걸 모르고 “My family 3 bags” 이러고.(웃음) 짧은 영어로 지도에 의지해서 다녀왔지만 그 여행이 제 인생에 큰 자신감을 불어넣어줬어요.
 
직책만 서너 개
〈경향신문〉과 명함 만들기 프로젝트를 하고 나서 많은 일이 일어났어요. 친구들이 유튜브 영상을 보고 “넌 원래 대단해. 몰랐어?”라고 하더라고요. 얼마 전 생일 모임에서는 육십여섯 먹은 오빠가 제게 너무 큰 짐을 지웠다며 절 끌어안고 울었어요. 평생 처음으로 사과와 인정을 받은 거예요. 명함에 적은 베스트 드라이버, 한식 요리사, 요양보호사가 돈을 받는 직장은 아니었지만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일을 하며 살아왔는지 명확히 확인할 수 있었고요. 그 촬영 때 오신 사진기자님이 엄마는 그냥 늘 그 자리에 있는 엄마라는 생각만 했는데 이번 기회에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괜스레 마음이 벅찼어요. 함께 있을 때 편안하고 자연스러운데 없을 때는 불편한. 마치 공기 같고 산소 같은 존재가 엄마나 아내일 수 있지만 우리에게도 우리 삶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챈다는 거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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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에디터/ 박의령
    사진/ 주영균
    사진/ 영화사 진진 제공
    스타일리스트/ 윤지빈
    헤어 & 메이크업/ 정지은
    어시스턴트/ 백세리
    디지털 디자인/ GRAFIKS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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