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본관에서 5월 22일까지 열리는 «권진규 탄생 100주년 기념-노실의 천사» 전시장에 들어서면 일주문처럼 보이는 나무 조각 〈입산〉(1964-65)과 역시 나무로 만든 〈보살입상〉(1955)이 가장 먼저 관람객을 맞는다. 일주문은 사찰에 들어서는 산문 중 첫 번째 문을 일컫는다. 보통 일반적 가옥이 네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지붕을 얹는 것과 달리 일주문은 일직선의 기둥 위에 지붕을 얹는 형식이다. 어머니가 신실한 불교 신자였던 권진규에게 불교적 세계관은 삶과 예술에 깊게 뿌리내려 있다. 공손히 두 손을 모아 지붕을 받치는 〈입산〉의 왼쪽 형상처럼 일심으로 진리를 구하듯 작품을 통해 영원성을 추구했고, 매일 아침과 밤에는 구상과 드로잉을 하고, 오전과 오후에는 작품을 제작하며 수행자처럼 살았다.
유족과 권진규기념사업회의 작품 기증(총 1백41점)을 통해 이뤄진 이번 전시는 이러한 불교적 세계관을 반영하여 입산(1947~1958), 수행(1959~1968), 피안(1969~1973)으로 작가의 예술 여정을 나누고 조각·회화·드로잉·아카이브 등 다채로운 작품 세계를 소개한다. 전시의 X축이 연대기적 구성이라면 Y축은 전시공간을 디자인한 방식이다. 1965년 신문회관에서 개최한 제1회 개인전에서 작가는 서울 성북구 동선동에 보존돼 있는 자신의 아틀리에를 삼공블록과 벽돌을 이용해 재현했다. 이에 착안해 이번 전시에는 아틀리에에 있는 우물과 가마가 같은 재료로 형상화되었다. 전시의 제목은 1972년 3월 3일 〈조선일보〉 연재 기사 ‘화가의 수상’에 실린 권진규의 시, ‘예술적 산보_노실의 천사를 작업하며 읊는 봄, 봄’에서 인용했다. 그의 시구 “진흙을 씌워서 나의 노실에 화장하면 그 어느 것은 회개승화하여 천사처럼 나타나는 실존을 나는 어루만진다”에서 노실은 가마나 가마가 있는 아틀리에를 의미한다. 따라서 ‘노실의 천사’는 그가 작업을 통해 궁극적으로 구현하고자 했던 이상, 즉 승화된 존재, 순수하게 정신적인 실체로 볼 수 있다.
〈도모〉, 1951년, 석고 25x17x23cm, 권경숙 기증, 서울시립미술관 소장.
박수근, 이중섭과 더불어 한국 근대미술 3대 거장으로 손꼽히는 권진규는 1922년 함경남도 함흥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앓은 늑막염으로 휴학하느라 춘천공립중학교를 늦깎이로 졸업한 후 도쿄의 니혼의과대학에 재학 중인 큰형 진원을 따라 일본으로 건너간 게 1940년 초다. 그때만 해도 권진규가 조각가의 꿈을 꾸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권진규의 조카이자 권진규기념사업회 이사장인 허경회 박사가 최근 펴낸 책 〈권진규〉(PKM북스)에서는 이 시절 형과 함께 간 음악회에서 “음을 양각으로 빚어낼 수는 없을까?”라는 의문을 품으며 조각과의 첫 인연을 시작했다고 증언한다. 1947년 권진규는 한국적 리얼리즘 미술을 창조한 것으로 평가받는 이쾌대의 성북회화연구소에 들어가지만 몸이 아픈 큰형 진원의 간호를 위해 다시 일본으로 밀항했다. 이듬해 형이 결국 눈을 감자 그는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한 사설(미술)연구소를 거친 후 1948년 무사시노미술학교 조각과에 입학했다. 당시 무사시노미술학교에는 프랑스 근대조각의 거장 앙투안 부르델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후 일본 근대구상조각의 계통과 전통을 세운 시미즈 다카시가 있었다. 권진규는 시미즈 다카시로부터 조각을 배우며 본격적으로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빚어나간다. 그리고 이곳에서 그의 첫 작품인 〈도모〉(1951)의 모델이자 훗날 아내가 되는 오기노 도모를 만난다. 이후 도모의 아파트로 들어가 영화 소품 제작 아르바이트와 작업을 병행했다. 1953년 일본 최고의 재야 단체 공모전인 니카전에서 〈기사〉 〈마두 A〉 〈마두 B〉를 출품해 특대의 상을 수상하고 1958년까지 거의 매해 입선하며 조각에 입문한 지 얼마 안 된 시기부터 작가로서 역랑을 인정받았다.
