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너무 관대한 올라퍼 엘리아슨 || 하퍼스 바자 코리아 (Harper's BAZAAR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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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너무 관대한 올라퍼 엘리아슨

올라퍼 엘리아슨의 작업은 언제나 미술 초심자의 마음을 되찾아준다. 좋은 예술은 세계를 보여주지만, 더 좋은 예술은 세계가 나를 바라보게 한다.

BAZAAR BY BAZAAR 2022.03.14
 
올라퍼 엘리아슨(b. 1967), 〈우주 먼지입자〉, 2014년. 스테인리스강, 반투명 거울 필터 유리, 강철줄, 전동기, 조사등, 직경 170cm. 테이트미술관 소장. 니콜라스 세로타 경을 기리며 작가가 2018년 기증.

올라퍼 엘리아슨(b. 1967), 〈우주 먼지입자〉, 2014년. 스테인리스강, 반투명 거울 필터 유리, 강철줄, 전동기, 조사등, 직경 170cm. 테이트미술관 소장. 니콜라스 세로타 경을 기리며 작가가 2018년 기증.

호황기의 미술시장 한가운데 있다 보니, 왜 컬렉팅을 하지 않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 그때마다 나는 틸다 스윈턴의 아마추어리즘을 예로 든다. “데릭 저먼과의 작업으로 처음 영화를 접했는데, 이 유사 가족 관계가 나를 완전히 망쳐놓았죠. 지금도 작품 선정할 때의 기준은 작품이 아니라 함께하는 사람들입니다.” 미술을 대하는 나의 태도 역시 그녀와 비슷해서, 미술을 돈으로 환산하는 데 도통 재주가 없다. 미술품의 가치와 돈의 가치 사이에 선뜻 등호를 대지 못하는 것이다. 언젠가부터 내게는 미술이 세상을 관찰하는 방식이고, 관계를 고찰하는 통로이며, 사유를 경험하는 방도다. 미술을 모르고 살던 때보다 조금은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있다고 믿는 나로서는 그 경험에 값을 매기기가 힘들다. 이런 증상은 가치들 사이에 절대적 등식 이전에 복잡다양한 요소가 존재함을, 이를 즐기는 법을 일깨운 몇몇 예술가 덕분인데, 얼마 전 나는 북서울미술관의 «빛: 영국 테이트미술관 특별전» 전시장에서 그 한 명과 재회했다. “성공이란 가능성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경험하는 것”임을 알려준 올라퍼 엘리아슨이다.
엘리아슨은 예술의 이름으로 모든 걸 실행하는 예술가다. 태양, 무지개, 폭포, 별 등 유사자연 현상을 전시 공간에서 구현하고, 도심에 오래된 빙하를 갖다 놓고, 바다와 강에 녹색 물감을 풀고, 양을 키우고, 설산 꼭대기에 대규모 조각을 세우고, 코펜하겐 운하에 보행자와 자전거를 위한 이동식 다리를 짓고, 유명 가구 브랜드의 조명을 만들며, 아프리카 사람들을 위한 태양열 조명을 개발, 판매한다. 각국의 지도자들을 만나고, 다보스 경제포럼의 ‘세상을 변화시키는 예술가’ 상을 받고, 아트스쿨을 운영하며, 난민들과 교류하는 예술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스튜디오의 레시피와 주방 문화를 담은 쿡북을 출간하는 것 역시 그의 일이다. 이런 전방위적 활동은 철학, 수학, 과학, 건축, 자연, 경제, 정치 등 세계를 구성하는 모든 분야를 관통하는데, 그가 움직일 때마다 예술의 영역은 비약적으로 확장한다. 엘리아슨은 내가 아는 한 예술 바깥 세계에 가장 관심 많은 동시에 미술을 접하고 작품을 본다는 원천적 의미를 명확히 짚어내는 작가다.
