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실에서. 벽에 걸린 그림은 미카엘라 아이히발트(Michaela Eichwald)의 작품. 드레스는 Roksanda. 가죽 샌들은 Salvatore Ferragamo. 화보에 등장한 나머지 다른 룩은 모두 나폴레오네 제작 아이템.
빅토리아풍의 붉은 벽돌로 지어진 타운하우스. 건물의 외관만 보고 켄싱턴 광장의 여느 집들과 비슷할 거라 짐작하겠지만, 굉장히 빗나간 예측이다. 발레리아 나폴레오네(Valeria Napoleone)의 집 로비에 들어서자 여성 아티스트들의 조각품과 그림, 태피스트리로 큐레이팅된 환상적인 원더랜드가 펼쳐졌다. 복도 오른쪽에 자리한 앤시아 해밀턴(Anthea Hamilton)의 거대한 작품 〈Transposed Lime Butterfly〉는 금방이라도 날갯짓을 할 듯 생생하다. 왼쪽 벽은 실케 오토 냅(Silke Otto Knapp)의 모노크로매틱 수채화가 차지했고, 또 바닥엔 유디트 호프(Judith Hopf)의 기다란 철제 혀 조각품과 실비 플뢰리(Sylvie Fleury)의 부드러운 황금빛 우주선이 나란히 진열되어 있다. “아티스트들은 늘 새로운 세계의 문을 열어주죠. 삶을 다른 각도에서 볼 수 있게 해줍니다.” 이탈리아 태생의 큐레이터이자 후원자인 나폴레오네가 말한다. 그녀는 뉴욕 패션기술대학교(Fashion Institute of Technology)에서 갤러리 관리를 공부하던 1997년부터 작품 수집을 시작했다. 그녀는 당시를 “마침내 현대 여성 아티스트들이 존경받기 시작한 마법 같은 순간”이라고 묘사한다. 나폴레오네의 첫 수집품은 화가이자 포토그래퍼인 캐럴 셰드포드(Carol Shadford)의 비눗방울 흑백 사진이다. 1990년대, 진정한 ‘무인(無人)의 땅’이었던 뉴욕 윌리엄스버그에서 촬영한 작품으로, 멀리서 보면 비눗방울이 추상적으로 느껴지지만, 자세히 보면 여성의 실루엣이 드러난다. “정말 마음에 들어요. 저는 넘치는 재능이 성별이 다르다는 이유로 낭비되고 있는 걸 이해할 수 없었어요. 그때부터 오직 여성의 목소리를 담은 컬렉션만을 만들어야겠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했죠.”
안드레아 버트너(Andrea Buttner), 조안 그린바움(Joanne Greenbaum), 파멜라 프레이저(Pamela Fraser), 차발랄라 셀프(Tschabalala Self)의 작품이 전시된 서재.
그 후 나폴레오네는 4백 개 이상의 작품을 수집하기 이르렀으며 현재 은행가인 남편 그레고리고와 함께 마치 갤러리 같은 공간에서 살고 있다.(2020년 11월에 이사했다.) 인테리어 허가를 받기 위해 6년, 또 집을 고치기 위해 3년이란 세월이 필요했다. 즉 9년간 사랑이 듬뿍 담긴 노동의 시간을 보낸 셈이다. “저는 가족과 작품, 이 둘을 타협하고 연결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어요.” 그녀는 집을 짓는 동안 나탈리 뒤 파스퀴에(Nathalie Du Pasquier)와 마이크 타지마(Mike Tajima), 프랜시스 어프리처드(Francis Upritchard), 마르티노 감퍼(MArtino Gamper) 등 아티스트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아트가 건축의 일부가 되도록 심혈을 기울였다.
타지마의 제안으로 높은 천장까지 이어지는 거대한 중앙 계단은 리사 유스케이바게(Lisa Yuskavage)와 시린 네샤트(Shirin Neshat), 그레이스 위버(Grace Weaver) 그리고 니콜 워머스(Nicole Wermers)의 작품으로 채워졌다. 이는 곧 집의 심장과도 같은 역할을 하게 되었다. 또한 각 방마다 흥미로운 요소를 발견할 수 있다. 거실에는 캔버스에 그려진 도발적인 유채 작품 주디스 번스타인(Judith Bernstein)의 〈The Birth of the Universe〉와 니콜 아이젠만(Nicole Eisenman)의 볼록한 〈Saggy Titles〉가 진열되어 있다. 그 옆에는 색색의 전구와 실버 구슬 그리고 화환이 어지럽게 걸려 있는 양혜규의 옷걸이 작품이 놓여 있다.
평범한 가족에게 이곳은 집이 아닌 갤러리처럼 보일 수 있다. 집 내부에는 7층까지 갈 수 있는 엘리베이터가 있으며, 현관에는 화재 방지 스크린도 있다. 그레이 컬러의 단단한 피오렌티나 스톤 바닥은 걸을 때마다 메아리를 만들어낸다.
로비에 전시된 앤시아 해밀턴의 작품 〈Transposed Lime Butterfly〉 앞에서 딸 레티지아와 함께 서 있는 나폴레오네. 레티지아가 입고 있는 드레스는 Shushu Tong. 톱은 개인 소장품으로 Roksanda. 스타킹은 Calzedonia. 슈즈는 Pretty Ballerinas.
마르게리타 만젤리(Margherita Manzelli)의 작품이 걸려 있는 서재.