〈기사〉, 1953년경, 안산암, 65x64x31cm, 권경숙 기증, 서울시립미술관 소장.
권진규는 흔히 리얼리즘 조각가로 알려져 있으나 그가 추구했던 것은 사실적인 것도, 아름다운 것도 아닌, 결코 사라지지 않은 영혼, 영원성이었다. 그는 구상과 추상, 고대와 현대, 동양과 서양, 여성과 남성, 현세와 내세의 경계를 넘나들었고 종래에는 이를 무화하는 작품을 구현하고자 했다.
〈가사를 걸친 자소상〉, 1969-70년, 테라코타, 49x23x30cm, 고려대학교박물관 소장.
«권진규 탄생 100주년 기념-노실의 천사»에서는 이 시기의 작품인 〈도모〉와 〈기사〉를 만날 수 있다. 당시에는 모델을 구하는 게 쉽지 않았는데 같은 아틀리에에서 실기 수업을 받으며 알게 된 서양화과 학생 도모에게 모델을 부탁하고 석고, 테라코타, 시멘트 등으로 〈도모〉 연작을 제작하면서 둘의 교제가 시작되었다. 이후 8년여간 부부로 지내다 1959년 권진규는 집안 사정과 예술가로서의 욕구 때문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수행’의 시작이다. 언젠가 권진규는 자신의 한국행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무사시노의 스승이며, 로댕 정통을 그의 제자 부르델에게서 물려받은 시미즈 다카시 선생 아래서 8년 동안 수학하다가 탈바꿈의 내적 요청 때문에 귀국했습니다.” 스승 시미즈의 그늘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예술세계에 대한 바람으로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내면 갈등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국교 정상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이라 그는 도모와 함께 귀국할 수 없었다. 헤어지기 전 그들은 미뤘던 혼인신고를 하고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지만 그리 되지 못했다. 이번 전시에 소개된 〈도모〉(1951)는 권진규가 일본을 떠나며 도모에게 맡겼던 작품 중 하나로 2014년 여름 그녀가 세상을 떠날 때도 그녀 곁을 지켰다고 한다. 이후 권진규의 누이동생 경숙이 도모의 남편 집을 방문해 그에게서 도모가 간직해오던 권진규 작품 20여 점을 사 왔고 그 가운데 〈도모〉가 있었으며 작가의 첫 작품인지라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한 것이다.
〈불상〉, 1971년 3월, 나무, 45x24.2x17.5cm, 개인 소장.
‘수행’의 시기, 권진규는 동선동에 아틀리에를 손수 짓고 서울대, 홍익대 등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거나 재료를 사러 갈 때를 제외하고는 종일 아틀리에에서 생활하며 작업에 몰두했다. 쉴 때는 한 사람이 겨우 몸을 누일 아틀리에 옆 작은 방에서 작업의 근간이 되는 미술서적, 문학 등 다양한 영역의 독서에 열중했다. 이번 전시의 특기할 만한 점은 권진규의 소장 책 중 면밀히 살핀 흔적이 있는 도서와 여러 언어로 쓴 드로잉 북을 번역해 전시장에 비치한 것이다. 창작의 순간에 남긴 메모와 기록을 보다 생생하게 전달하기 위해 드로잉 북을 영인본으로 제작해 자유롭게 살펴볼 수 있도록 하기도 했다.
첫 작품 〈도모〉에서부터 권진규는 눈에 보이는 사물 너머 존재하는 본질을 응축해 조각으로 대상의 정수를 표현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동서양의 고대미술을 공부하며 적합한 재료를 찾았다. 이때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등지의 유적에서 발굴되기도 하는 점토를 구워 만드는 테라코타와 방부· 방습· 방충에 강한 건칠은 그가 추구한 원시성과 영원성을 표현하기에 더없이 알맞은 재료였다. 그는 말했다. “돌도 썩고 브론즈도 썩으나 고대의 부장품이었던 테라코타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잘 썩지 않습니다. 세계 최고의 테라코타는 1만 년 전의 것이 있지요. 작가로서 재미있다면 불장난에서 오는 우연성을 작품에서 기대할 수 있다는 점과 브론즈같이 결정적인 순간에 딴 사람(끝손질하는 기술자)에게로 가는 일이 없다는 점입니다.” 이번 전시에는 테라코타와 건칠 제작 과정을 상세히 소개하는 별도의 코너가 마련되어 있어 충실한 이해를 돕는다.