이 미술가는 종종 야심 찬 사업가 혹은 진지한 행동주의자라고 평가받는다. 썩 틀린 얘기도 아니지만, 오히려 내게 그는 세상이 산산조각 나는 순간까지 예술의 힘을 믿을 이상주의자에 가깝다. 2016년 리움에서의 개인전 인터뷰 때, 그가 해준 말은 여전히 기억에 남아 있다. “어떤 전시를 준비할 때, 당신의 인생에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왜 전시장에 오려고 했는지를 생각합니다. 내게 전시는 집과 사람들의 삶에서 시작해요.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이야기를 한 보따리씩 들고 옵니다. 내 전시는 당신의 이야기를 반영하고, 나는 곧 당신을 바라보죠.” 건축학자, 공학자, 수학자, 디자이너, 공예가 등 1백여 명에 이르는 타 분야 전문가들과 함께 ‘더 좋은 세상’이라는 순진무구한 공동의 목표 아래 함께 실험실 같은 스튜디오, 궁극의 협업체인 예술 공동체를 꾸릴 수 있는 이유도 이와 다르지 않다.
물론 올라퍼 엘리아슨은 예술 밖 세계에 관심 많은 예술가이지 예술의 효능을 맹신하는 정치인이 아니다. 그의 가장 중요한 동력은 나와 당신, 우리와 세계의 본질을 들여다보는 철학적 시선이다. 그는 이를 ‘아이디어’라고 일컫는다. 무의식 중에, 감각 안에 녹아 있는 아이디어를 현실화하고, 인간 외 모든 사물들의 존재감을 활성화시키는 것이 본인 역할이라 믿는다. “저는 자연을 인간 삶의 일부로 여기는 곳에서 자랐습니다. 어느 날 부모님은 내가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보고 말씀하셨죠. 네가 지구를 조금씩 밀어내고 있구나…. 그때 깨달았어요. 그림 그리는 이 작은 행위가 나의 주변에, 세상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걸요.” 존재함의 감각을 인정한다는 것, 미세하게 진동하며 변화하는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의지가 엿보이는 이 시적인 말은 어떤 메시지보다 강력하게 나를 끌어당겼다.  이번에 선보이는 작품 〈노랑 대 보라〉(2003)와 〈우주 먼지입자〉(2014)는 엘리아슨이라는 예술가를 행위 하게 만드는 동기에 대한 이야기다. 덴마크왕립미술원 시절부터 그는 인간 인지의 역사를 만들어온 빛과 색의 예술적, 과학적, 심리적 지점을 탐구했고, “보는 것이 감정에 힘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이 보는 것을 결정할 수 있다”는 진리를 발굴했다. 빛과 색의 일시성을 인정하고, 현재성을 존중하며, 무한성에 찬사를 보내는 그만의 방법이 아니었나 싶다. 어쨌든 비물질적 요소들은 그의 추상예술 세계의 핵심이지만, 그는 자기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보다 관객이 경험하는 감정, 사유를 더 중히 여긴다. 빛, 색, 그림자와 움직임이 공간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관객의 어떤 감정에 무슨 영향을 미치는지 등 작가의 궁금증은 인류애적 호기심으로 읽힌다. “직관, 직감, 육감 같은 아이디어를 좋아합니다. 몸에서 느껴지는 느낌이죠. 그건 기하학과도 닿아 있습니다. 기하학은 수를 세는 데 쓰는 학문이 아니라 지구와 가까워지는 학문이에요. ‘지오메트리’의 어원은 걷는 속도와 관련 있습니다. 걸어 다니는 명상 상태라 할 수 있죠.”
강철 골조 다면체가 유리 다면체를 감싼 듯한 기하학적 조형물 〈우주 먼지입자〉는 빛과 그림자, 현실과 환영의 스펙터클한 풍경을 통해 전시장 환경을 시시각각 바꾼다. 이 작품의 천천한 움직임은 진동한다, 공명한다 혹은 어떤 여정 중에 있다는 느낌에 더 가깝다. 엘리아슨의 모든 작업은 각종 움직임을 내포하고 있다. 실제로 움직이기도 하거니와, 감정적 내러티브를 야기하기도 하고 사회적 변화를 이끌기도 하는데, 특히 이 작품은 단순한 물리적 움직임을 통해 보는 이의 심리적 움직임을 야기한다. 