스물한 살의 페데리코와 열아홉 살 쌍둥이 그레고리오와 레티지아. 나폴레오네의 세 아이들은 아름다운 작품들과 함께 성장했고, 자연스럽게 뛰어난 창의력을 키워나갔다. 특히 다운증후군을 앓고 있는 레티지아는 어린 시절부터 엄마와 함께 여러 디너 파티에 참석하곤 했다.(나폴레오네는 열정적인 요리사이기도 하다. 2021년 〈발레리아 나폴레오네의 우아한 레시피 카탈로그〉라는 제목의 책을 출판한 바 있다.)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레티를 사랑해요. 아티스트들은 그녀의 영혼을 이해하죠.” 레티지아는 2개 국어를 구사하며, 엄마와 종종 이탈리아어로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두 사람이 함께한 촬영은 오늘이 처음임에도 불구하고, 레티지아는 카메라가 전혀 낯설지 않다. 2020년부터 전문 모델로 활동했기 때문이다. “그녀에게는 두려움이 없어요. 용기와 감각을 지녔고, 또 스스로 그것을 보여주려 하거든요.”
거실에서. 주디스 번스타인(왼쪽)과 니콜 아이젠만의 캔버스 작품.
a 진열된 헬 게테(Hell Gette)와 니콜 워머스(Nicole Wermers), 에밀리 스미스(Emily Smith), 레베카 모리스(Rebecca Morris)의 작품들.
나폴레오네가 아이들, 그리고 아티스트들과 함께 나누고 싶은 한 가지는 “자신의 삶을 스스로 만들 수 있는 자유”다. 이를 위해 그녀 역시 다방면으로 활동 중이다. 2015년, 런던 현대미술협회와 협력해 ‘발레리아 나폴레오네 XX’를 설립했다. 현존하는 여성 아티스트들의 주요 작품들을 매년 다른 영국 박물관에 기증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기구다. 또 롱아일랜드의 조각센터에서 아티스트의 새로운 작품을 지원하는 프로그램도 후원한다. 이 프로그램의 첫 혜택을 받은 앤시아 해밀턴은 그 후 2016 터너 상 후보로 지명된다. “아티스트를 지지하기 위해 재정적인 부분뿐만 아니라 저의 에너지를 헌신해요. 그것이 아티스트의 삶에 얼마나 의미 있는 일이었는지 알게 되는 순간이 가장 자랑스러워요.”
‘발레리아 나폴레오네 XX’라는 이름은 여성 염색체와 그녀 자신도 쌍둥이라는 사실에 대한 경의적인 표현이다. 그녀의 여동생 스테파니아 프라마(Stefania Pramma)는 액세서리 디자이너로 그들은 밀라노 북쪽의 작은 마을에서 유년 시절을 보내며 장인에 대한 존경심을 배웠다. 부모님은 르네상스 시대의 골동품에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나폴레오네에게 자신만의 취향을 갖추는(특히 패션 쪽에서) 가이드가 되어주었다. “어릴 때부터 옷을 만들어주는 재봉사가 있었어요. 자연스레 취향에 맞는 원단과 액세서리 고르는 법을 배웠죠.” 그녀가 회상한다. 매 시즌이 시작될 때, 그녀의 어머니는 계절을 견딜 수 있는 좋은 신발 한 켤레를 사라고 조언했다. “늘 양보다 질을 생각해야 한다고 배웠어요.”
벽에 걸려 있는 작품은 안드레아 버트너(Andrea Buttner)의 〈Nativity〉, 타우바 아우어바흐(Tauba Auerbach)의 〈(2.3)〉이 놓여 있는 테이블, 오른쪽에 세워진 나탈리 뒤 파스키에 〈Totem〉.
가에타노 페세(Gaetano Pesce)의 의자.
나폴레오네는 지금도 여전히 재단사에 의지한다.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는 제 이니셜이 새겨진 실크 셔츠나 트라우저, 카프탄을 만들어주죠.” 동시에 친구인 오스만 유세프자다의 가운을 사랑하며, 20대 때부터 플리츠 플리즈 이세이 미야케를 즐겨 입었다. “주변과 잘 어우러지면서도 독특하길 원해요. 이세이 미야케가 그것을 이뤄주죠.” 한 가지 확실한 건 나폴레오네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정확하게 안다는 것이다. 지금 그녀는 볼륨감 있는 록산다의 밝은 마젠타색 드레스를 입고 있다. “바로 이 옷이 제 스타일이에요. 이거야말로 제 스타일이죠!” 그녀가 감탄하며 소리쳤다. 여기에 레인보 패턴의 1970년대 페라가모 플랫폼 샌들을 매치했다. 그녀는 낮에도 극도로 화려한 신발을 신는 경우가 많다.
“제가 좋아하는 것과 실용성을 타협하지 않아요. 그저 아름다운 것들이 주는 행복에 대해서만 생각하죠.” 애정하는 것들에 둘러싸인 나폴레오네에게서는 늘 행복감이 뿜어져 나온다. 자체만으로도 그녀가 좋은 삶을 살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레티지아가 입은 점퍼, 셔츠, 튀튀, 속치마는 개인 소장품으로 Simone Rocha. 헤어 클립, 펌프스는 모두 Simone Rocha.
벽에 걸려 있는 실케 오토 냅의 작품과 바닥에 놓인 유디트 호프와 실비 플뢰리의 작품.