권진규 아틀리에 내부. (재)내셔널트러스트 문화유산기금
1965년에 권진규는 조각으로서는 우리나라 최초의 개인적으로 추정되는 «권진규 조각전»을, 1968년에는 일본 도쿄 니혼바시 화랑에서 «권진규전»을 개최했다. 이때 일본에는 우리나라 미술 교과서에 실려 대부분의 한국인이라면 알고 있을 〈지원의 얼굴〉(1967)을 출품했다. 한국과 일본의 반응은 다소 달랐다. 당시 한국 미술계는 미국 유학 출신 추상조각파가 대세였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이탈리아 대표 작가 자코모 만주와 비교되는 우호적 평가를 받는다. 〈요미우리신문〉에는 이런 글이 실렸다. “단순한 초상이 아니라 형태를 극단으로 단순화하여 얼굴 하나 속에 무서울 정도의 긴장감이 감돌고 있으며 중세 이전의 종교상을 보는 것과도 같은 극적인 감정이 고조되어 있다.” 권진규가 추구하는 예술관을 꿰뚫어본 평이었다. 작가는 일본에서 다시 작품 활동을 이어나가려 계획하지만 불발에 그쳤다.(전시회에서 8년여 만에 재회한 도모는 다른 사람과 재혼을 한 상황이었다). 어쩔 수 없이 한국에서 창작열을 불태워 나가지만 그의 구상조각에 대한 평가는 흡족할 만한 것이 아니었고 생활고에서도 벗어나지 못했다. 그는 그때의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예술가는 이해해주는 곳으로 가야 하나 봅니다. 될 수만 있다면 조국에 있고 싶습니다. 조국 화단의 몰이해로 창작 활동이 막다른 골목에 부딪쳤음을 깨달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때 권진규는 왕성하게 구상과 추상을 오가는 부조작품을 제작하기도 하며 동양과 서양, 구상과 추상, 주제, 재료, 기법 등에 있어서 어떤 제약도 없는 권진규만의 예술을 펼쳐나갔다.
이제 ‘피안’으로의 이행. 1970년 늦여름, 권진규는 범어사, 통도사, 해인사를 방문하고 1971년에는 한 달간 양산 통도사 수도암에서 머문다. 불상 제작에 몰두하던 시기라 할 수 있다. 1971년 3월에 제작한 〈불상〉은 〈금동보살반가사유상〉(삼국시대)의 머리 부분과 원주 출토 〈철조여래좌상〉(고려 초기)의 몸통 부분을 참조하여 제작했다. 사실상 불교도상학에서는 함께할 수 없는 보살과 여래가 공존하는 권진규만의 조합이다. 불상의 형식을 모르지 않았을 그이지만 작가는 이 불상을 통해 중생이 사는 번뇌로 가득한 현실세계와 청정한 초월의 세계가 맞닿아 있음을 표현한 듯하다. 〈십자가에 매달린 그리스도〉(1970)는 작가의 집 근처에 있던 부흥교회의 의뢰로 제작한 건칠 작품이다. 건칠은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불상 제작에 많이 사용된 전통 옻칠 기법으로 모시나 삼베를 심으로 하여 칠을 입혀 제작한다. 보통 표면을 매끈하게 마무리하는 기존의 건칠과 달리, 권진규는 삼베의 거친 느낌이 살아 있는 표면 처리로 예수 그리스도의 고뇌를 표현했다. 하지만 그에게 예수상을 의뢰했던 교회는 기묘한 모습의 그리스도, 다소 터프한 질감, 성화에서는 황금빛 원반으로 표현되는 후광을 대신한 수레바퀴를 보고 받기를 거절한 듯하다. 이에 작가는 작업실 벽면의 십자가를 떼고 두 팔 벌려 굽어 살피는 듯한 위치에 그리스도상을 걸어두었다.
«권진규 탄생 100주년 기념-노실의 천사» 전시 전경.
전시의 마지막 부분에는 누이동생 경숙과 조카인 허명회가 권진규의 생애를 증언하고 동선동 아틀리에를 소개하는 영상과 앞서 말한 아카이브가 공간을 채운다. 그 마지막 지점에는 1973년 5월 4일, 51세의 나이에 작가가 자신의 아틀리에에서 생을 마감하기 전 썼을 ‘인생은 공’이라는 글귀가 적힌 편지가 놓여 있다. 출구 지점에는 마지막 작품 〈가사를 걸친 자소상〉(1969-70)이 관람객을 배웅한다. 진흙색 가사를 걸친, 자신을 승려로 형상화한 작품이다. 이번 전시에 소개된 여러 점의 자소상과는 사뭇 다르게 평화로운 미소를 짓고 있다. 그 표정은 미혹과 번뇌의 세계에서 벗어나 자신이 일관되게 추구했던 본질을 꿰뚫는 깨달음의 세계로 건너갔다고 증언하는 듯하다.
안동선은 컨트리뷰팅 에디터다. 권진규의 작품이 차분한 긴장감을 자아내는 건 충일한 마음으로 수행자처럼 살았던 권진규의 삶이 그대로 담겨 있기 때문임을 확인하며 더욱 경외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