흥미로운 건 기하학자 겸 건축가와 협업해 만든 난해한 구조, 우주의 먼지를 무한정 확대한 듯한 크기, 벽을 장식하는 화려한 그림자, 자연히 연상되는 지구 혹은 행성 등 이 모든 것이 ‘먼지입자’라는 제목과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먼지라 치부하기에는 너무 의미심장한 세계, 다분한 의도가 엿보이는 이 불균형의 지점은 또 다른 사유의 움직임으로 이어진다. 우주를 구성하는 미미한 요소들의 중대함, 이 거대한 땅의 사소함, 먼지로 상징된 모든 사물들의 아름다움 등은 불확실성, 상대성, 유동성, 모호함으로 가득 찬 현실과 탈인간중심적 세계를 비춘다. 우주가 넓어질수록, 지구는 작아지는 법이니까.
“구 형태의 조각을 행성의 모델로 생각하길 좋아해요. 인류세를 향한 우리의 움직임 덕분에 인간의 교류가 행성의 관계로 변화한 사실이 흥미롭죠. 인류세란 인간을 둘러싼 환경과 생태계에 인류 활동이 미치는 영향에 대해 인지하는 겁니다. 우리는 더 이상 지구를 분리된 관점으로 보지 않아요. ‘외부는 없다’는 문장처럼요.”(〈designboom〉, 2015년 2월 16일.) 철학자 브뤼노 라투르의 말 “외부는 없다”는 우리가 불가피하게 세상에 휩쓸려 있고, 우리 행동은 결과를 초래한다는 의미다. 첨예한 기후 문제나 사회 문제를 떠올려 보라. 우리는 구 형태의 조각을 보고 있지만, 늘 그 안에 있는 것이다. “구를 본다는 건 세상을 바라보는 것임인 동시에 당신 자신을 바라보는 겁니다.” 우리는 〈우주 먼지입자〉를 경험하고, 〈우주 먼지입자〉는 우리를 경험하는데, 이 과정에서 대화가 생겨난다. 〈우주 먼지입자〉는 생기 있게 반짝이고, 숨 쉬며 현재를 산다. 진정성이 말하는 게 아니라 듣는 데서, 주장이 아니라 포용에서 시작된다면, 세상을 구성하는 원자의 진동까지 들으려 애쓰는 예술가의 진상을 의심할 이유가 없다.
서구의 옛 철학자들은 예술을 두려워했다. 자신들을 수동적 존재로 느끼게 하는 예술을, 자신 안의 의도치 않은 낯선 움직임을 도무지 긍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시절은 변했다. 엘리아슨의 예술은 가장 진보한 역할을 수행한다. 감각을 자극하고 감정적 내러티브를 깨움으로써 시간, 공간, 사회, 문화 그리고 지구에서 자기 존재를 자각하도록 만든다. 머리로 얻는 지식과 몸으로 얻는 지식을 결합할 때, 모든 개인은 비로소 강력한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일종의 ‘에이전시’가 된다고, 작가는 믿는다. 좋은 예술은 세계를 보도록 하지만, 더 좋은 예술은 세계가 나를 바라보게 한다. 그래서 그는 무언가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격려’한다. 미술에서 반드시 무언가를 찾을 필요가 없다고, 작품을 함께 보면서 불안정성을 느끼는 게 비폭력적이고 내향적인 공존의 길이라고, 그러니 관심을 내면으로 돌려보라고 격려한다. “내 전시를 보러 오라고 하지 않고, 내 전시에서 자신을 바라보라고 권하고 싶다”고 말하던 미술가의 작업 앞에서, 실로 오랜만에 예술로부터 환대받는 기분, 지금 가장 절실한 상태에 닿았다. 요즘 미술은 훌륭한 투자의 수단이지만, 내게 미술은 긍휼의 마음을 내보이면서도 대가를 바란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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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글/ 윤혜정(국제갤러리 이사, <나의 사적인 예술가들> 저자)
    에디터/ 손안나
    사진/ 서울시립미술관
    디자인/ GRAFIKS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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